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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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밤, 다쳐서 병원에 누워 있는 환자에게 남몰래 간호사가 다가갑니다.
홀로 병실에 누워 있는 환자에게 간호사가 와서 사랑한다고 온갖 말을 건네고,
환자는 자신에게 말로만이 아니라 온 몸으로 봉사해 마지 않는 간호사 덕분에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 괴롭기는 커녕 너무 좋아서 죽을 지경입니다.
매일밤 환자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간호사는 결국 자연의 섭리에 의해 임신하기 이르고..."
- 그냥 스토리만 보면 3류 에로 영화 줄거리가 연상되기 딱 좋죠.
그런데 이건 노벨문학상을 받은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초기 대표작 중 하나인
장편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의 메인 스토리 라인에 해당합니다.
흔히 클래식을 딱딱하고 어려운 물건으로 생각하는 선입관이 널리 존재하는데,
제 경험으로는 대부분의 고전이 당대의 베스트셀러였고 아주 잘 쓴 통속문학입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고전도 있지만, 대부분 그렇다는 이야기죠)
난데없이 야시꾸리한 이야기를 들고 나와 헤밍웨이 이야기를 한 것은...
1995년 <영원한 전쟁>이 번역되어 나온 후 조 홀드먼의 단행본이 거의 20 년 만에 번역소개되었는데,
그 책이 <헤밍웨이 위조사건>이라고 헤밍웨이 작품들을 제대로 알아야 읽을 수 있는 메타픽션입니다.
SF 판에서 메타픽션을 매우 노골적으로 지향하는 작품이 한국에 출간된 것은...
대략 <제인에어 납치사건> 시리즈 이후 10 여 년 만이기도 합니다.
고전에 대한 오마주성으로 쓰여진 SF는 댄 시몬즈의 <일리움> 연작, <하이페리온> 연작,
알프레드 베스터의 <타이거 타이거>, 발라드의 <크리스탈 월드>를 비롯해서 은근히 꽤 있습니다.
이런 작품은 원전에 해당하는 고전을 어느 정도 미리 읽어두고 시작해야 참 맛을 느낄 수 있고,
그런 이유로 이런 책들은 독자들 입장에서 얼마간 진입장벽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 홀드먼의 <헤밍웨이 위조사건> 역시 마찬가지이고,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며 교수 노릇을 오래 한 작가가
자신의 강단에서의 경험과 클래식 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조예를 SF로 풀어낸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는 근본적으로 읽기 어려운 작가가 아니죠.
읽기 어렵기는 커녕 기자 출신답게 딱딱 끊어지는 단문 위주의 잘 읽히는 문장을 구사하고,
내용 역시 매우 통속적인 멜로물을 지향하고 있으며 성에 대한 묘사도 꽤 자유분방합니다.
다시 말해 헤밍웨이 작품이 어려워서 못 읽었다는 이야기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그냥 무관심한 거죠.
[결론]
조 홀드먼의 책이 20 년 만에 번역되어 나왔습니다. 우리 모두 기쁜 마음으로 사서 봅시다.
헤밍웨이 작품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진입장벽이 존재하나, 헤밍웨이는 읽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 증거를 이 글 도입부에 부러 남겨둡니다.
젤라즈니가 쓴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도 비슷한 면모가 있죠. 헤밍웨이가 쓴 <짧지만 행복한 순간>과 멜빌의 <모비 딕>을 짬뽕했다고 해야 하나. 젤라즈니 본인 의도는 모르겠지만, 대체적인 평가는 그렇더군요. 그리고 보면, SF는 이런 부류의 소설을 꾸미기에 좋은 듯합니다. 기존 이야기에 과학 설정을 덧붙이면 되니까요.
헤밍웨이 자신은 꽤 마초적이라서 심심하고 딱딱한 내용은 별로 안 쓰죠. 오히려 거친 야수들과 대결하거나 광포하게 살아가는 내용이 흔합니다. <짧지만 행복한 순간>도 사자가 나오고, <킬리만자로의 표범>도 생존물이고, <노인과 바다>도 커다란 새치랑 씨름하고…. 적어도 장광설이나 설교조로 빠지지 않아서 좋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