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여러분, 오늘 수업은 미리 예고한 대로 악마와의 대담으로 하겠어요. 이차원 생물사회학 학점을 이수할 사람은 오늘 수업을 좀 더 신경써서 듣도록 하세요. 악마와 계약한 사람은 있지만 악마와 직접 접촉하는 건 전문 연구가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오늘 수업을 위해 악마와 계약하신 현직 변호사 강모씨를 모셨습니다. 박수! 자. 그럼 강변호사님 악마를 불러주시겠습니까."
교수는 깡마르고 안경을 쓴 말쑥한 남자를 소개했다. 남자는 교탁으로 다가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자신을 소개했다.
"네. 소개받은 강변호사입니다. 후배 여러분들과 한 자리에 서게 되니 옛날 학창시절이 생각나는군요. 저도 이 학교 출신이거든요. 한가지 주의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악마를 불러내지만 그게 악마가 육체로 현신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보다는 강림에 가깝죠. 뿔이 나거나 하지는 않지만 매력과 지력이 치명적으로 상승하니까 여학생들은 유혹당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십시오. 그럼 시작합니다. 으어어!!"
남자는 눈을 부릅뜨고는 잠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흘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인간계인가.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요즘 법조계가 불황이라곤 하지만 악마팔이까지 해가면서 먹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 정말 악마의 자존감에 상처받는단 말이야. 어쨌든 계약은 계약이니까. 계약을 지켜야지. 악마보다 더 악마같은 변호사놈들 단서조항이 왜 이리 애매한 거냐. 거기 너. 그래. 악마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지적받은 학생은 깜짝 놀라 움찔하더니 악마의 시선을 피하려 했지만 악마의 지적은 집요했다.
"천사의 반대인가요?"
"땡! F! 거기 너!"
"사악한 영혼의 업그레이드 버전이요?"
"땡!! 거기 너!"
"이차원에서 온 악의 정화요."
"땡! 뭐야 교수, 이 학생들 아직 마계학 입문 안 들었나? 왜 아무것도 몰라?"
"실은 이 수업이 마계학 입문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교수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지만 한 손에는 왠지 신성력이 깃든 채찍 같은 걸 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악마는 정색을 하더니 악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악마란, 사실 신의 다른 모습이다. 과거 악마의 계보를 살펴보면 지금의 주신으로 자리잡은 존재와 같은 시기에 같은 장소에서 출발한 신이었던 이들도 많이 있다고 할 수 있지. 대립하던 종교중 하나가 흥하면서 자연스레 다른 쪽 종교의 신이 악마로 편입되었다는 이야기야. 나쁜 짓을 해서 악마가 되었다거나 타락해서 악마가 되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보다 괴팍한 성격이나 태도를 보이는 것은 우리의 추종자들이 어둠속에서 반사회적인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야. 악마를 부르는 이들중 세상에 평화와 사랑을 가져오겠다고 부르는 놈은 없으니 말이다. 그러고 싶다면 주신을 찾아가겠지. 결국 우리중에서도 좀 더 세상의 세속적이고 광기와 피에 물든 세상을 염원하는 이들만 이름 날리고 평화롭게 술 퍼마시며 노는 신들은 잊혀지게 마련인 것이다. 현대엔 선함과 아름다움만으론 해결하기 힘든 부분때문에 악마에 대한 새로운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다. 주신이란 존재는 너무 헛바람이 들어놔서 현실계에 그다지 간섭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거지. 동네의 잡신일 때엔 사사건건 간섭하고 내려와 이런 저런 일을 해치울 수 있지만 주신이란 위치에 올라가게 되면 그게 그리 쉽지 않단 말이야. 그런 식으로 간섭하면 인과율이 무너지고 세계가 붕괴해 버린다. 해츨링때엔 맘대로 설치고 다녀도 되지만 고룡이 되어서도 그렇게 행동하면 세상이 붕괴되는 거지. 