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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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군] 밤이면 언제나 아름다운 인생을 꿈꾼다. 사랑하고픈 사람과 별을 바라다 보고 싶을때 비오는날 우산들이 공허하게 스쳐갈 때 노래부르는 물고기가 되고 싶고 날개달려 하늘을 날고싶다. 아침의 차가운 바닥에서 눈을돌려 회색의 도시라도 사람의 모습을 느껴본다 부디 꿈이여 날 떠나지 마소서... [까마귀양] 고통은 해과 함께 서려가고 한은 갑갑하메 풀 길이 없네 꿈은 해와 함께 즈려가고 삶과 함께 흩어지네 나의 꿈이여 나의 미래여 나의 길을 밝혀 밤의 끝을 보내길....
전 판타지가 현실에 대한 은유이며,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현실에서는 쉽사리 잊혀지기도 하는 보편적인 미덕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거쳐 빛을 발한다는데 있다고 믿고 있어서, 상당수 양판소는 그냥 현실도피 수준이라고 보는데, 본문을 읽고 생각하니 그마저도 더 안습이군요.
양판소를 안 봐서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만. 대략 두 가지 원인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선 분노하는 목소리를 내기 쉽다는 점이죠. 멀쩡한 개인도 주변 분위기에 휩쓸릴 우려가 높아요. 요즘에는 커뮤니티가 워낙 발달해서 어디나 쉽게 모이고, 그렇다 보니 열을 내기도 간단합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싸우는 중일 걸요. 토해낼 곳이 천지니까 자연스레 악이 쏟아집니다. 양판소는 문학이라는 유형을 취했을 뿐, 비슷한 무형의 분노글은 많다고 봐요.
그러면 뭐에 대한 분노냐 하면…. 소위 높은 양반들이 인명을 물건 취급하니까 반발하는 시각이 생긴 게 아닐지? 디스토피아 문학에서 권력자와 대기업을 악당으로 묘사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죠. 청소년이라고 해서 보는 눈이 없지 않으니까요. 자기들 눈에도 사람을 갈아먹고 성장하는 사회가 곱게 보이지 않겠죠. 학교는 사회의 축소판이니까. 자신이 사람 취급을 못 받고 미래가 불안정하니까 분노가 튀어나오는 게 당연하겠죠.
결국 사회 분위기가 유하게 바뀌고, 그게 학교까지 영향을 미쳐야 한다는 교과서적인 결론이 나오는군요. 그런데 교과서적인 대책은 대개 실천하기가 어렵죠. 자라나는 학생까지 돈벌이로 보는 자들이 기득권을 쥐면 더욱 그럴 테고.
분노는 때론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죠. 올바른 방향으로 표출되어 긍정적인 행동을 유도한다면 말이죠. 하지만 억압에 대한 분노가 스스로 억압자가 됨으로서 푸는 것이라면 이건 죄악의 연쇄입니다. 그리 긍정적인 일이 아니죠. 게다가 스스로 이것이 나쁘다는걸 인식하지 못하면 이걸 정상적이라고 보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양판소가 딱 이렇습니다. 교사나 학생의 위압, 폭력, 범죄에 무방비하게 노출되고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학생들을 전 동정합니다. 그건 저도 그랬으니까요. 문제는 심리적 판타지로서 자신이 당한 부도덕한 만행을 스스로 남에게 행하는 것이고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점입니다(이쯤되면 이미 질병입니다). 정치인이나 일부(?) 개신교 목사들이 행하고 강단에서 말하는 것을 싫어하면서 정작 자신에게 힘이 생기면 그들과 같은 만행을 저지르며 온갖 미사여구와 자기합리화로 그것을 긍정합니다. 부도덕을 긍정하고, 힘을 얻는것 자체가 미덕이고 행복이라는 비틀리고 병든 가치가 양판소의 새벽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양판소의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뻔히 보여 괴롭습니다.
