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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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적인 파티 기반의 1인칭 시점 던전 탐사물입니다.]
일련의 모험가들이 던전을 탐험합니다. 전사, 성직자, 도적, 마법사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파티입니다. 그런데 이 던전은 모양이 좀 희한합니다. 언뜻 자연적인 동굴 같지만, 통로는 무조건 직선으로 뻗었습니다. 마치 모눈종이 위에 그린 것처럼 생겼죠. 더욱 이상한 건 모험가들의 행동입니다. 이들은 무조건 한꺼번에 움직입니다. 마치 서로 쇠사슬에 연결된 것처럼 이쪽으로 우르르, 저쪽으로 우르르 몰려다닙니다. 앞으로 가든, 게걸음을 하든, 심지어 뒷걸음질을 할 때도 4명이 한번에 움직입니다. 접착제로 붙인 것처럼 절대 떨어지지 않습니다. 도적이 먼저 정찰을 나가거나, 2명씩 흩어져 방을 살펴보지 않습니다. 4명이 한꺼번에 문을 감시하고, 주변을 둘러보고, 함정을 해제하고, 두루마리를 검사합니다. 마치 4명이 한 사람인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행동합니다. 머리는 네 개인데, 몸뚱이는 하나라고 할까요. 게다가 체스의 루크처럼 항상 직각으로 움직입니다. 던전이 직각 위주라서 그런지 모험가들도 한꺼번에 동서남북으로만 걸어요.
과장을 좀 보태긴 했으나, 이런 풍경은 '파티 기반인 1인칭 시점의 던전 탐사물'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음, 뭔가 복잡한 용어로군요. 간단한 예를 들자면, <위저드리>나 <아이 오브 비홀더>와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요즘에 인기를 끄는 게임으로 <레전드 오브 그림록> 시리즈가 있고, 여기에 영향을 받아 <마이트 앤 매직> 10편이 나왔죠. 이런 게임들은 지금이야 인지도가 낮지만, 한때 서구의 컴퓨터 롤플레잉 게임계를 주름잡았습니다. 서구 3대 롤플레잉을 비롯한 유명한 고전 상당수가 여기에 속하죠. 플레이 방식은 대개 비슷합니다. 화면 상단에 1인칭 시점이 떠있습니다. 그 옆에 작은 지도와 각종 메뉴, 기술, 마법 아이콘이 몰렸습니다. 시점 화면 아래에 모험가 초상화와 체력 막대를 표시했죠. 그리고 시점과 메뉴와 초상화 사이 어딘가에 나침반이 있습니다. 동서남북을 가리켜야 하거든요. 플레이어는 키보드를 조작하거나 직접 방향키(!)를 눌러 이동합니다. 마우스로 주변을 탐사하거나 상점을 이용하거나 몬스터와 싸우죠.
이런 게임들은 거진 200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케케묵은 게임처럼 보이지만, 업계 패러다임이 바뀐 밀레니엄까지 이어졌다는 뜻입니다. <위저드리> 8편이 2001년 말에 나왔으니까요. 그렇다고 1인칭 파티 방식이 계속해서 인기를 끌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명맥을 유지한다고 무조건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건 아니니까요. 1997년을 넘어가면, 게임계는 이미 아이소메트릭 시점으로 점유율을 갈아타기 시작했죠. <폴아웃>이나 <발더스 게이트> 등이 등장했으니까요. 그리고 3D 기술이 발전하면서 시점 조절이 가능해지고, 숄더뷰나 백뷰 등이 대세로 자리잡습니다. 그리고 1인칭 파티 시점은 사실상 업계의 주력에서 과거의 추억으로 내려갑니다. 지금은 아이소메트릭 시점마저 고전적이라고 부르니, 1인칭 파티 시점이야 말할 필요도 없겠죠. 솔직히 사실적인 플레이를 지향하는 유저에게 <바드 테일> 같은 게임은 이상하게 보일 겁니다. 4명 혹은 그 이상 되는 인물들이 무슨 족쇄 채운 죄수들마냥 한번에 우르르 몰려다니니까요. 단순히 어색한 걸 떠나서 전술적인 면모도 부족하고요.
[이런 게임은 각 캐릭터가 독립적이지 못해서 답답하기도 하죠.]
