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무협 포럼
판타지, 무협 세계의 정보나 설정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그 다채로운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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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선가 마법이 없는 판타지 소설이 있다는 글을 봤는데, 팥소 없는 붕어빵도 아니고 실제로 그런 책이 있나요?
하이, 로우 판타지 구분이라는게 있습니다. 아주 널리 쓰이는 분류가 아니고 명확히 구분된 기준도 아니긴 하지만 대충 하이 판타지는 판타지적인 요소(용이라던가 마법 같은것)이 매우 중요하게 사용되거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로우 판타지는 이런 요소가 매우 비중이 적거나 아예 없는 판타지를 말합니다.
꼭 마법이 있어야만 판타지는 아니며 애초 그분의 말씀 처럼 충분히 발전된 과학은 마법과 구분할수 없습니다. 이른바 사이언스 판타지 라는것도 존재하며 현재 개발중인 새로운 토먼트의 세계관인 누네메라의 마법은 사실 고도로 발달된 과학이죠.
성인용 소설로는 머빈 마크의 <고멩가스트> 시리즈가 마법 없는 판타지로 유명하죠. 아동용은 존 플래너건이 쓴 <레인저스>도 마법 비중이 상당히 낮은 편입니다. 환상적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한 건 아니지만, 일반적인 검마 판타지처럼 화염구 펑펑 쏴대는 식은 아니죠. 오히려 가상의 중세 공간을 만들고, 거기다 마법 요소 일부를 추가한 것에 가깝습니다. 사실 요즘 굉장히 유행하는 <얼음과 불의 노래> 시리즈도 사실상 마법적인 비중이 퍽 약하죠. 그래서 검마 판타지로 분류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법 없는 판타지는 드물지 않게 시도하는 작법입니다. 그냥 가상의 중세 역사를 나열하면, 그건 마법 없는 판타지가 되니까요. 따지고 보면, 중세 대체 역사 소설이나 가상의 중세 소설은 사실 마법 없는 판타지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점에서 <로빈 후드> 같은 기사 로망스는 마법 없는 판타지의 형님뻘이죠.
위에서 이야기한 소설 말고 영화나 게임 쪽에서도 이런 작품은 더러 보입니다. 볼프강 패터슨이 만든 <트로이>처럼 마법적인 요소를 죄다 빼고, 진짜 역사물로 만든 것처럼요. 혹은 <배틀 브라더스>처럼 뱀파이어, 늑대인간, 미라 따위 나오지만, 인간 측은 죄다 실제 병종만 등장할 수도 있어요. 판타지 작품이 꼭 마법에 매달리는 건 아닙니다.
일단, '마법'이라는 것을 비교적 폭넓게 봤을 때 마법이 등장하지 않는 판타지는 극히 드문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이 작품에 따라서는 '과학'의 다른 이름이거나 '신앙에 의해 발동되는 것'이거나 여러가지의 형태이고 '마법'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작품 속에서 표현된다고 하더라도 독자들에게 있어서 '마법'과 크게 구분이 없이 느껴진다고 했을 때 '마법'이라는 카테고리로 이야기 할 수 있으니까요.
한편으로 이토록 폭넓은 의미로 '마법'을 이야기할 때 '마법'은 판타지 뿐 아니라 현대물 등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웃음) 드라마 등에서 '운명적 인연'이나 '점장이의 예언' 등의 '마법적' 장치는 그다지 드물지 않죠.
때때로 구체적인 형태로 '마법'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언급이나 일종의 믿음으로써 '마법'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작품에 마법사도 없고, 마법을 명확하게 쓰지도 않으며, 심지어 등장인물들이 '난 마법따위 믿지 않아'라거나 '마법사라는 것들은 사실 전부 사기꾼이지'라는 대사를 심심치 않게 할 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저주'나 '마법'에 대한 신화나 언급이 틈틈히 나오고 이러한 언급이 필연적이고 구체적인 연결고리를 갖지는 않은채 실현되기도 합니다.
(마법사도 아닌 인물이 원한에 차 내뱉은 저주가 작품후반에 그대로 실현되면서 극적효과를 가중시키는 장치 등으로 쓰이는 경우들 말이죠)
마법이라는 자체가 '불명확한 인과에 의해 나타나는 기묘한 현상들에 붙여지는 이름'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세상만물의 작동원리가 모두 명확하게 밝혀진 세상'을 무대로 하지 않는 이상, 어떤 형태로든 등장하곤 합니다. 아무리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세계라고 하더라도 불명확한 우연에 대해 '마법'과 같은 초현실적 이유를 가지고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존재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판타지를 그려내는데 있어 '마법'이 필수적인 것은 아닙니다. 환상의 모든 시작과 끝이 마법에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다만 마법은 판타지를 만드는데 있어서 굉장히 편리한 장치인 것 뿐이죠. 팥소가 붕어빵에 맛을 내는데 꽤나 훌륭한 재료인 것처럼 말이죠.
마법이 나오지 않는 환상문학 부류의 한 형태를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Twillight zone(한국 방영 제목으로 환상특급)'이라고 봅니다. 물론, 에피소드 중에는 마법이 등장하는 것도 있습니다.(웃음)
이런 형태의 환상문학부류는 장르소설계뿐 아니라 순수문학계에서도 자주 등장합니다.
카프카의 소설에도 환상요소는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마법'으로 분류하기에 무리가 있죠.
제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국내 작품 중에, 소설가가 손님을 맞이하는데 알고보니 그 손님이 자신이 썼던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었다는 식의 스토리도 있습니다. 이 소설의 구성이나 전체적인 전개는 충분히 환상성을 자극하지만 마법과는 동떨어져있죠.
