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사진 게시판
때로는 유머 그림도 좋겠지요?
출처 : http://wenhua.jguo.cn/rwdl/2013/0104/871.html
호복기사. 이를 떠올리니 인터넷에서 여기에 맞는 삽화를 찾습니다. 말을 나타낸 모습을 한 눈에 보아도 중원 사람이 그린 그림이다는 점을 알아차립니다. 허생전에서 '무령왕은 나라를 강하게 하기 위해 되놈 옷을 입는 것도 부끄러워 하지않았다'는 내용을 나타낸 장면을 떠올립니다.
다른 이야기) 무령왕으로만 적으면 백제 무령왕으로 판단하실 분이 아주 많으실 텝니다. 이런 까닭으로 제목에서는 '조 무령왕'으로 나타냅니다.
<오. 우리가 여기서 어떠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아는 그대여, 그대의 기도 속에서 우리를 잊지 마오.>
- 출처 : 듄 우리말 번역본(출판사 : 황금가지) 제 1권 177쪽
실제로 그러네요...
수나라를 건국한 수문제도 망나니 아들 수양제의 손에 의해 사실상 암살당했죠.
헨리2세도 사실상 브리튼을 정복한 창업군주나 다름없는데 후계 문제로 아들이 반란을 일으켜 포위된 채로 죽었고...
당나라를 창업한 고조도 잘난 둘째 이세민 대신 큰 아들을 후계자로 세웠다가 둘째가 일으킨 반란으로 황제 자리에서 쫓겨났죠.
삼국시대 동오의 황제 손권도 두 아들 중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여 궁궐이 둘로 쪼개져서 말년에 나라가 파탄나 버렸고...
대충 생각나는 대로 주워섬겨도 후계자 문제 때문에 말로가 엉망이 된 창업주는 무수히 많을 듯 합니다.
제가 의사 전달을 제대로 하지않은 듯 합니다. 그래서인지 벌거지님과 표도기님이 제가 클럽에 삽화를 올린 의도와는 다른 얘기를 하셨습니다. 중화의 군주가 되놈 옷을 입으며 말을 탄 의미가 아주 중요합니다. 역사/군사/정치. 여러 방면에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벌거지님께서 조 무령왕의 비참한 말로에만 초점을 맞추시며 표도기님께서 여기에 호응하십니다. 견식이 저에 비해 깊으신 분들이 왜 이렇게 얘기하시는걸까. 이런 의문이 드니까 제가 아는 대로 얘기합니다.
조 무령왕이 호복기사를 채택한 점에서는 전쟁사/세계사로 바라보아도 의미가 깊습니다. 중원에서 기마 병과가 주력으로 잡는 시기를 확실하게 알 수 있으니까요. 문헌으로 정확한 시기를 나타내니까 중원에 기사가 확실하게 자리잡은 시점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조 무령왕 시기에 뿌리잡았다. 이러니까 조 무령왕이 펼친 정책을 남다르게 의미를 둡니다. 킴메르/스키타이에서 기원이 되었을 '기마 문화'가 중원에 국가 차원으로 받아들인 시기가 언제인가. 이렇게 말입니다. 이 흐름을 엄두하니 조 무령왕이 강행한 호복기사는 세계사 전체를 보아도 의미가 깊을 텝니다.
군주가 직접 개혁을 앞장선다. 여기에 흥미롭게 살핍니다. 제 환공과 진 효공이 각기 관중과 상앙을 앞세우면서 개혁을 뒷받침한 경우와 대비가 됩니다. 왜 그러했을까. 중원 정치에 나타나는 흐름과 다르게 타니까 흥미가 생깁니다. 여느 사람에게 과격하게 보일 행동을 하면서 말입니다. 중원에서는 신분에 따라 옷을 입는 경우에도 차등을 두었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조 무령왕이 되놈 옷을 입었다는 행위는 파격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중화의 질서과 예법을 따라야하는 군주가 짐승같은 오랑캐처럼 행동하다니. 이렇게까지 과격하니까 조 무령왕이 퇴위되어도 이상할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역량이 뛰어나면서 중산국을 비롯한 여러 외적이 조를 망국에 치닫을 정도로 위협했다는 사정이 있으니까 이런 강경책이 제대로 먹였다며 바라봅니다.
조 무령왕이 강행한 호복기사. 이 역사를 군사과 정치에 관련있는 사항에 아우르면서 얘기합니다. 서툴게 얘기하지만요. 조 무령왕이 어떠한 말로를 겪었는가. 삽화를 올리기 전에 익히 알았습니다. 호복기사가 훨씬 중요하니까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처량한 최후에만 중시하는 댓글을 보니까 제가 뭔가 잘못했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조 무령왕을 나타낸 삽화를 클럽에 올린 의도를 명확하게 전달하자.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거기에 따른 댓글을 답니다.
조무령왕은 <열국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 말로가 너무 기가막히고 안좋아서요.
기마대를 조직하여 조나라를 전국 7웅으로 만들고 이후 계속 강국이 되는 토대를 닦은 훌륭한 군주였지만...
춘주전국시대를 풍미한 군주 중에서 (타국과 싸움에서는 패한 적이 없지만) 마지막이 가장 나빴던 사람입니다.
조무령왕은 본래 후계자로 키우던 장남이 자질이 부족하다고 하여 대신 차남을 후계자로 삼았는데,
뒤늦게 자기가 끌어내린 장남이 안쓰럽게 여겨져서 정복한 영토를 장남을 통해 다스리게 하려고 했죠.
후계자로 조나라를 다스리던 차남은 잘못하면 장남인 형이 힘을 키워 위협적인 세력이 될까봐 경계했고,
그 바람에 장남과 차남 사이에 내전이 벌어져서 장남이 조무령왕의 거쳐로 쫓겨와 숨겨달라고 애원합니다.
조무령왕은 장남을 외면하지 못하여 숨겨주었고, 차남은 아버지와 형을 한꺼번에 포위한 채 쫄쫄 굶겼죠.
결국 전국시대에 천하를 호령하며 조나라를 강국으로 성장시킨 조무령왕은 장남과 함께 굶어죽고 맙니다.
조무령왕은 천하를 경략한 영웅이었지만,
후계자 문제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너무 쉽게 생각했다가
자식들 간에 싸움이 나서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불쌍한 사람입니다.
실은 한반도에서도 역사를 뒤져보면 이런 케이스는 꽤 많이 존재했죠.
조선을 건국하였지만 후계자 문제 때문에 다섯 째 아들의 쿠데타로 쫓겨난 이성계라든지,
백제를 건국하였지만 장남을 후계자로 고집하다가 둘째 아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죽은 소서노라든지,
신라를 건국하였지만 궁궐 쿠데타로 시신이 뿔뿔히 흩어지고 섞여서 무덤을 다섯 개를 썼던 박혁거세라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