가령, <아이스윈드 데일>과 <마이트 앤 매직>을 비교해보죠. <아이스윈드 데일>은 각 캐릭터를 독립적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도적이 혼자서 몰래 동굴을 정찰하고, 거대 거미들이 몰려오면 전사가 문을 가로막고, 그 사이에 성직자는 전사 곁에서 보조 주문을 걸고, 마법사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안전하게 공격 주문을 외울 수 있습니다. 캐릭터 두어 명을 옆으로 빼서 측면을 치거나, 날랜 도적을 적진으로 보내 미끼로 삼거나, 적들이 도적에게 몰리는 사이에게 마법사가 불덩이를 날릴 수 있죠. 하지만 <마이트 앤 매직>은 이런 전술이 불가능합니다. 하다못해 코를 파거나 하품을 하더라도 네 명이 따로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뭐, 코를 파는 거야 농담이지만, 어쨌거나 행동에 제약이 많습니다. 도적이 전사와 마법사를 두고 홀로 정찰을 하거나 함정을 설치할 수 없습니다. 전사가 문을 막는 사이에 마법사가 계단 위에 올라가 몸을 보호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던전에서 모험가들이 청기·백기 놀이마냥 우르르 몰린다고 생각하면 꽤 웃길 겁니다. 이게 무슨 제식 훈련도 아니고.
그럼에도 한동안 <마이트 앤 매직> 같은 게임들이 서구 롤플레잉을 이끌었습니다. 아마 시스템이 그만큼 단순하기 때문일 겁니다. 요즘은 컴퓨터와 게임기 사양이 높아져서 각종 퍼포먼스를 무리 없이 구현할 수 있어요. 하지만 과거에는 이런 게 쉽지 않았겠죠. 제한적인 사양으로 모험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폐쇄적인 던전을 만들고, 거기에 모험가를 달랑 하나 집어 넣었습니다. 그러다 점차 인원을 늘리고, 모험가는 1명에서 3~6명으로 불어납니다. 머릿수만 늘어났지, 시스템은 그대로라서 여러 명이 한 명처럼 이동하죠. 한계가 명확하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클래스가 협동해서 싸운다는 컨셉은 정확하게 표현했습니다. 서로 성향과 특성이 다르고, 기술 사용이나 주문 영창도 각자 따로 합니다. 그렇게 파티 플레이라는 느낌을 최대한 살렸죠. 어차피 던전은 비좁고 불편하다는 이유도 한몫했을 겁니다. 비좁은 장소니까 여러 명이 한꺼번에 몰려다녀도 그리 어색하게 보이지 않습니다. 1인칭 시점이라서 몰입도도 상당히 높고요.
한마디로 1인칭 파티 탐사물은 적은 사양으로 최고의 효과를 노렸다고 하겠습니다. <던전스 앤 드래곤스> 같은 테이블 게임의 느낌을 비디오 게임으로 멋지게 묘사했죠. 기기 사양이 올라가고, 더욱 현실적인 플레이 구현이 가능해지자 자리를 내주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이런 명작들이 꾸준히 등장했기에 서구 비디오 롤플레잉 게임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겠죠. 게다가 사양이나 시스템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1인칭 파티 탐사물은 분위기가 꽤나 독특합니다. 다른 시점의 롤플레잉 게임에서 맛볼 수 없는 자신만의 색깔이 뚜렷해요. 삭막하고 답답한 던전 안에서 파티가 옹기종기 모여 돌아다니는 느낌이 강렬하죠. 전술은 좀 약할지라도 탐험 느낌은 한껏 살렸습니다. <발더스 게이트> 같은 게임은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만큼 던전 특유의 갑갑함은 별로 없습니다. 또한 위에서 말했듯이 1인칭 시점의 몰입도는 아이소메트릭보다 훨씬 뛰어납니다. 파티 조종은 아이소메트릭이 제일 적당하지만, 이건 아무래도 1인칭 시점보다 몰입도가 떨어지죠.
[일견 답답하게 보이지만, 그만큼 던전 분위기는 아기자기합니다.]
구닥다리처럼 보이는데도 <레전드 오브 그림록>이 인기를 끈 이유가 저것 때문일 겁니다. 향수를 자극하는 면도 있지만, 여타 3인칭 시점의 롤플레잉 게임에서 맛볼 수 없는 던전 분위기가 끝내줍니다. 도대체 시대가 2013년인데, 아직까지 바둑판 위에서 직각 이동하느냐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1인칭 파티 탐사물의 느낌은 다른 게임이 결코 모방할 수 없습니다. 파티원끼리 끈끈하게 뭉쳐서 아기자기하게 탐험한다고 해야 하나. 무조건 스케일이 크다고 좋은 게 아니잖아요. 개인적으로 <아이스윈드 데일> 같은 아이소메트릭 파티 게임을 좋아합니다만. 그렇다고 어느 게 훨씬 낫다고 말을 못하겠습니다. 1인칭 파티 탐사물은 겉보기에 스케일이 작지만, 알맹이는 굉장히 실속 있습니다. 더군다나 구닥다리 방식이라고 해서 항상 예전 시스템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래픽과 사양이 발달했으니, 거기에 맞춰 던전을 디테일하게 꾸미거나 퍼즐을 늘리거나 합니다. 만일 예전 방식에만 머물렀다면, 추억팔이라고 대차게 욕을 먹었겠죠.
