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님의 요청에 좀 늦게 올리는 별 볼일 없는 SF 전자오락 감상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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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아웃 4는 스카이림을 이은 베데스다의 차기작이었던만큼 작년 최고의 기대작 중 하나였고, 발매 이후로는 그만큼 많은 평가가 나왔으며 많은 옹호와, 더 많은 비판들이 나왔습니다. 두 의견 다 나름의 설득력을 가집니다만, 그래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대했던 것만큼의 무언가는 되지 못했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개인적으로 말하자면야, 폴아웃 4는 기대를 꽤 하긴 했었는데 막상 해보니 오블리비언부터 제가 해본 베데스다 게임 중에서 제일 실망스러운 물건이었습니다. 실망스런 정도를 말하자면 하다가 이건 아닌데 싶어 꾸역꾸역 하다 허탈해진 뒤 지웠다고 요약할 수 있겠네요. 뭐, 감상 쓸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만, 그래도 110시간 정도 했으니 할 만큼은 했긴 하죠.

 이유를 찾자면...물론 다른 자잘한 것도 있겠지만 베데스다의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단점만이 부각되었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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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로 대표되는 현세대의 MMORPG들을 테마파크 MMO라고 부르곤 합니다. 놀이동산에 놀러간 것처럼 이곳저곳 놀이기구들을 정해진 순서대로 체험하면서 만렙까지 진행하게 된다는 거죠. 하지만 그런 고착화된 장르적 정의보다 단어 자체의 어원을 따지자면 모로윈드 이후의 베데스다식 RPG야말로 진정한 테마파크의 느낌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매력적인 가상의 게임 세계라는 광활한 공원에 놀이기구들이 가득 차 있고, 가고 싶은 곳 아무 데나 가서 정해진 세트피스들을 원하는 대로 체험해나간다는 것입니다. 사이드퀘스트를 해도 좋고, 메인 스토리를 해도 좋고 아니면 그냥 자잘한 놀이기구 하나하나 다 구경하기만 해도 좋습니다. 몇 발자국 걸을 때마다 뭔가 이벤트가 벌어지고 탐험할 던전이 나오고 볼거리가 넘쳐납니다. 베데스다가 정말로 잘하는 것은, 처음 놀이동산에 놀러온 어린아이처럼, 여기저기 둘러보며 이것저것 다 타보고 싶어 플레이어를 안달나게 만드는 기묘한 마력을 가진 세계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 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베데스다는 게임 내 세계의 디테일한 묘사에 유난히도 집착했으며, 메인 스토리 작가조차도 없고(이는 스토리와 대사 면에서 욕을 많이 먹는 계기가 됩니다만), 자잘한 지역별로 개발팀을 나누어 독립적으로 개발하도록 되어 있을 정도죠.

 이쯤에서 옵시디언이 만든 뉴 베가스 말고, 베데스다의 폴아웃 3을 돌이켜 봅시다. 폴아웃 3에서는 이게 제법 잘 먹혔습니다. 아토믹펑크와 포스트아포칼립스라는 두 장르가 결합된, SF 아이디어라는 관점에서로 보아도 상당히 좋은 세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요. 베데스다의 개발진들은 돈 주고 새로 사온 세계관에 여태껏 만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만드느라 신나서 이것저것 많이 잔뜩 집어넣어댔죠. 원작의 조준 시스템을 멋지게 변형한 VATS, 올드팝이 흘러나오는 라디오에 마네킹과 물리엔진을 이용한 온갖 이스터에그와 조금만 둘러봐도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이 제법 눈에 띄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베데스다는 폴아웃 4에서는 각 놀이기구들을 더욱 더 흥미롭고 재미있게 만드는 데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전작에 대비해서도 핵전쟁 이후의 보스턴은 상당히 썰렁하게 느껴지며, 어딜 가나 비슷비슷하고 단조로운 것들이 많이 보입니다. 가볼 만한 장소들이 없다는 건 아닙니다. 몇몇 장소들은 괜찮게 꼽아볼 수 있지만...백악관과 워싱턴 모뉴먼트 등 워낙에 흥미로운 장소들이 많았고, 이걸 또 독특하게 활용하던 폴아웃 3의 워싱턴 DC에 비해, 폴아웃 4의 보스턴은 군데군데 구멍난 공간이 존재하며 등장하는 몇몇 장소들은 전작에서 안일하게 재활용되었거나, 혹은 아예 없어도 좋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 그저 의무감에 억지로 집어넣은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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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니까, 놀이기구가 재미없는 놀이공원이라니, 장사가 되겠어요?

