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이곳은 무엇이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자유 게시판입니다. (댓글 기능을 다시 활성화시켰습니다.)
http://goo.gl/CqPMZa
이 리뷰글을 보고 든 생각입니다. 기억이 보존되서 윤회하는 삶을 사는 사람과 서로의 기억에 접속해서 살아가는데 만족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둘 중 무엇을 영생입네 아닙네 할 수 있을까요?
뜻 그대로의 영생은 전자가 당연하지만 한 사람이 200년동안 생존해서 계속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고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것과 한 사람의 기억과 사상이 모두에게 오픈되어 의논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것 모두를 영생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극단적으로 말해서 영원히 살지만 자기 세상 안에서 고립되어 아무에게도 영향을 주지 못하는 사람과 영원히 생명을 유지할 수는 없지만 자기 생각을 모두가 공유하고 거기에 살을 붙일 수 있다면 무엇이 영생일까요?
우리가 바라는 영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볼때 무엇이 진정한 영생이 될까요? 이런 물음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람들이 바라는 영생은 말 그대로 현상태 유지 아닌가요. 자아와 몸뚱이가 (젊고 건강한 상태로) 천년만년 가는 가죠. 물론 밈 같은 게 계속 살아있으면 진(유전자)이 그렇듯 영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공자나 무함마드 같은 사람은 정말 영생하는 셈이겠죠. 사람들은 흔히 그런 걸 원하지 않겠습니다만.
1.
링크글은 <도시와 별>을 상당히 감명깊게 읽고 썼다는 것이 느껴지는 좋은 감상문이네요.
다만 <도시와 별>이 1992년 무렵 '나경문화'에서 번역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이 쓰신 듯.
폴 앤더슨의 <타우 제로>, 필립 호세 파머의 <연인들>, 제임스 블리쉬의 <우주도시>도 같은 시기에 나왔고,
어느 덧 20 년 전에 나온 SF들은 한국에 번역되었다는 사실조차 잊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2.
각설하고, "혼자 영생하는 삶"과 "타인에게 영향을 주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책은 좀 있습니다.
영생의 방법에 대해서도 "몸이 바뀌던 어떻든 기억을 보존하는 것 자체가 영생"이라는 관점의 영생과
"본래 몸 자체가 죽지 않는 불멸이 되어서 영생"을 누린다는 관점으로 서로다른 영생을 논하기도 하고...
옥타비아 버틀러의 <야생종>에서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순간 오로지 의지만으로 상대의 영혼을 없애고
그 몸으로 전이하는 능력자가 주인공 중 한 사람인데, 기억 보존으로 영생을 누리지만 항상 외롭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을 수 있는 자손을 남겨 세상을 영향을 끼치려고 무진 애를 쓰죠.
그와 대립하는 주인공은 육체적 역량이 무궁무진해서 죽지않고 건강하게 몸을 변신시켜가며 영생하지만,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 본래 숨어서 조용히 지내는 삶을 더 지향하고 있습니다.
두 서로 다른 영생 능력자가 서로 다른 삶의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작품이라고나 할까요.
<도시와 별>과 같이 기억을 저장하였다가 다시 꺼내는 방식으로 영생을 누리는 것을 묘사한 작품으로는,
로저 젤라즈니의 <신들의 사회>가 있습니다 - 남자든 여자든 성별까지 바꾸어가며 다양한 삶을 누리죠.
심지어 정치 싸움에서 패한 이들에게는 "사람을 원숭이로 만들어 살게하는 형벌"을 내리기도 합니다.
기억을 저장하고 몸을 바꿀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한 지배계층은 귀족을 넘어 "신"이 되어 긴 세월 군림하고,
그러한 영생 기술을 갖지 못한 일반 보통 사람들은 계속 피지배계층으로 남아 피폐한 삶을 살아갑니다.
영생을 이용하여 권력을 영구하게 이어가는 방법으로 활용하는 상황을 다루는 작품이라고나 할까요.
영생은 SF 이전에 팬터지, 더 나아가 고전 문학에서도 꽤 흥미롭게 다루어 온 전통적인 주제입니다.
시몬느 드 보봐르의 <모든 인간은 죽는다>가 이 쪽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생 능력을 갖게 된 사람이 정치적 야심을 이루는 일도 도모하고 예술가로서의 삶도 살아가면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영향을 미치는 사람으로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지만 가족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세상에 남게 되자... 외로움과 회한에 몸부림칩니다.
결국 그 영생 능력자는 공원에 멍하니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렁뱅이가 되어 버리죠.
3.
아서 클라크의 <도시와 별>로 다시 돌아와서 이야기를 조금 더 하면...
제가 해당 작품을 읽으면서 더 크게 다가왔던 것은,
"영생"에 대한 테마보다는 "고정된 세계에서의 탈출"이었습니다.
그리고 "특이성을 가진 사람"이 리더가 되어 이러한 변혁을 이끄는 일종의 "영웅의 혁명담"으로 봤죠.
솔직히 "영생"에 대한 내용은 설정 상 들어가 있는 부가적인 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도시와 별>은 아서 클라크가 뛰어난 SF 작가로 독자들에게 처음 인식된 초기작이자 출세작이고,
이후 작가가 우주로의 진출이나 외계 문명과의 접촉, 인류 진화 등에 대한 비전 등을 제시하는 작품을 쓰면서
"거창하고 넓고 거대한 테마"를 잘 다루는 SF 작가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도시와 별>은 작가의 다른 대표작들에 비해 한정적이고 제한된 공간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편입니다.
아서 클라크의 작품 치고는 주인공이 활동하는 공간적 범위가 상당히 좁고, 이야기의 폭도 그렇다는 거죠.
하지만 <도시와 별>은 링크 글의 리뷰처럼 "아이디어의 집합소"이고,
그래서 책을 읽는 이가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이후 쓰여진 작가의 여타 대표작들에서는 느낄 수 없는 매력적인 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요즘에는 <스페이스 오디세이>와 <라마와의 랑데뷰>가 아서 클라크를 상징하는 책이 되어 있는데,
왕년에는 <도시와 별>과 <유년기의 끝> 두 편이 작가의 진정한 대표작이라는 평가가 나오곤 했습니다.
<도시와 별>과 <유년기의 끝> 두 편 모두 아서 클라크의 대표작이지만,
정작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하드 SF"와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작품임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아서 클라크라는 작가가 "우주여행과 탐사를 매우 정교하게 예측하여 묘사했다"는 점 때문에
SF 판에서도 "하드 SF의 거장"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도...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초기의 대표작과 궤를 달리하는 다른 성격을 가진 작품을 후기에 써내고 큰 명성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건 작가가 스스로 더 발전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는 뜻입니다 - 무척 모범적인 사례라 할 만 하죠.
다만... 말년에는 (노망이 들었는지) 멀쩡한 자기 작품에 대한 이상한 속편을 덧붙이는 바람에,
차라리 쓰지 않는 것보다도 못한 졸작 속편들을 꽤 여럿 남겼다는 점은 안타깝지만서도..
영생이라... 그건 있어선 안되는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