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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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만화 <고지라: 어웨이크닝>과 영화 <고지라>의 내용누설 있습니다!!
[프리퀄 만화에서 방사열선 뿜는 고지라. 근접 거리입니다.]
고지라의 장기는 뭐니뭐니해도 방사열선입니다. 수소폭탄으로 탄생한 괴수답게 방사능 화염을 뿜는데, 1954년 원작부터 지금까지 시리즈마다 꾸준히 등장했죠. 파괴력도 굉장해서 인간이 만든 건조물은 그냥 날려버리고, 어지간한 괴수들도 몇 방 맞고 뻗습니다. 화염을 내뿜는 방식도 독특한데, 신체 내부에서 방사능을 집적하고, 과열을 피하기 위해 등에 달린 골판으로 방전합니다. 그래서 골판이 번쩍거리며 빛나죠. 골판이 빛나는 표시는 고지라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뜻이기에 극중 긴장감을 높여주는 효과도 있습니다. 방사열선의 모습은 작품마다 차이가 있는데, 초창기에는 하얀 가스와 비슷했습니다. 연기를 뿜는 것처럼 보였고, 이런 모습을 한동안 유지합니다. 그러다 푸른빛의 광선으로 바뀌었고, 대개 시리즈에서 이렇게 나오며 가장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가끔 노란빛으로 나올 때도 있는데, 푸른빛보다 위력이 훨씬 강한 듯합니다.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녹색 열선을 뿜기도 했어요.
1998년 갓질라는 그냥 불덩이를, 그것도 풍압으로 일으키는 설정 때문에 욕을 대차게 먹었습니다. 고지라의 상징을 삭제했다고 비판이 어마어마했죠. 2014년 고지라는 원작의 충실한 감정을 그대로 따르고, 당연히 방사열선도 뿜습니다. 시리즈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푸른빛인데, 광선이라기보다 일직선의 화염 형태에 가깝습니다. 이걸로 상대 괴수인 무토를 끝장내기에 이르죠. 그런데 여기서 의문점을 품는 관객도 있나 봅니다. 방사열선이 무토를 녹여버릴 정도로 강력한 능력이라면, 왜 진작 사용하지 않았느냐 이겁니다. 처음에 싸움이 붙자마자 내뿜었다면, 그렇게 고생하고 얻어터지지 않았을 텐데요. 게다가 고지라와 무토가 처음 마주친 지점이 호노룰루입니다. 여기서 무토를 놓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태평양의 1/3을 헤엄쳐야 했습니다. 그 뒤에 다시 마주쳤을 때도 방사열선을 뿜을 기미가 없었습니다. 어떤 관객은 필살기를 숨기기 위한 진부한 연출이라고 비웃더군요. 액션 영웅의 뻔한 공식이라는 거죠.
그러면 고지라가 막판에 방사열선을 뿜은 건 그저 연출 때문이었을까요. 아마 그런 이유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죠. 작중 설정이나 전개로 봐도 처음부터 방사열선을 뿜기가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고지라가 그렇게 싸운 이유가 있다는 겁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려면, 우선 원작 시리즈와 2014년의 차이점을 살펴봐야 합니다. 일단 2014년 고지라는 방사능을 방전하는 속도가 꽤 느립니다. 원작에서는 등에 붙은 골판이 두어 번 번쩍거리고 곧장 열선이 나갔습니다. 가끔 위력을 높일 때는 방전 시간도 길어지지만, 대부분은 몇 초 걸리지 않았습니다. 반면, 2014년에서는 비교적 오래 걸립니다. 꼬리 끝부분에 있는 가시부터 점차 방전하고,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를 점등하듯 등줄기를 거쳐 목에 돋은 가시까지 푸르스름해집니다. 그 다음에도 크게 숨을 들이쉰 다음 비로소 내뿜습니다. 그것도 계속해서 뿜는 게 아니라 중반에 숨을 고르고, 다시 뿜기까지 합니다. 원작에서는 한 번 뿜으면, 화염방사기마냥 쉬지 않고 주변을 모두 불태웠는데요.
[원작에서는 방사열선을 상당히 멀리 뿜는 경우도 잦습니다.]
