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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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썼던 얘기를 제목과 본문 그대로 가져옵니다. 애착. 이 감정이 있으니까 어제 있었던 강좌에서 배우면서 느낀 감정을 여기에도 알립니다.
어제 오후에는 전라북도 도청에 찾아갔습니다. 이번주부터 화요일 저녁마다 하는 시민인문강좌. 여기에 참가 신청을 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2014년 인문독서아카메디 : 인문학으로 생각넓히기Ⅳ - 한국 상고문화를 통한 '한문화'이해 -'입니다. 이번 강좌의 주제를 짙게 강조합니다. 그러면서, 이번 강좌에서 무엇을 배웠으며 그 순간에 들었던 생각과 감정을 되돌아봅니다.
史. 역사(歷史)에 쓰이는 이 한자가 원래는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깨달았습니다. 그 순간 제가 활쏘기에 몸담은 사람이니까 남다르게 느겼습니다. 역사를 설명하면서 사(史)를 알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이 한자가 갑골문, 금문, 소전(체), 번체 순으로 어떻게 바꿨는지부터 보았습니다. 갑골문에 나타난 부분을 설명했을 때 중(中) 부분을 손으로 잡는 것으로 들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적었을까. 쓰면서 이런 걱정을 합니다.
'史' 자가 시대에 따라 바뀐 과정을 살피면서 허신의 설문해자에 나타난 부분을 인용하셨습니다. 원전에 쓰인 부분이 이러합니다.
史記事者也。 从又侍中。中正也。
'사(史)는 기록하는 사람이다. 손(又)으로 中을 잡고 있으며 中은 바른 것이 다'. 제가 이렇게 풀어내면서, 강좌를 맡으신 분께서 설문해자 중에서 가장 난해한 해석으로 얘기하신 점을 기억합니다. 中이 무엇을 나타내며 이를 손으로 잡아야 했던가. 여기에 궁금하다가 청대에 나타난 고증학자가 풀어낸 해석이 이러했다는 점을 아니까 크게 깨달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사(史)가 은,주 시대에 행했던 대사례(大 射禮)에서 '화살이 과녁에 맞은 수를 기록했던 사람'입니다. 제가 앞서 얘기한 대로 활쏘기에 몸담은 사람이니까 여기에 깃든 의미를 남다르게 받아들였습니다. 궁도대회에서 명중한 숫자가 정확하게 기록해야 마땅하다는 점을 알기 때문입니다. 고대 시대부터 엄정하게 기록해야 했던 전통을 아니까 활쏘기를 더욱 중시합니다. '민족 고유'에 머물지 않고 '세계 보편'이다는 생각을 깊게 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의 활쏘기가 세계 표준이 되면 아주 좋다는 바람을 내비치면서 말입니다.
영사기에 나타난 조선 영조 임금께서 주관하신 대사례를 표현한 그림을 보면서 과녁 근처에서 화살이 명중한 갯수를 세는 이가 어디에 있는 지를 보았습니다. 여기에서는 그림을 올리지 않아 쉽게 설명할 수 없지만요. 공책에 쓴 부분을 보니 은,주가 종법적 봉건제를 유지하려고 왕(王)이 주관한 행사 중에서 으뜸이자 처음으로 하는 행사가 종묘(宗廟)이며 다음이 대사례입니다. 종묘는 명절에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경우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라며 간단히 넘어갑니다. 다음 행사인 대사례를 자세히 설명해야 해서요.