 다시 베데스다의 전작으로 돌아가 봅시다. 폴아웃 3의 메인 스토리는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스토리 중간중간을 연결하는 이벤트들은 상당히 충실하게 잘 짜여 있었습니다. 플레이어의 탄생부터 시작해서 어린 시절의 경험들과 자신이 자라온 볼트에서의 탈출까지 진행하면 바깥세상의 황무지로 나오게 되고, 처음 들리게 되는 마을 메가톤에서는 머리가 살짝 이상한 듯한 모이라라는 여자가 황무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책을 쓰고자 하니 도와달라고 하죠. 수락하면 지뢰밭에 들어갔다 와보라고 하질 않나 방사능이 얼마나 위험한가 직접 쐬어보고 오라질 않나 온갖 황당한 일들을 시킵니다. 세계관과 게임의 시스템을 간단하면서도 인상깊게 체험시켜주는 튜토리얼 부분이죠. 심지어 메인 퀘스트조차도 위성 안테나 하나 구해오라고 소련제 LK에서 따온 달착륙선과 음성 안내가 붙은 볼트 모형 같은 볼거리가 잔뜩 널려 있는 박물관을 구경하도록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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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계획에 대응했던 소련의 LK와 폴아웃 3 게임상에서 플레이어가 안테나를 떼와야 하는 버고 2.



 반면에 폴아웃 4의 도입부는 이에 비하자면 정말로 심심하기 그지없습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등장인물을 연이어 등장시키고 상황을 막 던진 뒤 몇 분 지나지 않아 플레이어를 황무지로 떠밀며 알아서 진행해 보세요를 외치죠. 게임 진행 초반부에는 몇몇 버려진 폐허들과 작은 규모의 농장, 폐차장 정도들밖에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나마 좀 진행하다 보면 박물관 내부를 지나게 되는데, 3편에서의 박물관에 비해 4편에서의 박물관은 벽화 하나에 아무 감흥 없는 마네킹 몇 개 구석에 쓰러져 있는 게 전부죠. 게임상 처음 들리게 되며 게임상 거의 유일한 제대로 된 마을 다이아몬드 시티 역시 야구 스타디움을 배경으로 삼았다는 특징이 있음에도 이와 연관되어서 신선하게 받아들일 만한 요소가 부족합니다. 적어도 아이디어만으로는 독특하고 멋진 이 세계관을 체험하고, 직접 그 안에서 행동하며 플레이어가 느끼게 할 거리가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장소 자체의 개성도 부족한데, 장소 자체를 활용할 거리들조차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전쟁 전의 미국 마을, 투기장인 컴뱃 존, 과거의 기억을 체험해 볼 수 있는 메모리 덴, 로봇 경마장, 맵 끝자락의 방사능 사막, 얼마든지 세계관과 플레이어의 경험을 풍부하게 할 만한 흥미로운 인물과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는 무대지만 폴아웃 4에서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해 그저 잠깐 스쳐지나가는 장소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퀘스트는 별다른 의미 없이 어디 던전에 가서 적 때려잡고 아이템 주워오라는 것의 반복이며, 이런 던전들 역시 특기할 만한 구석이 부족하고 삭막한 맵 가운데서는 찾기도 힘듭니다. 그나마 나름의 스토리가 있는 메인 퀘스트의 상당 부분조차 그냥 별 개성 없는 장소에 가서 적을 때려잡으라는 식인데, 서브 퀘스트들 역시 대부분 그런 식이고, 그렇게 많이 넣고서도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몇몇은 무한 반복으로 주어지기까지 합니다.

 한편 전작 대비 추가된 것은 자원을 모아 건물을 짓거나 동력원을 주워다 파워 아머를 입고 돌아다닐 수 있는 시스템들, 그리고 보스급의 적을 잡으면 랜덤한 효과가 붙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것 정도인데...그 자체로는 나쁘지 않지만, 이 역시 반복을 부채질하면 부채질했지 폴아웃 4의 놀이동산에는 도움이 별로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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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반복 자체가 컨텐츠가 되는 게임들도 있습니다. 반복 노가다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을 테고, 설령 반복을 하더라도 매번마다 다양한 변수가 생기거나, 혹은 워낙 잘 짜여져 있고 독특하다면 여러 번 더해보는 것도 얼마든 가능한 것이 게임의 세계죠. 하지만 이번 폴아웃 4는 그런 시스템이 아니고, 더 나아가 여태까지의 베데스다 게임들의 디자인 철학 역시 그런 종류가 아닙니다. 놀이기구들은 처음 탈 때는 재밌지만 보통 바로 여러 번 반복해서 타고 싶어지지는 않습니다. 베데스다의 세트피스들 역시 현실의 놀이기구처럼 그저 정해진 트랙 위에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이란 건 마찬가지인 걸요. 대체 왜 스카이림 이후로 베데스다는 이런 무한 반복에 집착하는 걸까요?

