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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50점 정도를 배분해 다양한 행동을 취하는 고전 엑스컴.]



요즘 인디 게임에서 킥스타터 프로젝트가 활발합니다. 주로 전략이나 롤플레잉 같은 장르가 많이 나오더군요. 여기서 불거지는 논쟁 중 하나가 전투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겁니다. 대개 실시간 정지와 턴 방식으로 선호가 갈립니다. 매끄럽고 빠른 흐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실시간 정지, 섬세하고 체계적인 진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턴 방식의 편을 들죠. <웨이스트랜드 2>도 그렇고, <필라스 오브 이터니티>도 비슷한 진통을 겪었습니다. <타이즈 오브 누메네라>도 마찬가지고, <신디케이트>를 계승했다는 <새털라이트 레인>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실시간 정지로 만들려는 제작진이 턴 방식 유저들을 설득하는 글도 올라오고요.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는데, 골수 유저들은 역시 턴 방식을 좋아하나 봅니다. 다수 캐릭터를 전술적으로 다루는 건 실시간 정지도 턴 방식과 같습니다. 하지만 몇 수 앞을 내다봐야 하는 턴 방식이 더욱 전술적으로 보이나 봐요.



사실 턴 방식도 종류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특히 캐릭터 행동을 어떻게 제한하는가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죠. 점수 방식과 액션 방식이 그겁니다. 두 종류를 잠깐 설명하자면, 점수 방식은 일정한 점수 내에서 움직이는 방법입니다. 흔히 액션 포인트라고 하죠. 가령, 액션 포인트가 10점 있다고 합시다. 무슨 행동을 하든 10점 안에서 활동하면 그만입니다. 예를 들어 3칸 이동해서 3점, 적에게 사격해서 3점, 엄폐해서 2점, 경계해서 2점을 쓰는 식입니다. 수류탄을 던져서 3점, 뒤로 5칸 도망쳐서 5점, 엄폐해서 2점을 쓸 수도 있죠. 여기서 복잡하게 더 들어가기도 합니다. 남겨놓은 액션 포인트를 상대 차례에 써먹을 수 있거든요. 가령, 경계한 채로 3점을 남기고 차례를 마친다고 하죠. 그러면 상대편이 시야에 들어왔을 때 3점을 소비해서 먼저 사격하거나 명중률을 높이기도 합니다. 자기 차례만 아니라 상대편 차례에 움직이는 것도 계산해야죠.



점수 방식은 고전적인 <스페이스 헐크>부터 <재기드 얼라이언스>와 <폴아웃> 시리즈를 거쳐 최근의 <웨이스트랜드 2>도 과거 방식을 계승했습니다. 겨우 4점 가지고 굴려먹는 것부터 50점으로 필드를 누비는 것까지 범위도 광대해요. 이와 달리 액션 방식은 캐릭터에게 두어 가지 행동할 기회만 줍니다. 점수에 상관없이 행동만 하면 차례가 끝나요. 이런 ‘행동’은 두 단계로 나누는데, 첫째가 이동이고, 둘째가 기술 사용입니다. 그러니까 캐릭터가 몇 칸 이동해서 공격하고, 몇 칸 이동해서 치료하고, 몇 칸 이동해서 엄폐하고….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싸웁니다. 때로는 두 단계를 전부 이동이나 기술 사용에 소비할 때도 있습니다. 특정 경우를 빼면, 여기서 벗어나는 행동은 불가능합니다. 선제 공격하고 뒤로 내빼거나, 일단 엄폐해서 후일을 도모하는 플레이는 성립하지 않아요. 따라서 무작정 공격할 게 아니라 이동한 다음 무슨 기술을 생각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우리편 공격이 실패하면, 적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가서 도망치지도 못하고 두들겨 맞을 테니까요. 액션 방식을 차용한 사례는 <던전스 앤 드래곤스>부터 <마이트 앤 매직>, <에이지 오브 원더스>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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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과 기술 사용, 두 가지 액션으로 단순해진 리메이크 엑스컴.]



