디스토피아의 특징 중 한 가지는 '격리'라고 봅니다. 격리라는 단어 대신 단절, 분열이라는 표현도 나쁘지 않겠죠. 흔한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의 한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초고층 빌딩이 곳곳에 서있고, 휘황찬란한 간판들이 번쩍이고, 최첨단 자동차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인조인간과 로봇이 골목을 누비고, 사람들은 온갖 유흥거리를 즐깁니다. 문명이 정말 정절에 다다른 것처럼 보이죠. 이렇게 본다면, 이 도시는 분명히 유토피아입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이런 도시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이며, 도시의 한 구석에는 헐벗고 굶주리고 너저분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도시에서 소외를 당한 빈민들이죠. 그들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시민 대다수가 빈민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시민의 절반 혹은 10~30% 가량만 빈민입니다. 빈민의 비율은 설정과 창작가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건 도시의 화려함이 빈민들을 가리고, 다른 시민들은 화려함만 바라보기 때문에 빈민들의 존재를 금방 까먹는다는 겁니다.


할렘, 슬럼, 빈민 지구, 뒷골목, 음지, 판자촌, 미개발 구역…. 뭐라고 부르든 상관 없습니다. 이 곳은 디스토피아의 진정한 실상을 알리지만, 아무도 여기에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재벌과 대자본가와 다국적 기업의 위엄이 너무 눈부시고 요란하기 때문에 시민들은 결코 빈민 지구에 눈을 돌리지 못합니다. 한편, 빈민 지구가 존재한다면, 부자들의 세계, 자본가들의 낙원, 기업인들의 천국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온갖 쇼핑과 다양한 여가와 갖가지 사치와 삐까번쩍한 겉모습으로 도배된 그 곳. 그런 곳이 재벌과 자본가와 기업인의 낙원일 겁니다. 하긴 이런 낙원은 결코 사이언스 픽션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이미 현실에 존재하죠. 부르즈 할리파 같은 곳을 보세요. 거기는 극소수 부자들의 천국이 아니지만, 그런 것과 비슷하게 변하는 중이었습니다. 전세계 인구의 10억은 물을 못 마시고, 20억은 푼돈으로 생활하지만, 부르즈 할리파는 그 엄청난 위용을 만방에 자랑했습니다. 여기는 세계 최고의 허브를 외치지만, 사실 음지에서 노동자들의 피땀을 아주 그냥 쥐어짜죠. 정말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아닙니까.


논픽션 서적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는 이런 실상을 고발하는 책입니다. 책 표지에 이렇게 써있군요. '두바이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 신자유주의가 낳은 불평등의 디스토피아.' 아예 책 표지부터 디스토피아 운운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서문을 읽어보면, <블레이드 러너>와 <메트로폴리스>를 언급합니다. 아시다시피 <블레이드 러너>의 도시 풍경은 그리 유쾌하거나 풍요롭지 않습니다. 산성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길거리는 우중충하고, 곳곳에서 퇴폐적인 기운을 풍깁니다. 그래서 부자들은 외계 행성, 오프 월드로 탈출합니다. <자본주의, 그들만의 파라다이스>의 저자는 현실이 <블레이드 러너> 같다고 말합니다. 외계 행성은 부르즈 두바이이고, 추악하고 추레한 도심지 모습은 빈민 지구라는 겁니다. 즉, 이 책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비판합니다. 그냥 비판하지 않고, 특히 공간적인 단절, 분열, 고립 등을 이용해서 신자유주의를 비판합니다. 그래서 대도시 디스토피아 작품을 언급했겠죠. 부자들이 자신만의 성채 속에 숨었다는 뜻입니다. 2007년 책이라서 몇몇 내용은 좀 철이 지났지만, 발상과 전개 과정은 독특하더군요.


이 책의 저자는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마이크 데이비스와 대니얼 멍크가 대표적인 저자이지만, 그 외에 다른 사람들도 각자 자기 글을 보탰습니다. 모두 19명의 저자가 각자 이야기를 했고, 그래서 이 책은 모두 19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중 하나가 차이나 미에빌입니다. <쥐의 왕>, <언런던>, <퍼디도 스트리트 정거장>, <크라켄>, <이중도시>를 쓴 양반이죠. 런던 정경 대학 출신답게, 또한 혁명적 사회주의 지지자답게 한 장을 빌려서 신자유주의를 열심히 비판합니다. SF 작가답게 아인 랜드부터 까고 보네요. 미에빌의 주된 목표는 거대한 재벌이나 다국적 기업의 수장이 아니라 쁘띠 부르주아입니다. 그러니까 거대 권력자보다 몇 단계 낮은 자본가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모순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거대 자본가들은 정치권을 흔들 수 있고, 각종 압박을 쉽게 피할 수 있습니다. 거대 자본가는 자기 회사가 무너져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정부가 거대 회사를 살리기 위해 공금을 잔뜩 쏟아붓거든요. 세금 문제도 딱히 거슬리지 않죠. 하지만 쁘띠 부르주아는 다릅니다.


쁘띠 부르주아는 거대 자본가들처럼 정부를 휘두르거나 세금 문제에 태연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재력을 자랑하지만, 그렇다고 공권력과 법망을 완전히 회피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쁘띠 부르주아는 자신들만의 유토피아를 만들어야 합니다. 정부가 압박하지 못하고, 다른 중산층과 서민과 빈민들이 넘볼 수 없는 유토피아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곳이 어디냐? 차이나 미에빌은 거대 선박이 해답이라고 말합니다. 부유하는 해상 도시는 공권력과 세금에게서 자유로운 공간이고, 중소 자본가들의 천국이 될 수 있습니다. 다소 뜬금없고 허항된 발상처럼 보이지만, 차이나 미에빌은 여러 근거들을 제시합니다. 한마디로 저들은 '공해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공권력과 세금은 공해를 침범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유하는 해상 도시를 꿈꾼다는 뜻입니다. 미에빌 본인도 이런 발상이 황당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은 그런 도시를 열망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뭐, 저는 관련 지식이 없어서 정말 중소 자본가들이 해상 도시를 조세 회피처로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흠, 차라리 회계사를 매수하는 게 훨씬 현실적이지 않을까요.