비단 속도만 느린 게 아닙니다. 사정거리도 짧습니다. 원작에서는 자기 몸길이의 몇 배나 되는 거리도 맞췄습니다. 게다가 잘만 하면 대기권을 돌파해서 우주를 날아가는 우주선까지 격추시킬 정도였죠. 고지라가 바위 뒤에 숨어서 저격수마냥 캠핑(!)한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2014년에서는 바로 코 앞에서 뿜습니다. 이게 사정거리가 짧아서 그런지, 고지라의 버릇인지, 주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만. 프리퀄 만화인 <고지라: 어웨이크닝>을 봐도 근접해서 뿜는 장면이 많습니다. 방사열선 장면은 세 번 나오는데, 둘째 장면에서 그나마 멀리 쐈을 뿐입니다. 게다가 제대로 맞추지 못했고, 대신 날개에 부상을 입혔어요. 첫째와 셋째 장면에서는 상대 괴수인 시노무라에게 가까이 다가가 뿜어서 확실하게 처치합니다. 즉, 원작에 비해 공격 속도도 느리고, 사정거리도 짧아진 셈입니다. 원작 방사열선이 자동소총이었다면, 2014년은 슬러그탄 산탄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방사열선의 특징을 알아봤으니, 이제 무토와의 싸움으로 넘어갑니다. 고지라가 호노룰루에서 처음 만난 상대는 수컷 무토입니다. 크기가 작은 대신 날개가 달려 빠르게 날아다니죠. 이 놈은 인류를 공격하지만, 고지라는 되도록 회피합니다. 하와이에서도 본격적으로 싸우지 않고, 오하우 밖으로 도망쳤죠.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맞붙지만, 제대로 싸우지 않고 그냥 달아납니다. 수컷 무토 입장에서는 덩치도 불리하고, 암컷과 교미가 급하고, 둥지 돌보기가 우선이니까 고지라와 전력으로 싸울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그래서 잠시 괴롭히다 기동력을 살려 달아났겠죠. 수컷이 적극적으로 싸움에 가담한 시기는 고지라가 둥지를 지키던 암컷을 공격한 이후입니다. 만약 고지라가 둥지를 찾지 못했거나 암컷에게 덤비지 않았다면, 수컷은 고지라를 그냥 놀리기만 했을 공산이 큽니다. 어차피 빠르게 날아다니면, 다리로 걷는 고지라는 쫓아오지 못하니까요. 죽을지 모르는데, 괜히 싸울 필요가 없죠.
고지라 입장에서는 꽤나 짜증나는 상황입니다. 영화 초반부에도 나오지만, 이 놈들은 기생 동물입니다. 고대에 죽은 고지라 골격에 알을 까고 방사능을 빨아먹으며 살았죠. 고지라한테 무토는 (자연의 균형이나 인류의 안전을 떠나서) 척살해야 할 기생충입니다. 당연히 사정만 허락한다면 방사열선을 뿜고 싶었겠죠. 문제는 이 놈이 계속 주변을 빙글빙글 날아다니며 회피한다는 겁니다. 방사열선을 충전하려면 시간이 걸리고, 그것도 계속 뿜을 수 없고, 근접해야 적중 확률도 높아집니다. 더군다나 주변에는 고지라와 높이가 비슷한 건물들도 많았습니다. 잘못하면 수컷 무토가 건물을 엄폐물 삼을 수도 있었죠. 맞춰서 쓰러뜨리면 좋겠지만, 괜히 뿜어봐야 무토가 회피할 거라고 판단했을 겁니다. 고지라와 수컷 무토는 이후 샌프란시스코에서 싸우는데, 이때도 방사열선을 뿜지 않습니다. 대신 비행 각도를 계산해 꼬리로 두들겨서 죽이죠. 애초에 방사열선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비행 괴수는 잽싸기 때문에 방사열선을 회피하기 십상이겠죠.]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고지라의 방사열선은 슬러그탄 산탄총과 비슷합니다. 그것도 자동 장전이 아니라 레버 액션처럼 느립니다. 그런 총기로 주변을 빠르게 날아다니는 제비를 사냥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쏴봤자 아까운 총알만 낭비할 겁니다. 어차피 완력은 이쪽이 우세하니, 육탄전으로 붙으면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고지라는 그래서 수컷 무토를 상대할 때, 아예 방사열선을 생각하지 않은 듯합니다. 대충 쏴서 맞으면 좋고, 안 맞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방사열선 충전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그 동안에 수컷 무토는 가만히 놀고만 있지 않겠죠. 고지라가 가만히 서있으면, 특유의 날렵한 기동으로 물고 뜯고 찌르며 괴롭혔을 겁니다. 어쩌면 중요 부위를 다쳤을지 몰라요. 고지라의 내구력은 대단하지만, 무토는 고지라의 피부를 할퀼 수 있는 괴수니까요. 접근해서 싸우면 유리한데, 괜히 방전한답시고 약점을 노출해 도리어 공격 당할 수 없잖아요.