턴 방식의 대표주자인 <엑스컴> 시리즈는 이 두 가지 방식이 모두 존재합니다. 과거 시리즈였던 3부작은 점수 방식(타임 유닛)이며, 새로운 시리즈인 <에너미 언노운>은 액션 방식(2단계)이죠. 그러니까 <테러 프롬 더 딥> 같은 경우, 50점 내외의 점수로 유닛을 조종했습니다. 이동하고, 사격하고, 수류탄 던지고, 자리에 앉고, 도망가고 등등 별의별 행동을 다했습니다. 점수를 일부분 남겨놓으면, 자기 차례가 아니라도 시야에 들어온 외계인을 공격할 수도 있었죠. 반면, <에너미 언노운>은 점수가 사라지고, 행동이 두 단계로 나뉩니다. 이동+기술 사용이죠. 그래서 엑스컴 대원이 슬금슬금 접근하고, 사방을 살피고, 수류탄 까놓고, 아군이 엄호하는 후방으로 뺑소니치는 식의 플레이는 어렵습니다. 자기 차례에 취할 수 있는 움직임이 상당히 단순해졌죠. 일부 병과는 특성을 찍어서 변칙적으로 움직일 수 있지만, 전반적으로 단순해진 게 사실입니다. 이동+기술 사용, 이동+이동, 기술+기술 등으로 액션 방식이 3가지로 고정된 셈입니다.



두 방식은 각자 장단점이 있습니다. 전투 자체를 중시하는 게임은 점수 방식이 알맞습니다. 비록 4점 밖에 안 되는 <스페이스 헐크> 같은 것도 캐릭터가 다양하게 행동할 수 있으니까요. 액션 방식은 경우의 수가 너무 적어서 다채로운 전술을 짜기 힘듭니다. 반면, 전투 말고 할 것이 많은 게임은 액션 방식이 나을 수도 있겠죠. 경영이나 탐험, 대화, 퍼즐 등의 요소가 들어간 게임은 점수까지 고려할 경우 너무 산만해질 우려가 생겨요. 혹여 계산이 너무 복잡해지는 게임도 그렇고요. <던전스 앤 드래곤스>가 점수제라고 생각해 보세요. 가뜩이나 캐릭터 시트에 쓰고 지울 것도 많은데, 액션 포인트까지 계산하려면 번거로울 겁니다. 그만큼 커다란 던전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수고도 두 배로 들어가죠. <문명>처럼 전투 외에도 할 게 많은 게임은 점수제가 어울리지 않습니다. 발전, 연구, 생산, 외교에 신경쓰기도 바쁜데, 언제 유닛 점수를 시시콜콜 따지겠어요. 승리하는 방법이 정복만 있는 것도 아니니, 전투 위주 게임도 아니고요.



<엑스컴> 시리즈는 계산이 복잡한 테이블 놀이도 아니고, 승리 방식이 여러 가지인 것도 아닙니다. 외계인과의 지상전이 중심인 전술 게임입니다. 당연히 점수 방식을 쓰는 게 맞는다고 봐요. 정신적 후계작인 <제노너츠> 같은 물건이 여전히 점수제인 것도 그 때문이고요. <에너미 언노운>이 전작과 달리 액션 방식을 채택한 이유는 뻔합니다. 보다 가볍게 즐기고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서죠. 캐릭터 상태를 막대 그래프로 쳐다보는 건 라이트 유저에게 부담이 심할 테니까요. 50점이나 되는 점수를 어디에 어떻게 배분할지, 몇 점이나 남겨야 뒷일을 감당할지, 커다란 지역을 언제 돌아다닐지 고민하는 것도 골치 아플 테고요. 그래서 무조건 이동 아니면 기술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만 남겼습니다. 그럼에도 유기적인 전술 플레이가 가능하다는 점이 대단합니다만. 가끔 타임 유닛이나 액션 포인트였어도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50점이 너무 부담이라면, 10점 정도로 줄여도 되잖아요.



물론 <에너미 언노운>이 타임 유닛 기반이었다면, 얼마나 대중성이 있었을지 장담 못합니다. 전투 몇 번 해보고 접는 사람들이 수두룩했을지 몰라요. 결국 다른 사례가 그렇듯 대중성과 매니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문제인데…. 뭐가 옳을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킥스타터 전술/롤플레잉 게임을 보니, 문득 생각나서 몇 자 적어봤습니다. 유저 후원금으로 만드는 킥스타터에서도 비슷한 논쟁이 벌어지는 만큼, 대형 게임은 말할 나위도 없을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