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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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서구 문화는 세 부류로 나누곤 합니다. 북미, 유럽, 러시아입니다. 이 중에서 러시아는 어쩐지 성향과 위치 때문에 동떨어진 듯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주로 북미와 유럽을 이야기하죠. 유럽이라고 다 똑같은 성격이 아니며, 포르투갈부터 그리스까지 전혀 다르죠. 허나 워낙 여러 나라가 복잡하게 뒤섞이는 바람에 외부 사람들은 그냥 유럽 문화라고 퉁칩니다. 북미도 마찬가지인데, 미국 시장이 워낙 크고 영향력도 압도적이라서 캐나다가 묻히죠. 덕분에 서구 문화는 미국과 유럽으로 양분되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양쪽으로 갈라지면, 흑백 논리처럼 대조적인 속성을 비교하기 마련입니다. 미국과 유럽도 그러한데, 유럽은 고상하고, 야릇하고, 예술적이라는 평가가 많죠. 미국 문화는 규모가 크지만, 어딘지 진부하다는 식이고요. 웃기는 비유지만, 기네스, 바이엔슈테판, 필스너 우르켈 같은 유럽 맥주는 깊은 맛을 자랑하고, 버드와이저, 코로나, 밀러 등 미국 맥주는 밋밋하다는 거랑 비슷하다고 할까요.
SF 장르 역시 이런 기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유럽 SF는 뭔가 심오한데, 미국 SF는 스케일만 클 뿐 전형적인 틀에서 안주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평가가 아예 틀린 건 아닐 겁니다. 미국은 워낙 커다란 나라이고, 그만큼 문화 시장도 융성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유형을 양산하기 시작하면, 밑도 끝도 없이 퍼집니다. 그런 양산형들은 죄다 비슷하고 상투적이고 고리타분하게 보이겠죠. 한때 유행했던 미국식 스페이스 오페라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건 시장이 크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지, 미국 SF 문화가 무조건 천박하거나 흔해 빠진 건 아닐 겁니다. 미국 SF 작품 중에서도 유럽의 흔한 이미지만큼 야릇하고 예술적이고 고상한 작품들이 존재하겠죠. 워낙 양산형이 많아서 잘 안 보이는 것일 뿐. 창작물 시장에서 미국만큼 자주 접하는 유럽 문화가 아마 영국일 텐데, 영국 SF라고 해서 뭔가 거창한 건 없는 듯합니다. 특유의 독특한 맛은 있지만, 미국보다 우위에 있다고 하기는 거시기할 듯합니다.
영국 SF 역사에 관해서 논하면 좋겠지만, 솔직히 그럴만한 능력은 없고, 아는 작가도 많지 않네요. 대신 널리 알려진 전형적인 작가들만 몇몇 작가만 살펴보면, 우선 메리 셀리가 있습니다. 이 여인 덕분에 SF 소설의 발상지는 사실상 영국이라고 할 수 있죠. 최초 타이틀이 꽤 많이 달렸는데, 최초의 SF, 바이오펑크, 포스트 아포칼립스, SF 여성 작가 등으로 불립니다. 단순히 최초가 아니라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불세출의 걸작을 남겨서 절대로 영국 문학사에서 이름이 내려갈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은 대중에게 괴담 정도로 알려졌지만, 읽어 보면 괴담보다는 피조물의 온갖 고뇌를 다루었다고 하는 편이 맞습니다. 메리 셸리가 확립한 영국 SF는 이후로 19세기의 아서 코난 도일, 허버트 조지 웰즈 같은 사람으로 이어지죠. 특히, 허버트 웰즈는 현존하는 수많은 SF 소재를 일찍이 마련하여 후배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외계인 침공부터 괴물의 습격이나 시간 여행을 거쳐 약물로 강화된 초인까지 다양하죠.