참고로 원작 시리즈에 메가기루스라는 놈이 있습니다. 날아다니고, 민첩하고, 벌레처럼 생긴 것이 수컷 무토와 딱 어울리죠. 고지라가 이 놈과 싸울 때 방사열선 뿜느라 꽤나 고생합니다. 도무지 맞추질 못해서…. 게다가 방전한다고 잠깐 틈을 보였다가 독침에 찔리고, 땅에 엎어지고, 건물에 두들겨 맞고 장난 아니었죠. 나중에 방사열선으로 끝장내긴 하는데, 그 전에 육탄전으로 흠씬 패줘서 회피를 못하게 했습니다. 원작 고지라와 메가기루스도 이랬으니, 2014년 고지라와 수컷 무토도 비슷한 대결 구도였겠죠. 더군다나 무토는 수컷 말고 암컷도 있습니다. 암컷 무토와 싸우는 부분을 잘 보면, 고지라가 암컷을 바닥에 처박은 다음 숨을 깊이 들이마십니다. 어쩌면 이때 방사열선을 뿜으려고 했는지 모릅니다. 처음부터 뿜으면 암컷이 도망치거나 피할지 모르니까, 일단 두들겨 패놓고 끝장을 내겠다는 계획인 듯합니다. 문제는 곧장 수컷이 날아와 고지라를 끌고 가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는 겁니다. 이후로는 두 마리가 앞뒤에서 계속 공격하는데, 방전은 고사하고 방어할 틈조차 없었죠.
결론을 내리자면, 고지라는 기회만 있다면 어떻게든 방사열선을 뿜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접근하면 방전할 여유가 없어요. 수컷이 계속 날아다니며 귀찮게 하니까요. 그나마 암컷은 바닥에 패대기 치고 뿜으려고 했더니만, 금새 수컷이 날아와 방해합니다. 그 다음부터는 방어하기도 버거웠고요. 수컷이 없고 암컷이 제자리에 가만히 멈췄을 때 비로소 방전했죠. 그러니 방전할 여유만 있고, 상대 괴수가 가까이 있다면, 고지라는 얼마든지 화염을 뿜는다는 뜻입니다. 괜히 막판에 필살기로 폼 잡으려고 한 게 아니라, 작중 설정과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겁니다. 방사열선의 사정거리와 방전 시간을 이렇게 바꾼 이유는 좀 더 짐승다운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겠죠. 고지라는 고대 생태계의 상위 포식자이고, 호랑이나 불곰처럼 상대를 할퀴고 물어뜯는 육식동물처럼 보여야 할 테니까요.
[어쨌든 고지라의 상징과 전통을 지켜주니, 온몸이 짜릿했습니다.]
이와 별개로 방사열선의 위력이 너무 약한 게 아니냐는 의견도 있더군요. 하긴 그것도 무리는 아닐 겁니다. 고지라는 무토 두 마리한테 신나게 얻어맞다가 겨우 기회를 잡아 뿜었으니까요. 있는 힘을 끌어모아 쐈으니, 위력이 떨어질 만도 하겠죠. 실제로 수컷을 처치하고 나서 부서지는 건물에 깔려 움직이지 못하기도 했고요. 또는 방사능이 부족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방사능을 실컷 섭취한 무토와 달리 고지라는 심해에서 이제 막 깨어났습니다. 에너지가 부족해서 방사열선을 제대로 뿜지 못한 거죠. 원자력 공장이라도 습격하면 좋겠지만, 무토가 언제 알을 깔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습니다. 만약 새끼들이 태어나면 골치 아파지니까요. 제가 보기에 암컷 무토가 방사열선을 버틴 이유는 그냥 껍질이 단단해서 그런 듯합니다. 사실 원작에도 방사열선 몇 방에 죽지 않는 놈들은 많았습니다. 한방에 무조건 죽어야 한다는 법이 없어요. 무토 내구력이 고지라와 비슷하다고 가정하면, 방사열선을 버티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가설이고 추측일 뿐입니다. 제작진이 공식적으로 밝힌 내용은 아니에요. 하지만 작중 상황을 따져보면, 모순이나 오류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멋 부리는 연출이 아니라 작중 설정으로 받아들이는 게 옳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