대사례가 사(史)를 맡은 사람이 판정을 정확하게 해야할 정도로 중요했습니다. 제후가 전쟁을 제대로 준비하는가를 측정했기 때문입니다. 강좌에서는 대사례에서 어느 제후가 성적이 시원치 않게 나올 경우에는 해당 제후를 다른 사람으로 교체했습니다. 사가 말직이어도 제후의 자리까지 바꿀 정도로 중요했으며 나아가 제후와 왕의 행적을 기록하는 이를 의미했습니다. 아. 사(史)가 과녁에 맞은 화살 갯수를 어떻게 재었는지를 알립니다. 젓가락통(中)을 가지고 화살 적중수를 재었습니다. 화살이 과녁에 맞을 때마다 통 안에 나무 젓가락 같은 것을 넣었는데 거기에서 사(史)가 나왔습니다. 이 견해가 청대의 고증학자가 깊게 연구하며 주장했을 테니 신뢰해 봅니다.
대사례에서 사가 유래했다는 내용을 알면서 중국에서는 정확하게 기록하는 일을 중시한 근원이 무엇인지도 깨달았습니다. 중국인한테는 사후 세계관이 없었다고 합니다. 불교가 들어오기 전까지요. 여기에는 완전히 믿지 않지만, 중원에 살았던 고대인이 역사를 통해서 후손이 영원히 기억하기를 바랬으며 이 방법을 통해 영 원을 누리려고 했다는 점은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마천이 집필한 사기를 보면서 역사를 정확하게 기록하고자 했던 노력이 어디에서 근원을 두는가. 사마천 개인 뿐만 아니라 중원에 살았던 고대인이 품었던 열망까지 헤아렸으니 남다르게 느낍니다. 그래서 여기부터 적으며 알립니다.
대사례를 둘러싼 부분. 여기를 너무 길게 썼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부분을 간략하게 적고자 합니다.
그리오(Griot). 강좌에서 알렉스 헤일리가 집팔한 뿌리(Root)가 나온 모습을 보면서 이 구전 역사가를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부족의 역사를 깡그리 외어 전하는 설명에 경이로웠습니다. 알렉스 헤일리가 자신이 입수한 자료를 통해 7대 조상이 살았을 주푸레(Juffure) 마을에 찾아갔으며 그 마을에 있는 그리오가 알린 전승이 7대 조상이 노예로 잡힌 과정과 일치하다는 순간. 거기에서 인간이야 말로 가장 경이로운 존재로 느꼈습니다. 여기에 느낀 감정이 강렬해서 전라북도문화회관 도서관에서 '뿌리'를 빌렸습니다. 다른 도서관과 다르게 평일에는 오후 10시까지 도서관에 있는 열람실에 책을 보면서 빌릴 수 있는 사항을 익히 알았으니까요.
인류가 탄생하고 진화한 과정. 여기에는 제가 모르거나 알면서도 소홀히 했던 부분이 많았습니다. 일일이 적으면 밤샐 것 같으니 꼭 알릴 부분만 알립니다. 다양한 복원도와 여러 도표를 보면서 과학은 소중하다고 느낍니다. 다른 가설이 나타나 어느 가설이 틀리면 이를 인정하고 다른 가설을 채택하니까요. 기존 학설은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호모 사피엔스) 사이에 현생 인류와는 관련이 없었습니다. 이 두 사이에 나타난 자손은 대를 이을 수 없으니까요. 그런데 최근에 미국 하버드 의대와 워싱턴 대학교가 공동연구를 하면서 제시한 가설에서는 네안데르탈인도 현생인류의 조상으로 나옵니다. 어린 네안데르탈인의 얼굴을 복원한 그림을 보는 순간 백인처럼 보이니까 최근 가설이 타당하다고 느꼈습니다. 잘못됬으면 이를 인정하고 다른 길로 앞으로 나간다.과학에 있는 매력이 이렇다고 느낍니다. 이 부분만으로도 길게 쓰니까 다른 사항을 생략합니다.
