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모 학교 게임 스토리텔링 학과를 맡고 있으며, 이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학생들이 '스토리텔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자기가 좋아하는 내용의 소설을 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또는 '스토리 보드 만들기')
그나마 프로로서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소설을 쓰는지를 가르쳐 주었으면 하는 느낌인데, 이야기 만들기와 달리 소설 쓰기는 자신이 직접 경험을 하고 노력하는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게임 스토리텔링 학과에서 2개의 수업을 진행하면서 보드 게임도 만들고 TRPG도 플레이하고, 게임북도 제작하게 하고... 이야기 만들기를 가르치고, 퀘스트 플로우를 제작하게 하는 등 여러가지 작업을 했지만, 정작 "스토리텔링은 왜 안 가르쳐주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는 당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플롯이나 구조 등을 통해서, 또는 명제를 이용해서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을 다양하게 가르쳐 주고, 세계관과 설정 문서를 작성하고, 이를 기획서로 옮기는 방법이나 실제로 적용하기 위해서 엑셀을 이용해 다이어그램을 작성하고 플래그 등을 구성하는 방법 등에 대해서 가르쳐 주었지만, 학생들에게는 이들이 "게임 스토리텔링"이라는 인식이 약한 것이지요.
게임시나리오와 관련하여 `퀘스트DB`,`스크립트`,`플래그`,`레벨디자인`,`플로우다이어그램` 등을 얘기하면, 게임스토리에 그런게 필요하냐고 묻는 학생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학생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현역에서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특히 "게임 시나리오 작가"라고 활동하시는 분들 상당 수가 소설 쓰기(그것도 아마추어적인 '동호인 소설 쓰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게임 시나리오 작가의 프로라면, 주어진 시스템이나 상황, 주제나 설정에 맞추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재주가 기본적으로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게임 시나리오는 단순히 스토리가 아니라, 게임의 진행과 구성에 대한 흐름(플로우)과 설정을 정의하는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게임 플레이를 하면서 느낄 수 없다면, 그건 게임 시나리오가 아닙니다. 이따금 "메탈기어 솔리드" 같은 작품을 예로 들어서 대사나 장면의 중요성을 얘기하는 분들이 계시지만, "메탈기어 솔리드"는 잠입 액션이라는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서 비로써 그 장면과 대사가 부각되는 것이라는 점을 잊고 있는 것이지요.
[ 타임즈에서 선정한 20세기 최고의 시나리오 작품인 메탈기어 솔리드. 비주얼 신도 중요하지만, 플레이를 통해 느낌을 전달하는 것에서의 완성도가 중요했다. ]
이 같은 연출과 상황을 생각하려면 공간 레벨디자인이나 밸런스 디자인까지도 고려해야 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게임 시나리오는 게임 기획의 한 부분이며, 당연히 게임 플레이를 생각하고 만들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게임 플레이어가 '플레이'를 통해서 느끼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게임시나리오를 소설이나 영화대본처럼 생각하고 게임시스템과 플레이에 대한 이해없이 누구나 만들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 게임을 모르는 시나리오 라이터가 양산되었고 게임 제작엔 별 도움이 안되는 시나리오(?) 문서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문서가 나왔는데 제작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면 그걸 작업할 필요가 있을까요?
특히 한국에서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무시되는 것은, 그 같은 상황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게임 시장의 특성도 있겠지만, 게임 디자인이라는 것을 아예 모르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자기가 쓰고 싶은 내용'만 쓰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지망생)가 넘쳐났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개발 환경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스토리가 좋은 게임이라는 것은 플레이도 재미있는 게임입니다. 플레이만 하더라도, 지문을 모두 읽지 않더라도 그 분위기와 상황을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게임이어야 합니다.
지문으로 정보를 제공하려면 플레이어가 스스로 찾아나서고 그렇게 정보를 얻는 '플레이 과정'이 즐겁고 좋은 게임이어야 합니다.
"플레이어는 NPC에게 -어지간하면- 말을 걸지 않는다"라는 정도는 이해하고 있어야, NPC를 통해서 정보를 전하는 '플레이'를 구성할 수 있으며, 주변 상황만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이해하도록 만들 수 있어야 스토리를 '체감'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NPC의 설정을 충실하게 엮어내고, 이들의 '행동 패턴'만 정리하여 시스템에 맞추어 만들어두기만 해도 플레이어가 NPC에 대해서 궁금하게 만들고 직접 NPC를 찾아가게 할 수 있습니다. 트리거, 플래그, 이벤트 시스템 등을 이해하고 이를 시스템으로 구현하는 기획서를 만들 수 있다면 말이죠.