미에빌의 비판은 다소 사이언스 픽션처럼 보입니다. 하긴 예로부터 사이언스 픽션은 해상 도시 혹은 부유하는 공동체를 이야기했습니다. 고전적인 <해저 2만리> 같은 스팀펑크부터 <상어 배>와 <세계대전 Z>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거쳐 <플레바스를 생각하라> 같은 스페이스 오페라까지 말입니다. <해저 2만리>에는 만능 잠수함 노틸러스가 나옵니다. 그리고 네모 선장을 비롯해 일련의 사람들이 공동체 생활을 영위합니다. 사실 그들은 제국주의와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들이고, 제국 타도를 꿈꾸는 폭력적 무정부주의자들입니다. 노틸러스 승무원들은 압제와 지배와 권력에 넌덜머리를 내고, 그래서 보다 자유로운 바다로 피신했습니다. 바닷속은 누구의 영토도 아니고, 어떤 제국도 바닷속의 무정부주의자들에게 손대지 못합니다. 네모 선장은 자신이 '바다에서 누구보다 자유롭다'고 말합니다. 19세기의 참된 해저인이자 자유인이라고 할까요. 네모 선장이 육지의 속박과 사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죠. (그런데 대부분 네모 선장의 이런 면모를 그냥 지나치는 것 같습니다. <해저 2만리>는 바다 소풍 이야기가 아닌데.)


<상어 배>와 <세계대전 Z> 역시 육지의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여줍니다. 다만, 이 소설들의 해상 공동체는 자유로운 무정부주의 뭐 그런 게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육지에서 살 수 없기 때문에 바다로 도망쳤죠. 가령, 육지에서 엄청난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힘없는 서민들은 강자들의 싸움 도중에 쥐어터지겠죠. <상어 배>와 <세계대전 Z>도 딱 그렇습니다. 전자는 인구 폭발, 후자는 좀비 떼거리가 원인이죠. <상어 배>에서는 인구 폭발 때문에 도저히 육지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인구 압박을 피해 바다로 도망쳤고, 선박을 도시처럼 이용했고, 나름대로 자급자족합니다. 육지의 도움 없이 자신들끼리 살아가요. <세계대전 Z>에는 좀비 때문에 탈출한 보트 피플이 등장합니다. 좀비 떼거리들이 육지에서 하도 설치기 때문에 난민들은 어쩔 수 없이 바다를 떠돕니다. 이들은 배를 연결해서 도시처럼 꾸미는데, 나중에 중국의 원자력 잠수함(!)이 해상 공동체에 합류하죠. 이들의 생활은 해상의 자유와 거리가 멀지만, 적어도 육지의 폭력과 압박에서는 자유롭습니다. 이런 것도 해상 공동체의 특성이죠.


<플레바스를 생각하라>의 초거대 유람선은 위의 사례와 많이 다릅니다. 아니, 그냥 초거대 유람선이 아니라 초초초거대 유람선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배 위에는 온갖 쾌락과 유흥거리가 존재합니다. 그야말로 사치와 향락과 소비의 유토피아인 셈입니다. 부르즈 할리파의 SF 해양 도시 버전입니다. <플레바스를 생각하라>는 스페이스 오페라이고, 스페이스 오페라에는 별별 기발한 행성과 거대 건조물이 등장하죠. 그 중에 초초초거대 유람선은 자유로운 분위기와 사치를 강조하기 위한 설정 같습니다. 무정부주의자들의 잠수함, 해양인들, 보트 피플과 원자력 잠수함, 초초초거대 유람선 등등 이처럼 사이언스 픽션 작가들은 바다가 자유롭다고 생각했고, 육지의 압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겼고, 그래서 다양한 작품을 썼습니다. 누군가는 무정부주의 혁명을 위해서, 누군가는 좀비 떼거리를 피해서, 누군가는 자유로운 사치를 위해서 바다를 이용했습니다. 비단 이런 소설들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례가 더 있겠지만, 일일이 언급하기 힘들겠군요. 하지만 과연 미래에 과연 부유하는 해상 도시, 초거대 선박 공동체가 정말 등장할까요.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정말 초거대 선박 공동체가 등장한다면, 사람들이 그걸 이용하지 말라는 법은 없겠죠. 그런 공동체가 무사히 조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지만…. 태풍, 해적, 보급, 기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겠어요. 하여튼 그런 도시(?)에도 호기심이 동하긴 하는군요. 하지만 정말 그런 도시가 생긴다면, 그런 도시가 쁘띠 부르주아의 유토피아로 성공한다면, 정말 자본주의가 갈 데까지 갔다는 반증이겠죠. 호기심은 동하지만, 그런 해양 공동체는 그저 발상으로만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설사 선박 도시가 등장해도 자본가들의 피신처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들의 평화로운 낙원이었으면 합니다. 그런 신기술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전에 사회 구성원들이 현대 문명의 불평등과 빈부 격차와 생물 멸종과 환경 오염부터 해결했으면 좋겠습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가 갈리는 광경은 사이언스 픽션으로 충분합니다. 저도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가끔 읽지만, 그게 현실에서 재현되는 과정은 보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