허버트 웰즈는 20세기 초까지 살았고, 그래서 19세기와 20세기를 연결하는 작가이기도 합니다. 이 시기는 영국이 기술 발달로 한창 해외에서 위세를 떨치던 시기입니다. 그러니까 식민지 세우고 열심히 등골 빨아먹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영국은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등 해외에 관심이 많았고, 별별 장르 소설이 흥했던 때입니다. SF만 아니라 온갖 모험, 환상, 공포, 범죄물이 쏟아졌죠. 메리 셸리를 차치하더라도 어차피 SF 부흥은 영국에서 시작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정 기이한 SF 소설을 쓴 사람이라고 하면, 20세기 초반의 올라프 스태플던을 꼽을 만합니다. <이상한 존>, <스타메이커>, <시리우스> 등으로 유명하죠. 웰즈도 어느 정도 사상가적인 면모가 있었지만, 스태플던은 아예 철학자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사상을 한계까지 연구하고, 그걸 바탕으로 소설을 썼죠. 그런지라 스태플던 소설은 흔한 유럽 이미지답게 야릇하고 고상하고 기이합니다. 전형적인 플롯이 없고, 그 자리를 온갖 사변과 철학 논쟁으로 채웠죠.
<이상한 존>은 이름 그대로 좀 이상한 내용입니다. 뭐, 농담이지만, 표지 그림도 좀 괴악한 게 많습니다…. <시리우스>는 진지하면서 한편으로 야릇한 책이고요. <스타메이커>는 그야말로 눈 돌아가게 형이상학적이고 정신 없는 소설입니다. 딱히 정해진 줄거리가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사건 전개가 압도적입니다. 그리고 20세기 초반, 그러니까 1930년대를 지날 즈음에 올더스 헉슬리와 조지 오웰이 등장합니다. 둘 다 디스토피아 소설로 유명한데, <멋진 신세계>와 <1984>를 썼습니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디스토피아 소설이, 그것도 1930~40년대 영국 작가들이 썼다는 점이 재미있습니다. 러시아의 준동과 사회주의, 1차 세계 대전의 영향력 때문일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소설들이 유럽이 아니라 과연 미국에서 나올 수 있는지 생각하면, 좀 아리송합니다. 미국 역시 다른 사상 때문에 난리법석이었고, 한때 매카시즘 때문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습니다. 미국의 디스토피아는 매카시의 빨갱이 논쟁 때문에 크나큰 영향을 받았다고 할 정도.
허나 외부 침공이나 전쟁을 겪어보지 않은 미국은 침공과 체제에서 신음했던 유럽과 아무래도 다르겠죠. 특히, 러시아 같은 경우는 워낙 검열이나 압박이 심해서 전부 소설들이 우울하다고 할 정도니까요. 이것도 편견이겠지만, 러시아 SF 소설은 동장군 같은 바람이 분다고 하니까요. 영국은 그나마 낫지만, 유럽 대륙과 오랜 세월 동안 지지고 볶은 덕분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미국 소설이 아무리 심각해도 유럽보다 못하다는 평가는 그래서 나왔을 겁니다. 똑같이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써도 유럽 소설이 미국 것보다 좀 더 이상야릇하고 암울하다는 겁니다. 암울하다고 하니까 하는 말인데, 1950년대에 존 윈덤이 <트리피드의 날>을 출간했죠. 별별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써내는 나라답게 이번에는 식물 괴수가 나옵니다. 그냥 식물 괴수만 나오는 게 아니라 여러 대재앙이 겹칩니다. 천재지변, 인공위성 병기, 식물 개조, 소련의 공작까지 합쳤습니다. 눈 먼 자들의 도시를 상상하는 대목은 가히 기이한 영국 작가답긴 합니다.