그럼에도 이번에 쓰는 얘기에 꼭 알릴 분이 있습니다. 조용진 교수입니다. 강좌에서는 얼굴복원으로 우리나라에서 제일 가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께서 광개토대왕 동상에 쓸 얼굴을 복원하는 과정에 나타난 성의를 아니까 절로 고개를 숙입니다. 만주 길림, 강원도 횡성, 전라북도 익산, 일본 고마신사. 여러 곳에 직접 찾아가시면서 광개토대왕의 후손에 나타난 얼굴을 자세히 살피면서 복원하셨습니다. 익산에 찾아왔을 때에는 학생 200명을 무작위로 찾아내서 일일이 촬영하신 설명에서는 감탄했습니다. 이렇게까지 극진히 노력하시니까 존경받는 사람이 되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으며 잊지않기 위해서라도 여기에 알립니다.
동아시아의 언어문자체계를 다룬 점에서도 확실하게 알릴 부분이 있습니다. 고립어, 고착어, 굴절어. 언어에 나타난 이 세 분류는 생략합니다. 다른 분이 쓰신 글이 훨씬 알기 쉬우니까요.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에서 문자를 나누는 상황은 얘기가 다릅니다. 크게 표의문자권과 표음문자권으로 나눴습니다. 표의문자권은 한자이며, 표음문자권은 여러 문자입니다. 문자(나라). 이런 순서로 다음 문단에 열거합니다.
라닌 산스크리트어(인도), 티벳문자(티벳 : 660년 손찬감포), 거란문자(요), 여진문자(금), 향찰(고려), 가나(일본), 위구르문자(몽골 제국), 티벳 문자를 토대로 만든 파스파 문자(원나라), 훈민정음(조선), 만주문자(청).
서하 문자가 빠진 점이 아쉽긴 합니다. 한자와 대비되는 표음문자를 만들어낸 과정을 설명한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도록 주도한 이가 신 왕조를 창시하거나 왕조 체계를 정비하신 군주입니다. 손찬감포는 티벳 고원으로 일컫는 설역(雪域)을 통일하면서 뛰어난 학자로 하여금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냈으며, 야율 아보기, 완예 아구다,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는 나라를 세우면서 문자를 창제하도록 지원했습니다. 세종 임금처럼 군주가 문자를 직접 창제하기에는 너무나 바쁜데다 학식이 깊지 않다고 판단하면서요. 이렇게 쓰니 세종 임금이 '좋은 의미'로 대마왕이다는 생각을 내비칩니다. 파스파 문자는 티벳 승려인 파스파가 원나라를 세운 쿠빌라이 칸의 전폭적일 지원을 받으며 창제했다는 점을 깜빡할 뻔 했습니다.
신 왕조를 창립하면서 신 문자를 창제한 목적. 여기에는 공책에 기록하지 않아 난처하지만 적습니다. 새로운 문자를 만들어 내서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양성한다. 강좌에서는 이런 내용으로 나왔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목적이 성공한 경우보다 실패한 경우가 많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도와 티벳은 넘어가더라도 한자의 영향력이 강했던 중원과 우리나라에서는 새로운 문자를 창제하도록 했던 군주가 바라는 대로 되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세종 임금이 창제하신 훈민정음도 오랫동안 묻혔다가 주시경 선생을 비롯한 선각자 덕분에 발굴되었다는 인식을 적습니다. 잘못된 인식인가. 제가 방금 쓴 생각을 이렇게 고민합니다.
첫강좌가 끝나는 무렵에는 공책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吾 : '피와 얼에 스민 흔적' 이를 알아내는 과업이 역사다.>
<> 괄호에 나타난 문장이 이번 강좌에서 배우고 느낀 점을 정리합니다. 얼굴과 유전자에서 나타난 단서를 피. 언어와 거기에 스민 관념을 얼. 이렇게 비유하면서 제 자신과 저를 둘러싼 관계와 배경을 알아내는 일이 역사처럼 중요하다고 느낍니다. 이러니까 자기 전에 블로그에 적습니다. 돌에 문자를 새긴 일처럼 잊지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 우리가 여기서 어떠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아는 그대여, 그대의 기도 속에서 우리를 잊지 마오.>
- 출처 : 듄 우리말 번역본(출판사 : 황금가지) 제 1권 1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