1인칭 파티 탐사물이라도 세세한 부분은 각자 다릅니다. 파티원은 3명부터 많게는 8명에 이릅니다. 음, 8명이 그 좁은 던전을 북적거리며 돌아다닌다고 생각하면 좀 웃기기도…. 3~4명이 제일 적당한 숫자가 아닌가 싶네요. 던전 탐사물이라고 하지만, 마을이나 야외도 자주 나와요. 실제로 1990년대 후반부의 게임들은 배경이 비교적 광활합니다. 광활해도 4명이서 행렬을 딱딱 맞춰가며 걷는 건 마찬가지지만요. 지형은 평면적이지만, 그 중에는 고저 차이를 구분해서 싸우는 게임도 있습니다. 이동 방식은 크게 고전적인 격자 이동과 자유 이동으로 나뉩니다. 격자 이동은 워낙 딱딱한 방식이라 싫어하는 유저도 없지 않은 듯해요. 고전 게임이니까 턴 방식이 많을 것 같지만, 의외로 실시간 전투도 더러 보입니다. 격자 기반과 실시간을 조합할 수도 있고, 자유 이동이면서 턴 방식으로 싸울 수도 있죠. <마이트 앤 매직>처럼 시리즈가 많은 게임은 이것저것 바뀌기도 하고요. 그래서 10편이 나올 때, 왜 격자 이동에다 턴 방식이냐고 불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거야 순전히 취향 문제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유 이동과 턴 방식의 조합이 좋더군요.
이런 게임들은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모델이라 그런지, 대부분 검마 판타지가 압도적입니다. 스페이스 오페라로 만드는 경우는 드문 것 같네요. 제가 게임 지식이 부족해서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죠. 허나 유명작을 찾아보면 거의 대부분 검마 판타지입니다. 역시 탐험 롤플레잉은 판타지이고, 전술 롤플레잉은 SF인 건지…. 장대한 우주전쟁물이 비좁은 던전 탐사물에 어울리겠냐고 반문할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기에는 안 될 것도 없습니다. 우주 해병들이 좁은 우주선에 갇혀서 외계 괴물이랑 싸운다는 레퍼토리는 흔하잖아요. 이걸 게임으로 구현하면, 던전 탐사물이 제일 적당하겠죠. 지원병, 돌격병, 공병, 의무병 4명이 우주선을 돌아다니며, 외계 괴물과 싸우는 우주선 탐사물도 그럴 듯할 텐데 말입니다. 롤플레잉이 아니라 전술 게임이지만, 고전적인 <스페이스 헐크> 컴퓨터 게임은 던전 탐사물 비슷한 느낌이 납니다. <스타크롤러>라고 킥스타터 롤플레잉 게임이 있던데, 우주선 탐사물을 괜찮게 전개하는 듯합니다.
[검마 판타지 말고 우주선 탐사물도 이런 식으로 나왔으면 싶네요.]
솔직히 저도 1인칭 파티 탐사물은 별로 해보지 못했습니다. 관련 지식도 별로 없고요. 하지만 킥스타터 등으로 올드 스쿨 아이소메트릭 게임만 아니라 저런 골동품(?) 게임까지 다시 나오나 봅니다. <바즈 테일>과 <드래곤 워즈>의 정통 속편이 나온다는 말을 듣고, 몇 글자 적어봅니다.
이들 작품의 가장 오랜 고전인 위저드리는 특히 일본에서 인기가 좋습니다. 오죽하면 일본에서 위저드리의 판권을 사서 게임을 만들 정도니까요. 위저드리 스타일의 게임들도 많고, 위저드리 설정을 바탕으로 한 게임들도 많죠.
이 같은 게임들은 TRPG 분위기에 가까워서 좀더 아기자기하게 즐길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전투에 들어갔을때 리얼타임 방식이나 3인칭 방식과는 확연하게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거든요. 3인칭 방식의 게임인 '드래곤퀘스트'가 전투에만 들어가면 이렇게 바뀌는 것도 바로 그 같은 파티에서의 전투를 잘 엮어낼 수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제가 이런 종류를 가장 처음 접한건 '바즈테일'이었는데, 모눈종이에 지도를 그리면서 참 어렵게 어렵게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길을 잃기 일수인지라 주의가 필요했죠.
바로 그러한 점이 역시 '1인칭 시점의 던젼 RPG'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숨겨진 뭔가를 찾기 위해서 지도 전체를 뒤져보는게 역시 즐겁고요.
'바즈테일'의 속편이라니 기대되는군요. 역시 '내가 바라는 게임'을 만드는 방식이 되니, 이처럼 다양한 기획이 가능해진 것 같아서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