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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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최초로 읽은 어른용 서적 중 하나가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입니다.
어린이 편집판이 아닌, 어른용으로 나온 문학 서적 완역본을 그대로 읽어내린 것은 <천국의 열쇠>가 처음이었죠.
책 자체가 본래 읽기에 평이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에피소드 단위로 풀어놓는 TV 드라마와 같은 구성이어서,
초등학교 6학년이었지만 즐겁게 읽었습니다. 중학교 올라가기 전에 딱 괜찮은 독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 책 도입부에는 저를 무려 30년 가까이 괴롭힌 인용 문구가 나온다는 겁니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은 대목인데, 도처히 진짜 원문의 출처를 찾지 못하겠더군요.
---(전략) ---------------------------------------------------------------------------
"우리의 뼈는 썩어서 들판의 흙으로 변하겠지만 영혼은 빠져나가 영광과 광명의 천상에 살리로다. 신은 인류 공통의 아버지로다."
슬리스 신부는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며 치셤 신부를 바라보았다.
"근사한 말이군요. 이것은 성바울로가 말씀하신 게 아닙니까?"
"아니오."
노인은 사과라도 하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이건 공자의 말씀이오."
---(후략) ---------------------------------------------------------------------------
저는 공자님이 하셨다는 저 말이 도대체 어디에 나오는 지 진심으로 궁금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니면서 제가 접할 수 있는 공자 말씀이 담긴 책은 딱 세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춘추>, <논어>, <명심보감>
오늘날 현대사회가 조선시대처럼 한학을 가르치고 공부하는 환경도 아니고,
중고등학교 다니는 학생이 취미로 공부해서 떼기에는 <명심보감>이 가장 만만했고,
그 다음 레벨의 책은 해설서나 읽어보는 정도이지 본격적으로 공부하기에는 무리였죠.
하여간 저는 크로닌이 <천국의 열쇠>에 인용해 놓은 "공자의 말씀"이 어디에 나오는 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든 <명심보감>과 <논어>를 중학교 다니는 동안 HR 시간에 "한문 서클"에 나가면서 공부헀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한문> 시간에 선생님께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대학에 가서는 짬짬히 <명심보감>과 <논어>를 보면서 저 구절을 찾아 헤멨죠.
제가 중학교 시절부터 30 년동안 쥐꼬리만큼이나마 동양철학에 관련하여 꾸준히 책을 들여다 본 유일한 이유는,
실은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에 "공자님 말씀"이라고 인용했던 내용이 어디에 나오나 찾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어이없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 말은 공자님 말씀이 아니라는 겁니다.
<주자어류>에 이르기를,
"뼈와 살은 땅속에서 썩어 묻힌 채 야토(野土)가 되지만 혼이나 기와 같은 것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공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과 문답을 적어 기록한 책이 <논어>인 것과 마찬가지로,
주자의 제자들이 스승의 말씀이나 제자들과 행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주자어류>입니다.
이 책은 주자가 심혈을 기울여서 직접 집필한 책이 아니기 때문에... 학문적 가치는 낮게 평가되죠.
저는 30 년 동안 <천국의 열쇠>에서 크로닌이 "공자의 말씀"이라고 인용해 놓은 대목을 찾아 다녔습니다만,
알고보니 저 말은 공자의 말이 아니고, 주자가 한 말을 제자들이 받아 적은 책을 인용한 것이었습니다.
번역자가 동양철학에 지식이 있고 성의가 있어서 "원문과는 달리 <주자어류>에 나오는 주자의 말을 인용한 것"
뭐 대략 이렇게 주석이라도 잘 달아 놓았다면 제가 그렇게 오랜 시간을 헤메고 다니지는 않았을 것인데..
덕분에 꽤 긴 시간 동안 한학에 관심을 가지고 책도 보고 그랬으므로 결과적으로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간 진실을 알고 보니 무척 황당할 뿐입니다.
[결론]
잘못된 인용으로 혼란을 주지 맙시다.
저처럼 30년 동안 헛짓하며 찾아다니는 사람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사족]
국내에는 무수히 많은 <천국의 열쇠> 번역본이 존재하고 있지만...
제가 살펴본 바로는 저 구절이 "공자의 말이 아니라 주자의 말이다"라고 주석 등으로 바로 잡아 놓은 책은 없는 것 같습니다.
독자들 중에도 나이 먹고 기독교를 믿으면서도 어릴 적부터 배운 한학에도 밝은 사람이 꽤 있을 것 같은데,
왜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인용이 잘못되는 예는 상당히 많을 듯합니다. 특히, 문화나 국가, 언어 등이 다를 때는 훨씬 그렇겠고요.