<트리피드의 날>은 소련과의 경쟁을 불안하게 지켜봅니다. 유럽과 소련이 경쟁하는 와중에 식물 괴수를 조작하고, 위성병기를 띄우고, 그러다 재난을 당했으니까요. 몇 십 년 후에 미국 작가들도 냉전 시기의 소련을 무서워해서 서로 달에 가느니 마느니 옥신각신했죠. 미국 소설이 우주 경쟁으로 소련의 공포를 표현했다면, 존 윈덤은 일찌감치 세계구급 재앙으로 표현했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나중에 미국 소설가들도 핵무기로 문명을 시밤쾅 날려 버리지만, 그건 1960년대 전후 이야기고요. 어쩌면 영국은 소련이 밀고 들어오면 해협 건너서 마주치게 되니까 더 무서웠을 수 있습니다. 미국도 소련이 무섭겠지만, 적어도 태평양이라는 어마어마한 공간 차이가 있으니까요. 이런 세계구급 재앙은 1950년대가 지나고, 2차 대전이 끝나면서 더욱 확산됩니다. 1960년대에는 드디어 제임스 발라드가 나타나 종말 소설을 연달아 씁니다. 그것도 지금까지의 SF와 달리 인간의 의식에 집착하는 식으로 묘사합니다. 흔히 내우주로 여행한다고 표현하죠.
제임스 발라드는 소위 유럽 예술에 기대하는 요소를 충족합니다. 선형적인 플롯이 없고, 세련되고 오묘한 문체를 구사하고, 함의와 사변이 풍부하고, 기이하고 병적인 상상력을 선보이며, 암울하고 괴악하게 끝나죠. 괜히 SF 계열의 노벨문학상 운운하는 게 아닐 겁니다. 발라드가 어쩌다 뉴 웨이브의 아이돌로 자리매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유럽 문학 사조를 이어받아서? 참혹한 전쟁의 피해자라서? 선배들이 이룩한 SF 업적과 다른 궤도를 돌아서? 어쩌면 그 모든 이유 때문일 수 있겠죠. 그리고 시간이 더 흐르면, 바야흐로 하드 SF 시대가 도래합니다. 그리고 큰 형님 3인방 중 하나인 아서 클라크가 나오는데…. 그렇다고 아서 클라크를 여기서 논하기는 좀 어색합니다. 분명히 빼놓을 수 없는 영국 SF 작가지만, 유럽 문학의 특이함을 보여주는 사례는 아니니까요. 차라리 더글러스 아담스와 테리 프래챗처럼 코믹 SF를 쓰는 작가가 적절한 예시겠죠. 담백하면서 정신 나간 영국식 유머라고 하던데, 여기에 적응 못하는 해외 독자도 많은가 봅니다.
이언 뱅크스는 모던 스페이스 오페라를 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댄 시몬스와 함께 우주 활극을 세련되게 승화시켰다고 평가를 받죠. 그 동안 유치하다고 따돌림을 받던 스페이스 오페라 시장에 새로운 길을 제시했습니다. 여전히 구닥다리 감성을 유지한 우주 활극이 쏟아지지만, 스페이스 오페라의 궤도가 저 시점에서 크게 변한 게 사실입니다. 이것도 영국 감성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한편으로 한때 영국의 뉴 위어드 붐을 일으켰던 차이나 미에빌도 중요하죠. 전형적인 SF보다 마법과 기계를 결합한 도심 판타지에 일가견이 있습니다. 작가 본인은 기괴한 괴물 이야기가 좋다고 말하는데, 그야말로 역겨울 정도로 해괴한 장면이 줄줄 이어집니다. 그렇다고 마냥 괴물에만 몰두하는 게 아니라 작가가 바라보는 사회적 문제점을 틈 나는대로 찔러줍니다. 사회 지도층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국제 사회주의에 회원으로도 가입했죠. 사회의 어두운 면을 풍자하고 기괴한 묘사를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그야말로 영국 작가답다고 해야 하나.
