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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 기지에 침투하는 엑스컴. 이런 면은 던전탐사물과 비슷합니다.]


롤플레잉 게임은 탐험 게임으로 불릴 만큼, 싸돌아다니는 행동을 중시합니다. 판타지든, 사이언스 픽션이든 나름대로 주인공에게 모험할 동기를 제공합니다. 모험가 파티는 깊고 어두운 던전 속으로 들어가고, 우주 해병대는 수상한 우주선에 진입해서 탐사하죠. 주인공은 미지의 장소를 돌아다니며, 이런 행위가 플레이 시간을 상당 부분 잡아먹습니다. 그렇다고 롤플레잉 게임의 필수 요소가 탐험이라는 건 아닙니다. 차라리 어드벤처 게임이 탐험 게임이라고 해야 옳겠죠. 이름 그대로 어딘가를 돌아다니지 않으면, 어드벤처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롤플레잉 게임의 필수 요소는 캐릭터 확립과 성장 가능성이며, 이를 만족한다면 굳이 탐험 요소를 충족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대개 롤플레잉 게임은 신비하고 환상적인 무대와 모험의 낭만을 강조합니다. 고전부터 최신 출시작까지, 때리고 부수는 핵 앤 슬래쉬부터 방대하고 비선형적인 오픈월드까지, 전형적인 검마 판타지부터 우주를 누비는 스페이스 오페라까지 그렇습니다.


최초의 롤플레잉 게임 <던전스 앤 드래곤스>는 모험을 추구했습니다. 전사, 성직자, 도적, 마법사에게 화끈한 전투와 잠재적인 성장과 탐스러운 보물을 약속했죠. 그걸 얻기 위해서는 던전을 탐험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인지 대부분의 롤플레잉 게임에서는 탐험을 빼놓지 않습니다. 탐험에 따르는 보급품, 야영, 지도 작성 등의 재미 또한 긴요합니다. 횟불도 없이 길을 잃어버리고, 식량이 바닥 나 쫄쫄 굶고, 그러다 괴물들을 만나서 한바탕 쫓기다 웬 비밀 통로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탐험은 단순히 전투만 반복하는 것보다 훨씬 다채로운 경험을 부여합니다. 게임을 더욱 풍부하고 입체적으로 돋보이게 합니다. 비디오 롤플레잉도 마찬가지입니다. 게임 제작진은 어떤 식으로 탐험의 로망을 부여할지 골몰했고, 여러 게임들이 기묘하고 복잡한 던전을 마련했습니다. 이게 극단적으로 발달하면, 던전만 죽어라 뺑뺑이도는 던전탐사물로 치닫습니다. 아니, 애초에 로그 라이크가 비디오 롤플레잉 게임의 시초였으니, 오히려 이쪽이 먼저겠네요.


그런데 스토리텔링 롤플레잉과 달리 전술 롤플레잉에서는 이런 재미가 다소 사라집니다. 전술 롤플레잉은 적군과의 교전이 주된 내용을 차지합니다. 스토리텔링 롤플레잉은 이야기 흐름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탐험하지만, 전술 롤플레잉은 단속적인 전장이 배경이죠. 간단히 말해서 <엑스컴>의 전장을 생각하면 됩니다. 오로지 적군만 가득하고, 그 외의 요소는 거의 없으며, 한 전장이 다른 전장에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일단 그 전장을 떠나면, 대부분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어차피 적군만 득실거리니까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라면 다시 가봤자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탐험한다는 것도 좀 웃길 겁니다. 대신 전술 롤플레잉에는 광범위한 수색 혹은 정찰이 존재합니다. 비록 찾는 대상은 발견물이 아니라 적군이고, 지형은 일시적이거나 소모적이고, 한가로이 경치 구경할 여유조차 없습니다만. 뭔가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돌아다니는 점은 던전탐사물과 비슷합니다. 일반 롤플레잉 게임의 모험가들이 헐떡거리며 던전을 탐험하듯 전술 롤플레잉 게임의 병사들도 조심스럽게 전장을 탐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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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 롤플레잉에는 탐험이 없지만, 긴장감 넘치는 수색이 존재합니다.]


전술 롤플레잉이라고 해서 무조건 격렬한 전투만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서구식 전술 롤플레잉은 총알 한 방이나 폭발물 하나로 대원들이 눕는 경우도 허다하죠. 설사 한 방에 눕지 않더라도 무시할 수 없는 피해를 입기 마련이고요. 어떻게 보면, 교전 자체보다 수색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되도록이면 안 맞고 싸우는 게 낫고, 그렇다 보니 온갖 우회 기동, 기습, 유인, 저격, 범위 공격 등을 써먹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작전을 써먹으려면, 주변 지형과 적군 위치를 숙지해야 합니다. 안 된 말이지만, 시작할 때부터 대놓고 전장과 적군을 모두 보여주는 게임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최소한 적군은 안 보여주죠. 시작하자마자 한 걸음 잘못 디뎠다고 사방에서 총알이 날아오는 거 보면 좀 황당하기도…. 그나마 지형과 적군 위치를 외우면 좋겠지만, 전술 롤플레잉은 무작위 생성이 흔합니다. 전장마다 매번 지형과 적군 위치, 병과 구성이 달라진다는 뜻입니다. <폴아웃 택틱스>마냥 고정적인 사례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플레이어는 대원들 움직임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원들은 전장 구석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녀야 합니다. 행여 전장이 넓고 적군이 어디 도망가서 숨바꼭질이라도 펼치면 눈에 불을 켜야 합니다. <테러 프롬 더 딥>이 수색 때문에 플레이어 성화를 돋운 좋은 예시일 겁니다. 그 커다란 해저 기지를 지칠 때까지 돌아다니는 모습이란…. 반면, 리메이크 <에너미 언노운>은 수색하는 긴장감이 확 줄어들어 비판을 받았죠. 교전 자체는 충분히 재미있지만, 우주선 문턱에서 내부를 슬금슬금 살피는 쫄깃함이 희미해졌습니다. 어차피 기습은 거의 쓸모가 없고, 대부분 전면전으로 이어지니까요. 아예 엑스컴 대원들이 알아서 외계인의 흔적을 찾아 다닙니다. 그래서 리메이크에 만족 못하는 유저는 <제노너츠> 같은 정신적 후계작을 찾습니다. 전술 롤플레잉의 수색 과정은 낯선 곳을 헤매며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탐험의 로망과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미지의 장소에서 미지의 대상과 조우한다는 경험 자체는 비슷하죠. 스토리텔링 롤플레잉에 탐험이 있다면, 전술 롤플레잉에는 수색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탐험과 수색은 플레이 비중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합니다.


