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이 기사를 한번 보시고.
http://www.bloter.net/archives/209954
ilk61님께서 쓰신 PC 패키지 시장에 대한 얘기에서 저는 '불법 복제가 가장 큰 원인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라는 얘기를 한 바 있습니다.
국내 게임 시장이 초창기부터 불법 복제가 없었으면 PC 패키지 시장은 그 자체로 흥성했을 것이고, 주얼이나 부록까지 갈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지금의 온라인이나 모바일 게임이 그렇듯 일반 매출로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으니까, 부록/주얼 같은 떨이 상품을 만들 필요가 없고, 있다 하더라도 수준이나 규모가 그만큼 떨어지는 제품에 한하게 되죠. 국내에는 거의 소개도 되지 않는 일본의 저가 콘솔 게임처럼요.
이런 얘기 나오면 창세기전이라든가 기타 한국 게임들을 많이 거론하는데, '국산 게임'이 아니라 '한국 PC 패키지' 시장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과 온라인 등 새로운 플랫폼이 생기면서 PC 패키지 게임 (및 유사한 특성을 가진 콘솔 패키지 게임)은 더이상 게임 시장에서의 독점적인 지위를 가지지 못하고 위축 되었습니다. 이것 세계적인 흐름이고, 그로 인해 업종을 전환하거나 망해버린 회사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위축되고 많은 회사가 망했을 지언정, 시장 그 자체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지금 현 시점까지 꾸준히 패키지 게임은 제작되고 팔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한국만 유통망이 사라진 거죠. 국산 게임이든 외산 게임이든 간에 말입니다.
이유는 뭐 간단합니다. 외산이고 국산이고 게임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 안 팔렸거든요.
그럼 이게 다 불법 복제 때문이냐?
위 기사 링크의 표에서 한국의 불법복제 비율을 찾아보시면 의외의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오히려 불법 복제 비율이 낮은 편에 속하고, 소득 대비추세선으로 봐도 추세선 밑에 있습니다. 정품이 잘 팔리는 나라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에는 2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지표가 한국 게임이 고사했던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이 아니라 이미 패키지 게임 시장이 고사한 이후인 2013년 지표라는 것이고, 따라서 오락성이 아닌 업무용 소프트웨어가 국내 소프트웨어 시장의 대다수를 차지한다는 것, 그나마 있는 게임 시장의 경우는 스팀 등 온라인화 된 결제 시장 밖에 남지 않아서 복사 등의 불법적인 방법을 쓰기가 매우 곤란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패키지 게임 시장이 고사했던 90년대 후반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죠. 네, IMF 외환 위기입니다. 소득 수준과 불법 복제 비율이 반비례한다면, 가계 소득이 급락했던 그 시기에 '오락성'이라 필수품이 아닌 게임 시장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는 추측하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또 다른 하나는 추세선보다 극도로 위에 올라가 있는 베네수엘라나 대만, 쿠에이트, 카타르 같은 나라, 반대로 추세선보다 훨씬 밑에 있는 일본이나 미국 같은 나라들의 '변칙성'입니다. 이 변칙성은 추세선보다 2배 이상 차이나며, 특정 국가에 한해 세계적인 경향성을 완전히 무시하게 만들어 줍니다.
저는 이 변칙성이 주로 그 나라의 저작권 의식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는데, 이미 다른 게시물의 덧글에 달았듯이 우리나라에서 게임 시장이 태동한 '80~90년대는 관공서부터가 불법 복제를 태연히 저지르고 작가들이 해외 소설을 해적 번역해서 인세 받아 먹고 사는 사회였습니다. 사회 지도층이 이 정도인데, 일반 국민들이 공짜 복제 게임 놔두고 비싼 정품 게임을 사는 게 이상한 겁니다. 당시는 정품 게임을 사면 친구들 사이에서 '바보' 혹은 좋게 봐줘서 '괴짜' 취급을 당하던 시대였습니다. 국산 패키지 게임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창세기전이 판매량보다 버그 패치 다운로드량이 훨씬 많았다는 얘기는 유명하죠.
이렇게 낮은 소득 수준과 저작권 의식 결여가 결합되면 뭐가 나왔을까요? 당연히 만연한 불법 복제입니다. 저는 나름 게임 쪽 연관이 많은 학교와 지인을 가졌는데도 저 이외에 정품 게임을 산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습니다. 그나마 점심까지 굶어가며 게임을 샀던 저조차도 플레이한 게임의 90%는 불법 복제 게임이었습니다. 심지어 게임 소매점에서도 불법 복제품을 버젓이 팔았을 정도였죠. 그 당시, 다시 말해 90년대에 전체 '유통'되고 사람들이 플레이했던 게임의 최소한 99%는 불법 복제였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줌 밖에 안 되는 정품 시장이 인터넷 보급과 온라인 게임 대두 등 급격한 변화를 버티지 못하고 싹쓸이 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입니다. 사실 싹쓸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해요. 국내의 패키지 시장을 선도했던 회사들은 대부분 무사히 살아남거나 인수/합병되어 온라인 사업으로 돌아섰을 뿐이거든요.
이걸 두고 '불법 복제만 없었으면..'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돌이들의 자위행위 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조선시대에 왜 민주제 국가가 발생하지 못했냐는 말이나 같으니까요. 하지만 '불법 복제 때문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구멍 뚫린 배가 가라앉은 건 구멍으로 물이 들어왔기 때문이 아니고 승무원이 무능해서다.' 같은 억지일 뿐입니다.
한국 패키지 게임 시장이 망한 건 그냥 시대의 흐름이었고, 그 흐름을 역행할만한 영웅이 없었던 것 뿐입니다. 그게 다에요.
저같은 경우도 취직하고나서야 정품 사용비율이 급격히 올라갔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