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속의 상상 과학과 그 실현 가능성, 그리고 과학 이야기.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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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뉴로맨서>의 대략적인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예전에 고장원님 까페에서 본 글인데, 인공지능의 특이점을 다룬 온라인 논문이 나왔다고 합니다. 해당 논문은 읽어보지 않았고 번역 내용만 봤는데, 가히 SF 설정의 인공지능이 떠오르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논문에서 언급하는 SF 작품이 <2001 우주 대장정>이었습니다. 아마 디스커버리의 할 9000 때문에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논문까지 등장했겠죠. 할 9000은 비단 SF 유명세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유명세 또한 높으니까요. 아마 사람들에게 창작물 속의 인공지능을 아느냐고 물어본다면, R2-D2만큼 할 9000을 대답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SF 작품의 인공지능을 대변하는 얼굴 마담이자 대표 주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할이 그만큼 대접을 받을만한 캐릭터(인공지능)인지 의문입니다. <2001 우주 대장정>은 분명히 감동적인 작품이지만, 그렇다고 할이 인공지능의 얼굴 마담 대접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선 <우주 대장정>의 주제는 특이점이 아닙니다. 아서 클라크의 의도는 어디까지나 우주적인 경이입니다.
해당 작가의 다른 대표작 <유년기의 끝>과 <라마와의 랑데부>에는 인공지능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라마와의 랑데부>에는 인공지능 대신 유전자 개조 영장류가 등장해서 승무원을 보조합니다. 그러니까 아서 클라크의 관심사는 인공지능이 아니라 거대한 외계 존재의 위압과 신성입니다. 할 9000은 별의 관문 항해를 위해서 조연으로 등장했을 뿐이며, 사실 등장 분량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즉, <우주 대장정>은 인공지능 특이점이 주제인 작품도 아니고, 할 9000 역시 주연 자리를 꿰차지 않았으며, 등장 분량 또한 그다지 길지 않습니다. (차라리 데이빗 보우먼이 주인공이죠.) 그러니까 할 9000에게 인공지능의 얼굴 마담 역할을 맡기기는 좀 거시기하지 않나 싶습니다. 차라리 아시모프 소설에 나오는 로봇들과 한 번 비교해 보세요. 아시모프 소설은 그 자체로 로봇이 주제이자 중점이며, 관련 설정도 중요하고, 제목부터 아예 로봇이 들어갑니다. 따라서 아시모프 로봇이 SF 인공지능의 대표 주자라면 그럴 듯하겠지만, 할 9000에게는 과분한 위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으음, 아무리 할이 인상적인 캐릭터라고 해도 말이죠.
오히려 인공지능의 대표 주자에 어울리는 쪽은 뉴로맨서 같습니다. 일단 소설 제목부터 인공지능 이름을 가리키고, 소설 내용 역시 뉴로맨서와 조우하기 위한 기나긴 여정에 가깝습니다. 인공지능과 대화하기 위해 주인공 클래스부터 해커이고, 작중에서 기이한 가상현실을 수시로 묘사합니다. 그리고 결국 주인공은 문제의 인공지능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탄생을 지켜봅니다. 결국 이 소설은 해커 주인공의 시점으로 특이점 인공지능이 어떻게 탄생하고 사고하는지를 논하는 셈입니다. 인공지능이 나오는 SF 작품은 많지만, 특이점 돌파를 이토록 강렬하고 뛰어난 필력으로 서술하는 책도 드물 거라고 봅니다. 뉴로맨서의 탄생은 마치 한 송이 꽃이 위대하게 피는 듯한 느낌입니다. 소설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하고, 뉴로맨서의 실마리를 서서히 보여주던 중 마침내 결정적인 만남을 묘사하고, 신비스러운 탄생과 장엄한 각성을 이야기합니다. 할란 엘리슨, 필립 딕, 로저 젤라즈니 등도 그런 식으로 작품을 썼지만, 그래도 <뉴로맨서>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이 주인공이면서 정작 인공지능이 안 보이는 수법 때문이겠죠.
뉴로맨서에게 사이버 스페이스는 둥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윌리엄 깁슨은 다짜고짜 인공지능을 부각시키지 않고, 우선 뉴로맨서가 태어날 수 있는 초석을 섬세하게 묘사합니다. 해커 주인공이 어떻게 가상현실에 접속하는지, 그 가상현실에서 어떤 일상이 흐르는지, 그 안에서 누가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한참 동안 이야기합니다. 그러는 와중에 뉴로맨서는 서서히, 아주 서서히 자기 존재를 드러냅니다. 절대 함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독자가 소설 속의 사이버 스페이스에 어질어질할 때쯤 그 사이버 스페이스를 기반으로 하는 존재가 마침내 인사를 건넵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타난 뉴로맨서는 뭔가 정작 하는 일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존재를 드러내고 사상을 알려줄 뿐 뭐, 인류를 돕는다거나, 세계를 정복한다거나, 자기 종족을 만든다거나 그런 거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한순간의 인상으로만 끝나기 때문에 더욱 이상적인 듯합니다. 독자가 정신 차릴 수 있는, 상상할 수 있는 여유를 충분히 남긴다고 할까요. (내용 누설을 피하기 위해 더 자세한 설명은 하지 않겠습니다.)
기나긴 잉태 끝에 태어나는 아기처럼…. 소설은 뉴로맨서의 등장을 위해 그렇게나 무던히 사이버 스페이스를 묘사한 셈입니다. 게다가 윌리엄 깁슨의 그 퇴폐적이면서 낭만적인 필력이야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솔직히 읽을 때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로망을 자극하는 필력임은 분명합니다. 이토록 인상적인 인공지능이 있음에도 조연에 불과한 할 9000이 인공지능 얼굴 마담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실 할이 인공지능 대표로 떠오른 이유는 인공지능으로서의 특성보다 오히려 스탠리 큐브릭 영화가 유명하기 때문일 겁니다. 만약 스탠리 큐브릭이 영화를 찍지 않았다면, 할 9000은 오히려 아시모프의 단편 소설 로봇보다 인지도가 떨어지는 신세였을 거라고 봅니다.
요즘 영화 her의 사만다라는 처자도 괜찮다던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