이런저런 작가를 거론했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저런 영국 작가들의 흐름에 미국 소설과 차별되는 뚜렷한 성향이나 기괴함이 존재하는지…. 미미하고 미천한 독서 경력으로 영국 SF 특징을 정의하기도 좀 그렇네요. 여기에서 언급한 작가 말고도 중요한 작가들이 많은데, 일일이 살필만한 능력도 부족하고요. 게다가 영국 문학은 유럽 문학의 일부일 뿐, 유럽을 대변한다고 할 수도 없고요. 차라리 독특하고 기이한 문학 사조라면, 체코 같은 쪽이 더 낫지 않나 싶습니다. 체코 소설은 영국 소설보다 더 아는 게 없어서 말을 못하겠지만요. 어쨌든 영국 SF 소설이 미국 소설과 다르긴 한데, 뭐라고 정확히 꼬집기 힘드네요. 비단 문학만 아니라 <닥터 후> 같은 영상물을 봐도 <스타트렉>과는 뭔가 다르잖아요. 아마 오랜 역사와 지리적 특성, 기나긴 문학 사조, 해외에서 깡팬 친 시기, 과학 발달 등등이 뒤섞여 독특한 성향을 만든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와 소설이 미국에서 나올 수 있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함부로 대답하기 힘드네요.
※ 유럽, 북미, 러시아 SF 소설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 한다면, 그냥 재미있는 걸 고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정형화된 플롯보다 뭔가 야리꾸리한 쪽을 좋아합니다만. 미국 SF 소설이라고 해서 전부 딱딱 틀에 맞춰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말씀하신 테마는 SF로 내려오기 전에...
문화/학문/문명 전반에 걸쳐 공통적으로 발생하는 특질입니다.
유럽 소설/영화는 풍요롭고 다양한 이야기를 합니다.
미국 소설/영화는 심플하고 매끄럽게 기승전결로 이야기가 틀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유럽 논문은 서두에 철학을 이야기하고, 왜 그 연구를 했는 지 배경을 폭 넓게 이야기합니다.
미국 논문은 서두에 주제어의 정의과 관련된 기존 연구만 짧게 언급하고 바로 본론으로 갑니다.
유럽에서는 심플만 강조한 것은 생각의 폭과 다양성이 부족한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Simple is Best"라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화적인 "기조"에 해당합니다.
SF가 유럽에서는 영국 쪽이 가장 번성하므로 굳이 영국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을 뿐,
실은 위 내용은 유럽 문화 전반에 깔려 있는 특징이자 미국 문화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취향이 있고 개인차가 있는데,
저는 처음 책을 읽을 때 미국소설보다는 유럽소설 쪽에 초점을 맞추어 버릇이 들어서
미국에서 나온 책보다 유럽에서 나온 작품이 훨씬 더 훌륭하다고 느끼는 편입니다.
물론 미국 작품 중에도 서사가 뛰어난 작품은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지만,
매끄러운 것보다 풍성한 느낌을 좋아하는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그러합니다
영화는 한정된 시간 동안 이야기를 딱 부러지게 전달하는 미국 영화가 이해하기는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정해진 줄거리 위주로 기승전결로 달려나가는 헐리우드 영화가 볼 때는 괜찮아도
영화가 끝나고 나면 어쩐지 허무함과 썰렁함을 준다는 불만을 거의 언제나 가슴에 품게 됩니다.
이는 미국 문화가 가진 특징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지만서도...
반대로 유럽 영화는 풍성한 맛은 있지만 헐리우드물에 비해 전개가 늘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아서,
어지간히 잘 만든 영화가 아니면 끝까지 집중해서 재미를 느끼며 보는 것이 쉽지 않죠.
개인적으로 품고 있는 새로운 불만이라면...
소설이든 영화든 요즘 한국이나 일본에서 나오는 작품을 보면
지나치게 미국화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 풍성함을 느끼기 어렵다는 것이죠.
서사를 잘 해내는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인데, 과거 한국 문학과 영화는 꽤 유럽 스타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줄거리 위주로 기승전결로 달려나가기보다 풍성한 맛이 강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죠.
하지만 요즘에는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세대가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들어서 그런 것인지...
과거 한국 문학과 영화가 가진 강점이었던 풍성함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저는 그게 취향에 좀 맞지 않는 편이고, 그래서 더 아쉽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