가상의 마도서인 <네크로노미콘>은 원래 이름이 <알 아지프>였다고 하죠. 개인적으로 이 이름을 훨씬 좋아합니다. '짐승의 미친 울부짖음'이라는 뜻인데, 얼마나 멋진 제목입니까. 시체 어쩌구 하는 것보다 짐승의 포효라는 제목이 마도서로서 그럴 듯하죠. 윌리엄 벡포드의 소설 <바텍>에서 따왔다고 하는데, 문제는 아지프라는 단어에 저런 뉘앙스가 없다는 겁니다. 하도 멋진 제목이라서 아랍어 사전을 찾아봤는데, 사악한 울부짖음보다 그저 소리나 연주를 뜻하는 단어였습니다. 벡포드가 잘못 쓴 건지, 러브크래프트가 인용을 잘못한 건지, 아니면 제가 아랍어 지식이 부족해서 이해를 못하는 건지…. <바텍>을 읽어봐야 알 수 있겠는데요.
뭐, 1588년에 출생한 워미우스가 중세에 <네크로노미콘>을 번역했다고도 나오죠. 실제 인물과 가상의 설정을 뒤섞어서 신비감을 불러 일으키는 방법은 좋은데, 은근히 오류가 많은 듯.
단순히 작가가 잘못 알았다기보다, 어쩌면 기독교적 시각이 주자의 말을 공자의 말씀으로 이해하게 한 건지도 모르죠.
성경은 여러 작가들이 예수나 야훼에 대해 기록한 글들을 모은 것이지만, 기독교 교리 상 실제로 글을 쓴 사람이 누구든 그 내용은 성령에 의해 신이 직접 개입하여 한 말이라고 간주합니다. 따라서 마크가 썼든 루크가 썼든 다 '주님의 말씀'이 되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도가 공자의 유학을 공자를 시조로 하는 하나의 '종교'로 이해했다면, 유학자들이 남긴 모든 유교 '경전'이 공자의 말씀으로 이해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인용은 꼭 동서양을 넘어서만 발생하는 것도 아니죠 (웃음)
작가가 정확하게 알고 인용한다면 좋겠지만, 한편으로 '잘못된 상식'이 도처에 존재하듯 잘못된 인용의 가능성 역시 언제나 존재하는 걸요. ㅎ
번역과정에서의 오역이 아니라면 이러한 잘못된 인용이 고스란히 출판되어 나오는 것이 꼭 번역서의 한계는 아닐 것입니다.
물론, 작가 사후에 발간되는 책이 아니고 직접적으로 원고를 받아 출판하는 과정에서의 편집자가 그러한 잘못된 인용을 캐치한다면 작가와의 소통을 통해 올바르게 바로잡을 기회도 주어지겠지만 말이죠.
꼭 작가와의 소통을 통해 바로잡지는 않는다고 해도 '역자주'나 '편집자주'를 통해 추가해설이 가능하고 원역에는 없는 잘못된 인용을 찾아내어 주석을 넣어줄 정도의 센스와 능력이 그렇게 흔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번역의 경우에는 잘 모르지만, 외국서적의 번역출판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원고를 받고 출판하는 과정에서도 작품 내적인 내용의 오류나 어색한 표현, 맞춤법 등 표기오류 이상을 체크하기는 쉽지 않으니까요.
한편으로는 오류를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는 '주석'은 세심한 배려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역자주'나 '편집자주'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현지, 혹은 해당 시기의 독자라면 당연히 주석없이 이해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할 사실에 대한 주석이라면 얘기가 좀 다르지만..)
왠지 보다가 주석이 방해되어 감정선이나 몰입감을 해친다고 할까... 그런 경우도 적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된 지식이 아무렇지 않게 파급되는 것을 방치할 수 있는 이유는 못되지만 말이죠)
한편으로 말과 말이 돌고 시간과 공간을 넘다보면 별의 별일이 다 생기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어떤 철학적 문구나 짧게 핵심사상을 표현하고자 하는 격언 등은 같은 문장을 두고도 해석을 하고 그 진의를 판단내려 전달하는 과정에서 뉘앙스등이 상당히 변화되곤 하기 때문에 단계를 거쳐 어떤 도달점에 다다르면 전혀 다른 문장과 전혀 다른 의미가 되기도 하죠. (웃음)
번역서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작가가 적어놓은 내용을 일일이 찾아서 수정하는 사람은 없을테니...
대체역사물 중에서 "쌀과 소금의 시대"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유럽이 페스트로 거의 전멸한 상황인지라 중국이 거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는 느낌인데, 여기서 중간에 뭔가 이상한 내용이 나오죠. 알고 보니 그 내용은 반야심경으로, 반야심경을 영어로 번역하여 작가가 기재해둔 내용을 번역자가 영어에서 그대로 번역하다보니 이중 번역이 되어 이상한 내용이 되어 버린 겁니다. 만약 그 내용이 반야심경이라는 것을 번역자가 알았다면 굳이 영어를 번역해서 기재할 필요없이 기재할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