대사가 거의 없이 표정 연기 하나, 소품 하나만으로 상황을 전하고, 거대한 배경 세계를 느끼게 해 주는 영화 '매드맥스'처럼, 지문을 일일이 읽지 않고도 느낄 수 있는 게임 세계를 구성하고, 흐름을 만들고, 연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 핸들 하나만으로도 세계의 특성과 재미를 충실하게 엮어낸 매드맥스 시리즈. 좋은 영화일수록 대사가 적다는 것을 잘 인식시켜준다. ]
훌륭한 영화에 많은 대사가 필요하지 않듯이, 훌륭한 게임도 대사가 많은 것이 아니라, 필요한 대사만 있어야 합니다.
영화를 좋아하던 조던 매크너가 "카라테카"에서 도입한 비주얼 연출은 게임 스토리텔링의 폭을 넓혀주었지만, 조던 매크너 자신도 비주얼이 게임 플레이를 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최소한의 분량만 효율적으로 응용했듯이 무엇보다도 게임 플레이에 초점을 맞추어 시나리오를 작성해야 합니다.
[ 카라테카에서 들어간 연출 장면. 짧지만 플레이의 재미를 더해준다. ]
제작하시는 분들 모두가 이러한 점을 공유하여, 개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시나리오 문서만 쌓이고, "게임 시나리오는 의미가 없어."라는 인식이 더는 늘어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게임 디자이너의 일종이며, 무엇보다도 게임의 시스템과 특성, 그리고 플레이에 대해서 잘 이해해야 합니다.
주어진 상황과 플레이에 맞추어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고 정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게임 시나리오 작가가 만든 문서는 -혼자 볼게 아니라면- 다른 팀원들이 공유하며 개발에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소설을 쓰고 싶다면, 게임이 완성된 뒤에 만들면 됩니다. 설사 처음부터 그런 걸 생각해 두었다고 해도 개발 중에는 '시나리오 기획서'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래픽 디자이너가 참고할 수 있고, 시스템 디자이너나 레벨 디자이너가 보고 활용할 수 있는 설정 문서, 레벨 디자이너가 구성에 활용할 수 있는 플로우 문서와 다이어그램, 그리고 비주얼 제작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대본과 연출 문서, 시스템 디자이너와 프로그래머가 확인할 수 있는 순서도와 구성 문서...
당연히 시나리오 작가는 엑셀과 친숙해야 하고, 파워포인트로 기획서를 구성할 수 있어야 하며, 스크립트를 연출할 수 있고, 순서도를 만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필요하다면 단번에 몇 개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구성하고, 시스템에 맞추어 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사 내가 판타지 영웅 이야기를 좋아해도, 때로는 포스트아포칼립스의 반영웅적인 이야기를 쓸 수도 있어야 하며, 설정을 구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만들지 못하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로서 자격이 없으며,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게임 시나리오 작가를 고용하여 쓸 수가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는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과거에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의 이러한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게임 스토리텔링은 무시되어 왔습니다.
소설 스토리텔링이 소설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주제를 전달하고 즐거움을 주며, 비주얼 스토리텔링이 영상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주제를 전하고 즐거움을 주듯, 게임 스토리텔링은 게임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주제를 전하고 즐거움을 주어야 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이 사실을 조금이라도 많은 분이 인식하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게임 스토리텔링'이 정착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소설 작가나 영화 각본가 지망생이 아닌, 진정한 의미에서의 게임 스토리텔링 작가가 많이 늘어나고 좋은 '게임 스토리텔링' 작품들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소설과 게임은 엄연히 다른 매체죠. 게임 시나리오를 소설 서사로 생각하는 건 심각한 오해 같군요. 소설가 중에서도 게임 시나리오를 쓰는 경우가 있지만, 그 두 가지를 혼동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요.
서사 롤플레잉 쪽에서 유명한 시나리오 작가 크리스 아벨론이 그렇게 말했죠. 스토리라는 건 플레이에 녹아야 하며, 플레이 자체만으로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고요.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대략 저런 투로 말했을 겁니다. 그만큼 시나리오보다 플레이를 중시한다는 뜻이죠. 그토록 대단한 시나리오 작가조차 저렇게 말할 정도입니다. 물론 크리스 아벨론의 사고 방식이 진리는 아니지만, 저만큼 인기 높은 작가가 플레이를 중시한다면 귀 담아 들을 필요가 있겠죠. 게다가 아벨론은 단순한 작가를 넘어서 게임 플레이적인 면으로 여러 시스템을 실험해 보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도 특정한 플롯 없이 플레이만으로 스토리를 전달하는 게임이 좋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토록 방대함을 자랑하는 <엑스컴>, <문명>, <심시티>, <대항해시대 3> 등도 딱히 특별한 이야기는 없죠. 아예 주인공 자체를 정해놓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구방위대의 사령관, 국가 통치자, 어느 시장, 유럽 탐험가의 디폴트일 뿐이죠. 그럼에도 어지간한 서사물 못지 않은 느낌을 풍깁니다. 그만큼 게임 플레이가 여러 가지를 함축했다는 뜻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