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은 장르 창작물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며, 그건 SF 장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수없이 많은 소설과 만화, 영화, 게임 속에서 다양한 군인, 경찰, 모험가, 사냥꾼이 크고 작은 괴물을 때려잡느라 바쁠 겁니다. SF 창작물의 괴물은 장르가 태동한 19세기부터 곳곳에 등장했는데, 허버트 웰즈도 이런 소설을 자주 쓴 작가입니다. 허버트 웰즈는 흔히 사회주의를 내세우거나 스팀펑크 계열을 썼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단편 소설로는 밀리터리부터 이세계 진입까지 별의별 소재를 건드렸고, 그런 소재 중에 괴물도 존재합니다. 요즘에야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생명체나 외계의 침입자가 자주 나오지만, 웰즈가 살던 시대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사이였습니다. 당연히 유전자 조작 생명체나 외계 괴물보다 실존 동물을 과장해서 등장시켰습니다. 그것도 영국 태생이 아니라 대부분 해외 출신입니다. 당시 영국인들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의 생태를 몰랐고, 당연히 외국의 낯선 동물이 괴물처럼 보였을 테니까요.


웰즈가 아시아나 아메리카, 아프리카 등지의 괴물을 쓴 이유도 영국 작가이기 때문일 겁니다. 클럽에서도 여러 번 논의했는데, 영국은 소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었습니다. 여러 나라에 식민지를 세우고 등골을 쪽쪽 빨아먹었죠. 당연히 해외 문물이 자주 들어오고, 아시아나 아메리카로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영국 시민들은 해외 동식물을 보고 놀라거나 모험가들의 이야기가 신기했을 겁니다. <셜록 홈즈>를 쓴 코난 도일도 줄기차게 인도 밀림의 독초나 육식동물을 범죄 수단으로 삼았죠. <잃어버린 세계>는 남미 정글이 무대였고요. <정글북>을 쓴 루디야드 키플링도 인도 야생동물을 자주 써먹었습니다. 라이더 해거드는 <솔로몬 왕의 동굴>에서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삼았죠. 허버트 웰즈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 작가와 독자들은 이국적인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탐험하거나 괴물과 조우하는 이야기가 낭만적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비경탐험물이 등장하는 전초가 되기도 했죠. 식민지 당사자들에게는 가슴 아픈 역사지만.


<허버트 조지 웰즈 단편집>에도 해외의 괴물 이야기가 여러 편 실렸습니다. 우선 1894년에 쓴 <기묘한 난초의 개화>는 제목처럼 식인 식물이 등장합니다. 말레이에 다녀온 탐험가가 웬 난초를 가지고 왔는데, 원주민들조차 무슨 종인지 모릅니다. 그게 여러 사람을 거쳐 주인공의 손에까지 다다랐죠. 어찌된 영문인지, 이것들은 피를 먹고 자라며, 혼자 남은 주인공을 공격하기 이릅니다. 이렇게 보면 굉장히 으스스한 내용인 것 같지만, 분위기는 의외로 경쾌합니다. 주인공은 지루한 일상이 따분하다고 불평하고, 한 번쯤 멋지고 짜릿한 모험을 겪기 원합니다. 결국 식인 식물한테 당했으니 소원풀이한 셈입니다. 이 놈들은 먹이를 잡으려고 이동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사람한테 덤빈다는 점에서 식물 괴수의 형님뻘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흡혈 난초가 어떻게 먹이를 식별하고 피에서 양분을 얻는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설정이 그다지 자세하지 않고, 분량도 짧으며, 어디까지나 잠깐 오싹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목적이니까요.


같은 해에 쓴 <아부 천문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짧은 분량, 잠깐 등장하는 괴물, 두리뭉실한 설정 등으로 상상 과학보다 그냥 공포물에 가까워 보입니다. 그렇다고 초자연적인 지경까지 가지 않고 최대한 현실적으로 묘사했으니, 완전한 공포물은 아니죠. 아부 천문대는 보르네오에 있는데, 거기서 어떤 과학자가 연구 중이었습니다. 당연히 별을 보려고 밤중에도 일했죠. 하지만 별 대신 뭔가 시커먼 물체가 날아오는 게 보입니다. 정체 불명의 물체는 천문대 안으로 들어오고, 이어서 과학자를 공격합니다. 그 괴물이 무엇인지 끝내 밝히지 않는데, 그나마 보르네오 밀림에서 아직 알려지지 않은 동물이 아닌가 짐작할 따름입니다. 현대 독자가 보기에는 시시한 내용이지만, 19세기는 극한 지역으로 탐험을 떠나는 시기였고,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잘 먹혔을 겁니다. 당시 유럽 사람들에게 보르네오 정글은 검마 판타지의 던전이나 다름 없었을 테니까요. 거기 사는 영장류만 해도 기괴한 짐승으로 보였겠죠. 보르네오 역시 엄연히 사람이 살아가는 터전이었지만, 유럽인들이 그런 거 신경 썼겠습니까.


