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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미 앳 더 게이츠란 아마 이렇게 코 앞의 조우 상황을 뜻하겠죠.]
전술 롤플레잉에서는 대개 아군과 적군이 멀리 떨어져 총격전을 벌입니다. 총기가 존재하니 구태여 가까이 접근했다가는 위험하고, 그래서 저만치 엄폐한 적에게 탄약과 폭발물만 날리죠. 실제 전장에서 병사들이 몇 백 미터씩 거리를 벌려서 싸우는 것처럼요. 하지만 가끔은 상대방의 숨결을 느낄 정도로 가까이 다가가야 할 때가 생깁니다. 바로 실내전 때문이죠.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합니다. 건물에 숨은 적을 잡으려면 문을 박차고 진입해야 합니다. 대규모 화력이나 공중 지원으로 건물 자체를 날릴 수는 없습니다. 건물 안에 연구 물품이 존재하거나, 인질이 붙들렸거나, 피해 규모가 너무 크다는 이유 때문이죠. 적군 몇 명 잡기 위해서 건물 하나를 통째로 날리는 건 너무 무식한 방법이잖아요. 그래서 아군 대원들은 출입문에 옹기종기 모여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문을 엽니다. 그 문 너머에는 과연 뭐가 있을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마법의 문처럼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실내전의 위험은 장애물이 너무 많다는 겁니다. 평야와 달리 건물 안에는 온갖 방해 요소가 널렸습니다. 책상, 옷장, 침대, 식탁, 의자 등등 다양한 가구는 기본입니다. 비좁은 계단 위는 아랫층에서 보이지 않습니다. 창문 밑에 누군가 웅크렸을 수 있고, 복도 뒤에서 적군이 대기하는 중일 수 있죠. 심지어 얇은 벽감 때문에 표적을 못 보고 지나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제일 골치 아픈 건 문입니다. 적군도 아군 대원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리라는 사실을 잘 알거든요. 그래서 문에 별별 폭파 장치나 함정을 깔아놓고 기다리겠죠. 설사 함정이 없어도 문이 열리자마자 총알 세례로 성대하게 환영해줄 수 있고요. 그래서 문을 따기 위한 방법도 다양합니다. 폭발물로 부수거나, 스네이크 캠으로 감시하거나, 그냥 발로 차고 돌격하거나. 아니면 문이 너무 위험하니까 창문이나 기타 다른 장소로 진입하는 방법도 생각할 수 있죠. 아무리 평범한 가정집도 실내전을 치르는 인원들에게는 죽음의 미로처럼 보일 겁니다.
실내전의 또 다른 문제는 거리가 가깝다는 겁니다. 거리가 멀면 조준이 빗나갈 확률이 높습니다. 적군을 못 맞출 가능성이 높지만, 반대로 아군이 목숨을 건질 가능성도 높아지죠. 어차피 상대는 멀리 있으니, 어떻게 대처할지 계획을 가다듬을 수 있고요. 실내전에서는 이게 불가능합니다. 거리는 멀어봤자 20~30m 안밖일 겁니다. 가깝다면 몇 m 이내일 거고, 상대의 눈빛을 코 앞에서 볼 수 있겠죠. 거리가 가까우니 총에 맞을 확률이 높아지고, 먼저 쏘는 쪽이 승자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장애물이 많아서 선제권을 잡기가 쉽지 않아요. 무의식적으로 지나친 가구 뒤에서 적군이 튀어나와 탄약을 퍼부을 수 있습니다. 혹은 무심결에 복도를 돌았는데 상대의 총구가 눈 앞에 보이면, 세상이 다 깜깜해집니다. 실내전의 분위기는 야전과 전혀 다릅니다. 한순간 방심하면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는 긴장이 지배합니다. 어쩌면 검마 판타지에서 모험가들이 비좁은 던전을 탐사하는 게 이런 기분일 수 있겠네요.
[실내전은 대개 한순간의 결정이 모든 것을 좌우할만큼 긴박합니다.]
아예 그런 분위기를 컨셉으로 만든 게임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름부터가 문을 박차고 들어간다는 <도어 키커즈>가 그렇습니다. 경찰 특공대의 실내 전술을 롤플레잉으로 구현했습니다. 실시간 정지 방식인데, 초 단위로 아군과 적의 대치가 숨 가쁘게 넘어갑니다. 좁은 실내가 무대라서 1초라도 허술하게 흘릴 수 없습니다. 소총으로 무장한 적이 승용차 너머에서, 문 뒤편에서, 복도 모퉁이에서 대기하는데, 어떻게 무심하게 지나치겠어요. 교전 거리는 아무리 멀어도 몇 m가 넘어가지 않고, 매 초가 넘어갈 때마다 바짝바짝 애가 탑니다. 게다가 적들의 위치는 고정이 아니라 무작위입니다. 매번 진입할 때마다 달라지니, 적이 어디에 존재하는지 미리 숙지할 수 없죠. 총구를 0.5초 늦게 돌렸기 때문에, 방아쇠를 1초 늦게 당겼기 때문에 임무가 실패하거나, 인질이 죽거나, 대원이 쓰러지는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시스템 자체는 간단하고, 규모도 킥스타터에 불과하지만, 실내전의 묘미를 기가 막히게 구현했습니다.