전술 롤플레잉의 전장은 사실상 생산적인 거점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장비 생산, 캐릭터 회복, 물품 구입 및 판매 등을 처리하는 거점이 따로 있어요. 대개는 주인공 세력의 기지나 마을이 이를 담당합니다. 그래서 기지와 전장을 반복해서 오가며 플레이하죠. 일단 전장으로 떠나면 보급이 거의 불가능한 고립 상태입니다. 정 불리하면 퇴각할 수 있지만, 벌칙이 존재하며 다시 도전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전장으로 떠나기 전에 무기, 장비, 소모품, 병과 조합 등을 충분히 검토해야죠. 전장은 때로 물품을 확보할 기회도 제공하는데, 적군을 처치해서 빼앗은 장비를 판매하거나 장비하거나 연구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아군은 적군이 활보하는 지역으로 계속해서 떠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적군이 아군 기지에 쳐들어오는 경우는 이벤트에 가깝고, 비교적 많지 않아요. 적군이 대기하는 위험 지역에 아군이 일방적으로 침투하는 형식이죠. 위에서 언급한 <엑스컴>에도 기지 방어 임무가 나오지만, UFO 공습만큼 많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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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게임은 사실상 전술 롤플레잉과 던전탐사물의 경계가 없습니다.]


이는 괴물들이 득실거리는 던전에 모험가 일행이 쳐들어가는 구조와 닮았습니다. 위에서 이미 말했지만, 일반 롤플레잉에 던전이 있다면, 전술 롤플레잉에 전장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탐험의 두근거림은 수색의 쫄깃함에 비교할 수 있고요. 정말 규모가 크고 깊이 있는 전술 롤플레잉이라면, 치열한 전면전만큼 수색하는 과정 역시 세심해야 할 겁니다. 서로 총알을 주고 받으며 싸우는 것만큼 수색과 탐사 역시 인상적인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경로로 진입해야 좋을지 엄폐물을 살필 때, 우연히 고개를 돌렸는데 나무 뒤에 숨은 적군을 찾았을 때, 방향을 가늠하지 못할 곳에서 갑자기 포탄이 날아왔을 때….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와중에 쌓인 긴장감이 전투의 화끈함으로 승화합니다. 하지만 전술 롤플레잉은 겉모습 때문인지 전투만 중요하다는 오해를 사기 쉽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발더스 게이트>가 전투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재미있을까요. 비밀 통로를 찾거나, 숨겨진 보물 상자를 따거나, 함정을 해제하는 재미가 빠진다면, 전투가 아무리 많아도 맥이 빠질 겁니다. 전술 롤플레잉도 마찬가지에요.


똑같은 수색이라도 어떤 설정을 배경으로 삼느냐에 따라 느낌도 크게 달라지겠죠. 테크노 스릴러는 일반적인 마을과 도시가 무대이고, 적들도 대개 아군과 같은 인간입니다. 전장 디자인이 딱히 특별할 게 없죠. 평범한 마을과 야외 환경이니까요. 이에 비해 사이언스 픽션은 특성상 우주선이나 외계 유적, 기이한 폐허, 어두운 동굴 등을 돌아다닙니다. 등장하는 적들도 정체 모를 외계인과 괴물, 로봇일 경우가 많고요. 당연히 미지의 장소에서 미지의 적을 찾는다는 긴장감은 사이언스 픽션이 우위입니다. 그렇다고 테크노 스릴러가 느긋하고 친숙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컴컴한 마을 저편 건물에서 난데없이 총알이 날아오면, 그걸 외계인이 쐈든 인간이 쐈든 섬뜩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일런트 스톰> 같은 게임도 외계 괴물 나오는 게임 못지 않게 스릴이 넘치잖아요. 방문을 열자마자 대기하던 주축군의 기관단총이 반갑게 맞아주는 그 기분이란…. 다만, 아무래도 익숙한 환경보다 초자연적인 환경이 등골을 오싹하게 자극하기 좋겠죠. 외계 우주선을 탐험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던전 탐사물이랑 비슷하고요.


그래서인지 괜찮은 전술 롤플레잉을 뒤적이면, 수색 과정을 어떻게 구성했는지 눈길이 갑니다. 대원들이 적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이동하는지도 중요한 부분이죠. 특히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게임은 더욱 그렇고…. 다만, 전술 롤플레잉이라는 게 그리 많지 않은지라 선택 여지가 떨어지는 편이죠. 이 점은 좀 아쉽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