 이 반복이 가져오는 단조로움은 더 줄어든 자유도 덕분에 더욱 심각해집니다. 플레이어는 여전히 공원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마음가는 대로 돌아다닐 수는 있지만, 선택의 자유라는 면에서는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능력치 시스템을 단순화시켰고 퀘스트 디자인 역시 단순해진 덕분에 플레이어가 설득으로 싸우지 않고 넘어간다던가 뭔가 일을 다르게 처리할 수 있는 경우는 무척 드뭅니다. 대화 시스템 역시, 이제는 주인공 대사를 음성 녹음했다는 핑계로 한 번에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4개로 줄여버렸고 그나마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가 거의 없어,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뭔가를 물어본다는 느낌조차 제대로 들지 않을 정도로 성의가 없습니다. 'No'를 골랐는데 NPC가 뭐 그래도 나는 'Yes'라고 받아들일래 하고 반응할 때는 거의 당황스러울 정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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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그래도 RPG인데, 왼쪽의 폴아웃 4는 대화가 저게 뭡니까.



 전투의 경우에도 무기 개조 시스템이 들어가긴 했지만 무기의 종류 자체가 워낙 적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다양한 무기를 활용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고, 캐릭터의 육성 방식 역시 다양하지 못합니다. 심지어 NPC조차도 마음대로 죽일 수 없는 경우가 빈번합니다. 심지어는 플레이어가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게 되는 해킹과 문따기 미니게임 역시 3편과 똑같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올드 팝송조차도 상당수가 3편의 재탕입니다!




-이논 저의 OST는 꽤 좋긴 합니다만...역시 재탕이 좀 있긴 합니다.


 이런 것들은 가뜩이나 반복적인 게임플레이에서 변수들을 더욱 더 줄여버리는 것이죠. 그러니까, 놀이기구 자체도 부실하고 단조로운데 그나마도 강제로 몇 번이고 반복해서 타야 하는 놀이공원입니다. 장사가 잘 될 리가 있나요.
 
 짚고 넘어가자면 분명히 장점도 개선점도 있습니다. 적 종류도 무기 종류도 부족하긴 하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FPS의 느낌이 날 정도로 전투는 개선되었고, 메인 퀘스트의 스토리라인도 준수합니다. 동료들의 개성 역시 굉장히 좋아졌습니다. 게임상 이벤트 전개에 맞춰 녹음된 대사가 있음에도 그 상황에 동료가 직접 끼어들어 말하는 대신 플레이어가 일일이 물어봐야 해당 대사를 하도록 해 놓은 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그러면서도 아이템을 줍고 전투를 할 때마다 동료가 같은 대사를 반복하는 건 지겹게 들어야 합니다), 어쨌건 웬만한 RPG 기준으로도 합격점은 충분히 되는 동료들입니다. 다른 등장인물들은 다들 널빤지처럼 얄팍하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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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베데스다도 괜찮은 캐릭터를 만들 수는 있는 모양입니다.



 최악에서 차악 정도는 될 만큼 개선된 곳도 있습니다. 버그는 짜증나기는 하지만 그래도 심각한 건 겪지 못했습니다. 캐릭터 애니메이션도 최적화도 나쁜 편이만 그래도 심각할 정도는 아니죠. 조작계 역시 엄청나게 불편하고 짜증나지만(근접공격 키를 길게 누르면 수류탄이 나간다니, 누구 생각이래요) 못해먹을 정도는 아닙니다. 최소한 베데스다는 자신의 단점을 인식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점을 계승 발전시키지 않은 것은, 단점을 완전히 없애지 못한 것보다도 더 치명적인 문제점입니다. 베데스다의 전작에서는 이런 기술적, 디자인적 단점들이 훨씬 더 심각했었지만, 최소한 장점은 확실했고 그 경험 자체는 정말로 재미있었기 때문에 대부분 용서할 수 있었습니다. 폴아웃 4는 그런 경우가 아니기 때문에 참아 넘기기가 힘든 것이고, 심지어 하면 할수록 베데스다는 그걸 의도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죠. 랜덤으로 옵션이 붙어 떨어지는 무기와 자원을 긁어모아야 하는 건설 시스템은 반복 플레이를 감안한 것일 테고, 주인공에게 음성 대사를 부여하고 대화 시스템과 능력치를 단순화시킨 것 역시 의도적인 행동이 아닐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게임을 더 낫게 만드냐면, 오히려 그 반대거든요.


 결과적으로 전작 이상의 재미있는 경험을 기대하다가, 가끔씩 이건 그나마 좀 괜찮군...하는 생각을 하는 정도에 그치고 아쉬워하는 게 제 전반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렇게 드물게라도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덕분에 100시간 넘게 붙들고 있었으니 베데스다의 마력은 완전히 퇴색하지는 않은 셈이지만, 결과적으로 이 회사는 앞으로는 어떤 게임을 만들고자 하는 것인지는 폴아웃 4를 하드에서 지우면서 머릿속에 떠올리게 되는 가장 큰 의문점일 수밖에 없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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