실내전의 아찔함은 최신 유행도, 테크노 스릴러만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SF 전술 롤플레잉에서는 예전부터 실내전이 악명을 떨쳤습니다. 여러 번 예시를 들었던 <테러 프롬 더 딥>이 악랄한 사례입니다. 외계인들이 선박을 기습하면, 이를 처리하기 위해 엑스컴이 출동합니다. 문제는 이 선박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점이고, 선실부터 화물칸까지 수색한다는 겁니다. 전투 자체도 어렵지만, 그 수많은 선실을 일일이 싸돌아다니는 행위도 짜증을 유발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외계인 몇 놈을 찾자고, 타이타닉만한 배를 돌아다니는 게 재미있을지. 물론 타이타닉은 과장이지만, 선박 수색을 지속하면 정말 그런 생각까지 듭니다. 물론 <테러 프롬 더 딥>은 실내전보다 야전의 비중이 큽니다만, 선박 수색도 무시할 수 없으리만치 비중이 크죠. 이게 얼마나 원성이 많았는지, 나중에는 선박 구조를 포기하는 옵션까지 생겼습니다. 비단 납치 선박만 아니라 외계인 기지도 꽤나 방대해서 수색하기가 버거워요.
특히나 <엑스컴> 시리즈는 턴 방식 전투라서 실내전의 악몽이 배가 됩니다. 일단 선실에 진입하면, 구석구석까지 철저하게 수색해야 안전합니다. 괜히 귀찮다고 그냥 차례를 넘기면, 문 뒤에 숨어있던 해저인이 슬쩍 나타나서 비명횡사를 시켜줄 겁니다. 야전이라면 거리가 머니까 사격이 빗나갈 수 있지만, 실내전은 몇 걸음 앞이니까 일말의 희망을 기대하기 어려워요. 그나마 <엑스컴> 시리즈는 사격이 빗나가기로 유명한 게임이고, 실제로 코 앞에서 빚맞추는 경우도 자주 생기니까 다행입니다. 그럼에도 문을 열 때마다 누가 숨었을지, 아니면 비었을지, 혹시 진입하자마자 총알이 날아오는 게 아닌지 항상 생각하죠. 그러다 보면 결국 플레이어마저 지치고, 드넓은 평지에서 싸우는 야전이 그리워집니다. 이런 곤욕은 비단 <테러 프롬 더 딥>만 해당하는 게 아닙니다. 어떤 전술 롤플레잉이든 문 너머의 적은 똥줄이 타는 요소입니다. 문을 열자니 위험하고, 그렇다고 안 열자니 찜찜하고. 환장할 노릇이죠.
[비좁은 실내에서 근접 인해전술을 펼치면, 그것도 꽤나 까다롭습니다.]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은 꽤나 특이한 실내전을 선보입니다. 우주 해병대가 우주선 속에서 외계 괴물 떼거리와 싸우는 내용입니다. 우주선은 굉장히 비좁고 컴컴하며, 괴물들은 인해전술로 몰려옵니다. 그러니 해병대는 이동 순서와 사격 각도를 신중히 계산해서 진행해야 합니다. 괴물들은 총을 쏘지 않지만, 해병의 눈이 닿지 않는 환기구나 어두운 구석으로 접근합니다. 그것도 한두 놈이 아니라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듭니다. 즉, 이 게임은 일반적인 총격전을 구현하지 않습니다. 대신 해병은 총기를 겨누며 조심스레 전진하고, 괴물들은 어둠 속에서 기다리다가 와락 덮치는 형국이죠. 그럼에도 실내전의 두근거림은 여느 전술 롤플레잉에 뒤쳐지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이 게임만의 독특한 느낌을 자아냅니다. 문을 열자마자 적대적 생명체를 나타내는 붉은 신호들이 번쩍일 때, 모퉁이에 괴물의 흔적이 엿보이지만 행동 점수가 바닥 났을 때,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사격하기도 전에 괴물이 덮칠 때…. 실내전의 묘미는 빛을 발합니다.
이 밖에도 각 게임의 실내전을 설명하면,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여기서는 개인적으로 제일 독특하다고 생각한 게임만 소개했을 뿐입니다. 1초조차 아까울 정도로 긴박한 <도어 키커즈>, 짜증이 나도록 악랄하고 방대한 <테러 프롬 더 딥>, 폐쇄공포증을 느낄 만큼 숨 막히는 <스페이스 헐크: 어센션>까지. 여기서 설명하지 않은 여타 전술 게임들의 실내전도 어렵기는 마찬자일 겁니다. 야전이 존재한다고 해도 실내전에 돌입하면 분위기가 반전될 겁니다. 저 멀리 떨어진 적과 싸우다가 코 앞에서 적을 맞닥뜨리는 상황이 닥치면 소름이 곤두서겠죠. 개인적으로는 그런 소름이야말로 전술 롤플레잉의 진짜 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제대로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떨어진 적을 장거리 사격으로 명중시켰을 때의 쾌감도 좋지만…. 몇 미터 차이로 성공과 실패가 오가는 실내전의 아슬아슬함은 따라잡기 어려울 테죠. 야전이든 실내전이든, 이것도 결국 취향 문제일 따름이지만요.
캐릭터가 구별되고, 경험치와 능력치 상승이 존재하니까 롤플레잉이 맞다고 봅니다. 적어도 롤플레잉 요소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분명하죠. (<히어로즈 오브 마이트 앤 매직>이나 <에이지 오브 원더스>가 그런 것처럼요.) 경험치 노가다를 하는 유저가 존재할 정도입니다. 노가다를 빼더라도 애써 육성한 대원이 쓰러지면 아깝죠. 일반적인 서사 롤플레잉과 다를 뿐, 전술 롤플레잉의 속성은 그대로 갖추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해당 게임이 가벼운 건 저도 좀 아쉽습니다만. 좀 더 풍부하게 만들었으면 좋았겠지만, <패스터 댄 라이트>처럼 킥스타터 규모니까요. 어쩌면 실력과 자본을 쌓아서 나중에 더 좋은 게임이 나올 수도 있을 거에요. 그거길 바라야죠.
도어킥커스는 RPG라기는 좀 애매한 물건입니다. 재미는 있는데...뭐랄까, 플래쉬 게임이랄까 그런 느낌이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