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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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븐>은 연쇄살인 스릴러이자 일종의 묵시록입니다. 동시에 살인범을 체포하는 형사물이죠. 형사 콤비가 나오는 작품이 으레 그렇듯 이 영화의 형사 파트너도 대조가 심합니다. 서머셋(모건 프리먼)과 밀즈(브래드 피트)는 어딜 봐도 죽이 안 맞습니다. 흑인과 백인, 정년 퇴직을 앞둔 고참과 이제 전근한 신참, 노련한 노인과 성질 급한 젊은이, 지혜로운 여유와 저돌적인 열정, 고고하고 외로운 삶과 아름다운 아내와 애완동물이 있는 시끄런 일상 등등. 그리고 이것들과 함께 둘의 차이를 보여주는 요소가 '권총'이 아닌가 합니다. 형사니까 당연히 총을 소지하는데, 두 사람의 총기는 서로 다릅니다. 서머셋은 스미스 & 웨슨 15모델을 소지합니다. 밀즈는 스프링필드 M1911이죠. 전자는 리볼버이고, 후자는 피스톨입니다. 별 거 아닌 듯하지만, 리볼버와 피스톨은 두 사람의 성향을 반영하는 소품처럼 보입니다. 리볼버는 회전 탄창에 탄약을 장전해 쓰는 구식이고, 피스톨은 클립에 탄약을 장전해 발사하는 신식이죠. 선배와 후배라고 할까요.
모든 사물에는 역사가 있듯이 권총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한 서부극을 보면 알겠지만, 세상에 먼저 등장한 선배는 리볼버입니다. 사람들은 총을 만든 이후에 단순한 발사를 넘어 연발 사격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탄창이 회전하면 된다는 개념을 떠올렸고, 결국 리볼버가 등장합니다. 이후 한동안 권총의 대표로 활약했지만, 단점도 만만치 않습니다. 탄창 구조상 탄약 장전에 한계가 있고, 장전하기도 번거롭습니다. 숙련된 전문가는 클립 못지 않은 속도로 교체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피스톨에 비해 불편한 게 사실이죠. 12~15발짜리 권총과 달랑 6발짜리 권총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무엇을 고를까요. 당연히 장탄수가 많은 녀석을 고르겠죠. 오늘날의 권총 시장이나 제식 권총을 봐도 리볼버를 주력으로 채택하는 곳은 없습니다. 해외 경찰 상황은 잘 모르지만, 거기도 대부분 리볼버를 제치고 피스톨이 제식 권총이라고 들었습니다. 리볼버는 권총계의 크나큰 선배지만, 그만큼 고리타분해서 후배인 피스톨에게 밀려나는 겁니다.
한마디로 리볼버는 클래식하고, 피스톨은 새끈합니다. 게다가 리볼버는 어떠한 품격이 풍깁니다. 리볼버는 곡선 위주의 디자인인데, 피스톨은 직선 위주이기 때문일 겁니다. 리볼버는 탄창부터 (회전하니까) 둥글게 생겼습니다. 손잡이도 클립을 넣을 필요가 없으니까 인체공학적으로 만듭니다. 방아쇠도 네모낳기보다 둥근 편이죠. 반면, 피스톨은 클립이 들어가야 하므로 손잡이가 직선입니다. 곡선을 넣을 수 없어요. 슬라이드를 젖혀야 하므로 총열 덮개도 직선으로 만듭니다. 베레타 피스톨처럼 오픈 슬라이드로 모양을 낼 수 있지만, 대부분 투박한 직사각형이죠. 고풍스러운 문양이나 조각을 넣는다면, 당연히 피스톨보다 리볼버가 적합할 겁니다. 또한 리볼버는 역사가 오래 되었기에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초반을 연상케 합니다. 보안관이나 총잡이가 설치던 그 시절이죠. 반대로 피스톨은 대규모 2차 대전이나 냉전, 베트남 침공, 모던한 도심지 총격전 등을 떠올리게 합니다. 피스톨을 놔두고 리볼버를 사용한다는 건 어딘지 옛날 사람이란 뜻이죠.