다르게 보면 딱 우리나라의 상황이 그렇습니다. 옛날 정부와 기관에 맞서 싸우며 억압받고 체포 당하면서도 꿋꿋하던 이들이 지금은 그 권력의 중추에 서거나 중추에 들어가기 위해 지난날을 모두 부정하는 일을 하며 권력을 휘두르죠. 정치권은 불과 몇개월전에 했던 자신의 발언도 부정하고 권력의 중추에 선 자들은 범행을 저질러도 순식간에 유야무야 됩니다. 최근의 비극은 차치하더라도 요 10여년 동안 계속 이어지던 일이었고 그 전에도 다른건 없었죠. 그리고 사회는 개인에게 사회의 부품이 되어 경쟁하고 닳으라고 끊임 없이 주문합니다. 이건 학생들이나 젊은 세대에게 더하죠. 힘이 없는 세대, 힘이 없는 아이들이 생각하는 거야 뻔하잖아요. 나라 전체가 부도덕함에 매몰되어 있는데 젊은 세대에게 도덕을 설파해서야 아무런 설득력이 없죠.
요즘 국내 판타지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청소년 문제라기 보다 저질문화상품의 문제가 아닌가 싶네요.
판타지의 불쏘시개화는 통신소설, 인터넷소설 시대로 들어서면서 작가입문이 쉬워진 이후 심화되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작가와 독자의 수준차가 줄어들면서 점차 심해졌다고 볼수 있습니다.
저런 소위 불쏘시개를 주로 소비하는 독자의 수준이 높다고 보기 힘들고 작가도 매출을 위해 그 수준에 맞추고 있다 아니면 본래 그 수준이다라고 하면 저런식으로 돌고도는 결과는 피할수 없겠죠.
밖에서 관찰하는 사람이야 저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게 안타깝겠지만 어느쪽도 굳이 수준을 올릴 필요를 못느낀다고 봐야죠.
그거 소비 하는 사람들도 다 그게 불쏘시개인거 알고 소비하는 겁니다.
"게임은 폭력적이므로 아이들이 게임을 하는 것은 폭력을 조장하는 것이다"라는 말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사실, 주인공의 깽판이 곧 정의인 것은 상당히 오래된 고전적인 전개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은 그것을 그다지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애초에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져있고 어지간히 스스로를 돌아보고 하지 않으면 그와 똑같은 행동을 하곤 하거든요.
자신에게 '정의'나 '대의'가 있으면 그것에 불복하거나 거스르는 이를 어떤 수단으로 처단하더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이고 되려 이러한 플롯이나 정의관에 의문이 던져지고 이가 문학 등에서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 더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고전적인 '선악'구도는 절대적인 선과 악을 기반으로 하고 있고 그러한 '절대성'에 의해 보호받으니까요.
때로는 종교가, 때로는 정치나 사상이 그들의 행동에 '절대적 선'을 부여하고, 문학 속 주인공은 더더욱 그러한 절대성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기가 좋죠. 스포트라이트는 주인공에게 비추니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왜 오크가 아닌 인간을 도와야 하는가' 되묻는 이루릴의 물음 전까지는 '엘프는 인간을 돕는게 당연하잖아?'라는 후치의 물음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런 것은 사실 정상이거나 비정상의 영역도 아닙니다.
바로 앞의 사람이 바뀌어도 인지하지 못하고 영화관 앞자리에서 사람이 칼에 찔려 죽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인데 이러한 심리적 맹점이나 확증편향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를 떠나서 정상범위죠.
실제로 많은 액션영화나 고전히어로들이 의심없이 폭력으로 정의를 행하고, 대부분의 관객들은 의심없이 받아들입니다.
이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일련의 흐름이 비교적 일반적인 것이 된 지금에도 많은 사람들은 주인공의 폭력과 압제에 의문을 던질만한 꺼리가 있다는 것 자체를 모르거나 인식하지 못하고, 의문을 던지는 흐름이나 사유를 다수 접하고 충분히 아는 사람들도 막상 컨텐츠를 보는 과정에서는 잊고 빠져들고는 하죠.
양판소의 단순하고 말초적인 선악구조와 그 속에 잠재된 모순점은 이 사회의 심리병증을 보여준다기에는 그냥 너무나 말초적이고 인간적인 형태가 아닌가 합니다.
...게다가 양판소, 그 중에서 crowfish님이 가장 중점적으로 포커스를 맞추고 계신 이고깽물의 경우에는 요즘은 어떤지 몰라도 이전에는 그 창작자 자체도 학생이거나 학생을 갓 벗어나는 사람들이었고 전반적인 독자층도 그랬습니다.