<바다의 침입자>는 공간 설정 때문인지 해외가 아니라 자국이 배경입니다. 콘웰과 던월 바다에서 벌어지는 소동입니다. 어차피 바다 밑은 미지의 영역이므로 굳이 해외로 나갈 필요가 없죠. 21세기 현재도 심해는 우주만큼 아리송한 곳이니까요. 눈치 빠른 독자라면, 제목만 보고 무슨 내용일지 짐작했을 겁니다. 혹시 두족류 촉수 괴물이 선박을 공격하는 거 아니냐고 묻는다면, 10점 만점에 10점 드리겠습니다. 너무 전형적이고 상투적이라고 지적한다면, 으음, 글쎄요. 웰즈는 19세기 사람이잖아요. 이 소설은 1896년에 나왔습니다. 상상 과학이 한창 발흥하던 때였죠. 그러니 진부한 상상력이라고 비판할 게 아니라 촉수 괴물의 원조격으로 인정해야 할 듯합니다. 쥘 베른이 큰 오징어가 나오는 <해저 2만리>를 출간한 시기가 바로 1896년이고요. SF 초창기의 양대 산맥으로 불리는 두 작가가 똑같은 시기에 촉수 괴물을 썼다는 게 재미있는 우연이네요. 하나는 별 내용 없는 단편이고, 다른 하나는 길이길이 읽히는 잠수함 장편 소설이지만.


허버트 웰즈는 거미 괴물도 창조했습니다. 거미 괴물도 장르를 막론하고 인기 만점이죠. 대표적인 거 두어 개만 따져도 그렇습니다. <두 개의 탑>에는 거대 거미 쉴롭이 나와서 호비트들을 괴롭힙니다. 거미줄로 지나가는 사람을 묶고, 독니로 마취시킨 다음, 껍질만 남기고 빨아먹죠. <스타십 트루퍼스>에는 거미와 닮은 외계 절지류, 아라크니드가 나옵니다. 비록 외계인이지만, 겉모습은 우주판 거대 거미입니다. 주인공 리코는 아라크니드를 보고 악몽처럼 생겼다고 말했죠. 하긴 거미가 예쁘다는 사람은 없을 테니, 거미가 장르 소설의 괴물로 나오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거미 계곡>은 초기 거미 괴물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행이 계곡을 지나다가 실뭉치가 몰려오는 걸 목격합니다. 알고 보니, 그건 커다란 거미들이 굴리는 실뭉치였습니다. 일행은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거대 거미들과 난데없는 추격전을 벌입니다. 다만, 작중 배경이 어디인지 확실하게 나오지 않네요. 역시 아시아나 아메리카가 아닐까 싶은데.


<개미 제국>은 이전에도 소감을 올린 적 있습니다. 군대개미를 모티브로 삼았는지 모르겠지만, 배경은 남아메리카입니다. 식민지 마을에서 개미 떼가 하도 극성을 부리자 이걸 퇴치하려고 모니터 함선이 출격합니다. 곤충을 처리하기 위해 전함을 파견하다니 좀 어이가 없는데, 등장인물들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허나 막상 현장에 도착하니, 그 놈들은 그냥 곤충이 아니었습니다. 마치 지성이 있는 것처럼, 전략/전술을 짜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해군은 그 모습을 보고, 어쩌면 인류에게 크나큰 위기가 닥칠 것 같다고 두려워합니다. 단순한 괴물 소설이기보다 인류 멸망을 가늠하거나 세계 전쟁까지 이를 수 있는 묵직한 소재입니다. 은근슬쩍 허무주의나 우주적 공포도 보여주네요. 이 여기서 규모를 훨씬 키우면 <우주전쟁>이 나오겠죠. 개미 떼 역시 후대 괴물 장르에서 자주 써먹는 곤충입니다. 하긴 군대개미는 그 자체로도 꽤나 무섭게 보이고, <그것들!>처럼 거대화한 개미가 사람을 습격한다는 영화도 유명하죠. 검마 판타지에도 거대 개미가 나와서 난리법석이고.


이런 작품들을 보면, 요즘 유행하는 각종 괴물도 전부 원형이 존재하는 셈입니다. 식인 식물, 밀림 속의 짐승, 거대 거미, 무수한 개미 떼, 심해의 촉수 괴물까지. 사실 소설 자체는 그리 대단할 거 없습니다. 깊이 있는 주제도 아니고, 대개 뻔한 내용이며, 싱거운 것들이 다수입니다. <개미 제국>은 그럴 듯하지만, 그 외에는 <바다의 침입자>와 <거미 제국>이 그나마 나은 편이며, 나머지 세 편은 시시합니다. 너무 싱겁게 끝나서 좀 뜬금 없다는 느낌입니다. 하지만 작품성이 어떻든 간에 웰즈는 여러 괴물을 상상했고, 사이언스 픽션의 괴물들이 19세기부터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고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