이는 서머멧과 밀즈의 성격과 잘 어울리죠. 서머셋은 어디로 보든 뭔가 고전적인 이미지를 풍깁니다. 중절모를 쓰고 다니고,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를 치고, 새로운 관념에 적응하기 힘들고, 도서관에서 지적인 시간을 보내죠. 온갖 고전 작품을 읽고, 항상 신중하고 차분합니다. 밀즈는 가죽 재킷 차림에 떠벌이에다가 다혈질이고, 단테한테 호모 새끼라고 욕합니다. 서머셋이 권하니까 그나마 <신곡>을 읽지만, 솔직히 얼마나 제대로 읽었을지 모르겠습니다. 밀즈는 후식을 먹을 때 맥주를 선택합니다. 아마 무미건조한 아메리칸 라거일 겁니다. 허나 서머셋은 포도주를 주문합니다. 아무래도 맥주보다 포도주가 귀족적이고 고전적인 이미지가 강하죠. 서머셋이 리볼버를 소지하는 이유는 재직 시기가 오래된 탓이겠지만, 한편으로 저런 상징적인 이유도 있을 듯합니다. 사람과 총기가 모두 고풍스러워요. 밀즈는 이른바 신세대니까 서머셋과 대비되는 피스톨을 쓰고요.
물론 이러한 해석은 비약일 수 있습니다. 제작진이 실제로 저런 이유 때문에 각각 리볼버와 피스톨을 설정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리볼버와 피스톨을 설정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두 가지를 구분할 정도로 총기 지식이 풍부한 관객이 얼마나 될 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제작진 의도가 어떻든 리볼버가 고전적이고 지적인 서머셋에게 잘 어울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밀즈는 피스톨이 잘 어울리고요. 생김새도 뭔가 좀 특이하죠. 방아쇠에 구멍이 뚫리거나, 손잡이에 사슴 뿔 장식을 달거나 등등. 의도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그럴 듯한 무기가 된 셈입니다.
피스톨은 그냥 권총이죠. 리볼버든 오토매틱이든 포함하는...
여튼 권총은 매우 개인적인 소품으로 당연히 캐릭터성에 맞춰 선택됐다고 생각되지만, 딱히 새롭거나 심오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선후배 형사의 클리셰에 가깝다고 봅니다. 느긋한 성격, 은퇴를 앞두고 변화보단 익숙한것이 좋은 선배 형사는 리볼버를 애용하고, 다혈질에 저돌적인 성격, 젊고 새로운 것을 쉽게 받아들이는 후배 형사는 오토매틱을 애용한다는 설정은 이미 리썰웨폰에서 전형적인 형태로 연출되었습니다.
근데 상대가 리볼버라 그렇지, 1911도 꽤 노티(?)나는 소품이죠. 물론 요즘 커스텀 1911이면 최신권총 뺨치게 세련되긴 하지만, 9밀리 대용량 폴리머가 대세인 요즘 45구경, 그것도 1911을 선택한다면 짬좀 되는 노련한 프로거나 취향이 확고한 미국아저씨의 이미지라..
총덕질을 좀 한 입장에서 말하자면, 감독이 그런 쪽에 관심이 많으면 총 자체의 캐릭터성도 신경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간단한 예시로 그랜 토리노에서 한국전 참전용사 출신이란 설정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M1 개런드와 콜트 1911을 들고 나오는 것처럼 말이죠. 이상하게도 캐릭터성을 상징하는 총은 보통 권총이지만, 1911의 보수적 이미지라던가, 글록의 실용적 이미지, 시그의 정밀성 같은 건 총 자체에서도 남아 있고 영상 매체로도 어느 정도 느낄 법한 이미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