이유가 있거나 혹은 없어도 기성세대를 비판하고 기존의 룰에 의문을 던지며 이유없이 반항하기도 하는 시기에 만들어지고 그런 시기의 이들에게 읽히기를 겨냥한 컨텐츠로 그 속에 나타난 것은 그 세대/그 연배가 가지는 다소 고리타분할 정도의 정신세계가 아닌가 합니다.
저는 양판소도 계속 챙겨보는 입장인데요, 어떤 양판소를 보고 계신건지 궁금합니다. 요즘 트렌드에서 많이 벗어난거 같은데..
아무튼 제가 가지는 양판소에 대한 입장은 이렇습니다.
1. 대중문화의 근원은 결국 대리만족이다. 그것이 발전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할지라도 그 토대는 결국은 대리만족이다.
2. 이른바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초기에는 모두 가치가 없다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쓰레기통에서 장미는 피어나지 않아도, 무가치성의 풀에서는 유의미한 가치가 탄생하더라, 종종.
3. 의외로 양판소도 소재를 자체부터 시작해 그 소재 내에서의 진화가 눈에 보인다. 흥미로울 정도로.
4. "SF의 90%는 쓰레기다. 그러나 모든것의 90%는 쓰레기다"라는 시어도어 스터젼의 제언은 양판소에서도 해당된다.
5-1. 양판소만큼 시장논리에 철저한 바닥도 없다. 그래서 늘 '대세'가 되는 장르가 있다. 90년대 3권짜리 무협으로 시작해서 드래곤물, 이고깽물~근래의 환생물,리셋물, 현대물 등.
5-2. 1을 참조하여 양판소는 해당 독자층이 가장 읽고 싶어하는 내용을 즉각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5-3. 따라서 5-1,5-2를 참조하면 변해가는 트렌드를 통해 당대 사회의 욕망의 일편을 바라볼 수 있는 사회학적 가치가 있는 자료로도 사용해볼 수 있을지 않을까 싶다.
6. 그러나 양판소를 볼때는 늘 조심해야한다. 자신이 어지간한 마공서에 익숙해져있다고 해도 늘 상상 그 이상의 마공서는 튀어나오기 마련이며 자칫해 주화입마를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자기합리화라도 하는게 어딥니까. 주체적인 악인조차 될 수 없다는건 그나마 다행일까요?
이런 욕망이야 억압되고 비사회화된 세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문제는 이런 세력이 하나의 거대한 소비 주체가 될 정도로 커졌다는거겠죠? 아님 넷의 발달로 흩뿌려 져있던
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거나.
모든 SF의 90%는 쓰레기이고, 모든 것의 90%는 쓰레기이지만.... 양판소의 99.999%는 쓰레기다...라는 결과가 되는 것은 그것이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닌 시간 죽이기를 위한 환경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한번 양판소 중에서 괜찮은 작품을 찾아보려고 꽤 많이 뒤져본 일이 있지만, 짚 속에서 바늘 찾기라는 것을 느끼고 관두었습니다...)
정상적으로 책을 구매해서 보는 서점 시장이 아니라, 사실상 무료로 책을 빌려보는 대여점 시장. 그리고 공짜로 -그것도 집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보게되는 컴퓨터 환경에서의 독서라는 것은 작품에 대한 평가를 쉽게 내리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더욱이 '시간 때우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상황에서는 깊이있게 볼 수 있는 작품이 도리어 저평가를 받는 경향이 더 많다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시장층 자체가 다르다고 해야 겠군요.
양판소라 불리는 많은 작품은 대리 만족을 표방하고 있으며, 과거 대본소 시절의 양산형 무협지와 유사한 경향을 가집니다.(당시 어떤 작가는 "1질의 작품을 쓰는데, '자그마치' 보름이나 걸렸다"라면서 참 오래 노력했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요.) 쉽게 만들어지고 쉽게 소비됩니다. 그만큼 깊이를 기대할 수도 없고, 기대해서도 안 되겠지요.
추신) 양판소라고 불리는 작품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사실 독자들의 '수요(바램)'에 의존하고 있지 않습니다. 출판사의 사정이라고 할까... 여하튼 수량만큼 뽑아내야 하는 환경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작품의 품질이라는 것은 사실 그렇게까지 중요한게 아니지요....
모... 이런 싸움 야메룽다!
라는 대사가 유명한 자기 합리화가 죽여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