총량으로 보면... 마법이 없는 팬터지가 오히려 더 많지 않나 생각될 정도입니다.
팬터지라는 것의 정의 자체가 본래 환상성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하고,
"플로베르가 리얼리즘을 정의하면서, 그 안티테제가 팬터지"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르헤스의 단편 중 상당수는 팬터지에 속하는 사유를 담은 사색소설이지만, 마법과는 무관합니다.
이탈로 칼비노 역시 <반쪼가리 자작>, <존재하지 않는 기사>, <보이지 않는 도시들>은 환상성이 강하지만,
마법사도 등장하지 않고 마법도 없고, 그런 거 필요 없습니다 - 그냥 환상적인 상황을 묘사할 뿐이죠.
스티븐 킹의 소설은 귀신들린 자동차, 귀신들린 집, 귀신들린 도시 등을 다루는 호러 스타일의 팬터지인데,
마법은 없지만 당연하게도 팬터지임에 틀림 없습니다 - 동서양 막론하고 이런류 팬터지 작품은 엄청 많죠.
"유령 이야기"는 오래된 팬터지의 중요한 갈래인데, 마법하고 하등 상관 없이 얼마든지 신비롭게 전개됩니다.
"뱀파이어 이야기", "좀비 이야기", "영생 이야기" 등도 팬터지의 주요 테마이고, 마법이 꼭 필요하지 않습니다.
'동물 팬터지"도 <워터십 다운>, <레드 월>, <버드나무 숲에 부는 바람>등 많은 작품이 계속 나오고 있고,
마법같은 것은 전혀 등장하지 않지만 당연하게도 팬터지의 매우 중요한 서브 장르로 인정되고 있습니다.
동양에서 쓰여졌던 수 많은 고전 팬터지는 애당초 마법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습니다.
선, 도교 쪽에서 도를 많이 닦으면 "도술"을 부릴 수 있다고 하므로 도술이라면 또 모를까...
<봉신연의>, <서유기> 등에 도술이 많이 등장하고, <홍길동전>, <박씨부인전>도 도술을 펼치죠.
도술을 마법과 동의어라고 우긴다면 또 이야기가 되기도 하겠지만, 진짜 개념이 같은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대나무에서 여자 아이가 나와서 귀엽게 길렀더니 달나라로 가버렸더라 이건 팬터지이지만, 마법 안나옵니다.
거북이가 육지로 와서 토끼를 꼬드겨 바다 속 용궁으로 가는 이야기 역시 팬터지이지만, 마법 따위 없습니다.
굳이 이야기한다면... 아서리안 팬터지, 톨킨이 정립한 팬터지를 따르는 중세 배경의 팬터지 작품 외에는,
마법이 전혀 언급되지 않지만 강한 환상성을 가진 팬터지가 오히려 더 뿌리가 깊고 많이 나와 있습니다.
팥소 없는 붕어빵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팥소 대신에 커스터드 크림을 넣을 수도 있고, 피자 재료를 넣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재질 자체를 커스터드 케이크처럼 만들어서 빵만으로 맛있는 붕어빵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붕어빵이라는 것은 붕어 모양의 빵이라는 뜻이지, 팥이 들어간 빵이라는 뜻이 아니니까요. 물론 팥소를 연구해서 붕어빵을 만들 수도 있겠지요.
판타지도 '신비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마법이 들어간 이야기'는 아닙니다.
마법 대신에 다른 것을 넣거나, 아예 마법을 넣지 않고도 판타지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강철의 연금술사의 '연금술'은 마법이 아니라 그 세계 과학의 일종입니다.
그레고리 키스의 소설 "철학자의 돌"에서도 뉴튼이 연금술을 연구하여 그것을 실현할 수 있게 됩니다.
동양의 여러가지 기담이나 전기 이야기에서는 마법 대신에 술법이 나옵니다. (술법도 꼭 나온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 마법이 나온다고 해도 반드시 '주문을 외우는 마법'이 등장한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가령 부적을 사용하거나, 제물을 사용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팔 동작을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고....
마법이 아예 등장하지 않는 판타지도 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를 배경으로 용이 등장하는 소설 '테메레르'는 -개인적으로는 SF의 대체역사로 보지만- 판타지로 분류하곤 합니다. 여기에서도 용은 등장하지만, 마법은 없습니다.
최근에 보았던 작품 중에는 "브라더밴드"라는 소설이 기억나는군요. 바이킹을 소재로 한 판타지물인데 여기에서도 마법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아마 같은 작가의 작품 "레인저스"에서도 마법은 등장하지 않을 겁니다.)
판타지라고 해서 '중세 판타지' 같은 것만이 있는게 아닙니다. 가령 '동화'나 '초자연적 픽션'을 살펴보죠.
가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떤가요? 분명히 신비한 일은 벌어지지만, 그것이 '마법'이라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엑소시스트"나 "오멘" 같은 작품에서 신비한 일이 일어나지만, 그것이 마법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신의 권능을 빌려서 악령에 맞서긴 하지만, 그것을 '신성 마법'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극단적으로 '마법적 사실주의' 작품에서는 아예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설명조차 없는 일이 많습니다.
마법이라는 것은 판타지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도구 중 하나입니다. 매우 유용한 도구고 다양하게 쓰일 수 있지만, 마법이 없다고 해서 판타지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반지의 제왕"만 해도 마법이 이야기상 여러가지 역할을 하지만, 그보다는 '칼'의 힘이 더 중요한 느낌을 줍니다.
물론 판타지 중에는 마법의 설정 그 자체로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슬레이어즈!"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
마법이라는 것은 붕어빵의 팥소일 수도 있지만, 팥소가 들어가야만 붕어빵이 되는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