그러므로 고룡은 잠자는 시간이 대폭 늘어나고 활동이라 해도 소극적일 수 밖에 없는 것. 우리 악마들은 그런 틈새를 노려 세상에 간섭하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신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럼 말이죠. 악마는 세상에 간섭할 수 있다고 하셨는데, 악마의 힘도 충분히 크지 않나요? 지난번 제 2차 악마 대전의 예를 봐도 세계를 멸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좋은 질문이다. 세상에 간섭하지 못하는 것은 힘의 크기에도 영향받지만 규정된 신의 성격에도 영향받는다. 피의 살육자이자 암흑투신 같은 타이틀을 가진 자가 요리가 상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기란 어려운 일이지. 우리에게 주어진 힘은 거의 무한에 가깝지만 그럼에도 힘의 투사는 우리에게 기대되는 딱 그 선 즈음에서 가능한 것이다. 만물의 주재자이자 균형의 조정자 같은 타이틀을 갖고 있다면 균형 파괴를 위해서 힘을 투사하는 건 불가능한 거지. 주신이란 존재도 보면 불쌍해. 신도들에 의해 무한의 힘을 부여받지만 동시에 무한에 가까운 제약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우리 악마들도 많은 부분 제약을 받는다. 그건 정교하게 짜여진 법률 아래서 사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그런데 가끔은 법의 헛점을 노려서 세상에 간섭할 수 있는 길을 여는 인간들이 있지. 그런 자들은 계약자라고 부른다. 거기?"
"악마와의 계약은 언제나 피와 제물을 동반해야 하는 이유가 뭡니까?"
"악마와의 계약은 사실 충분한 댓가만 있으면 족하다. 보통 그걸 영혼이라는 식으로 말하지만 우리는 인간의 영혼 그 자체엔 관심이 없다. 피는 인간 생명을 의미하고 그건 인간에게 소중한 것이지 악마에겐 별 의미가 없어. 하지만 거기서 오는 간절함과 주저함 두려움과 기대감은 정말이지 신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감정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그 심령에 동화되고 감화되어 강림하는 것이지. 하지만 계약이 제대로 된 방식이 아니면 우리는 바로 떠나버린다. 그런 우리를 현세에 잠시나마 묶어 두기 위한 게 제물이다. 사실 산제물 같은 거 별로 내키지는 않지만 제대로 된 자라면 누군가 주는 선물을 그냥 내버리지는 않잖아. 싫은 속내를 감추고 고맙게 받는 시늉이라도 하는 거지. 개인적으론 산제물 대신 명품 케이크 같은 게 더 구미에 땅긴다고 생각한다. 여튼 그 선물을 받는 동안에 상대는 계약서를 다시 수정하고 손질해서 가져오는 거다. 그럼 우리는 그걸 보고 큰 하자가 없으면 계약하는 거고. 그런 식이다."
"악마가 계약을 통해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실, 신이 이 세상을 통해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믿음, 두려움, 사랑, 희망, 그러니까 우리의 존재는 신이지만 제대로 된 신도와 교리를 갖지 못한 신이라고 할 수 있지. 그런 우리가 이 세상에 간섭하고 투사됨으로서 얻을 수 있는 건 사소한 존재의 증명이랄까. 심심풀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
"그 변호사에와 계약하신 이유라도 있습니까?"
"재미있으니까. 법이라는 건 사실 잘 짜여진 퍼즐 같은 거다. 그리고 그걸 푸는 과정에서 보이는 인간들의 희노애락은 신적 존재들에겐 꽤 관심있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최근 운동경기에도 도핑테스트에 악마 계약 여부가 추가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악마의 힘을 빌어 초인적인 기록을 세우려는 선수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생각해 보면 시시껄렁한 이야기지. 생혈을 마시고 흑미사를 지내서 초인적인 기록을 세울 수 있다고 믿기보단 그냥 성전에 나가서 천일기도 하고 신의 가호를 받아 기록 갱신하기를 바라는 게 빠를 거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 시간에 운동을 하는 편이 더 낫지 않겠나? 그런 말도 있잖아. 악마는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악마님은 미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미녀는 사실 그 자체의 미학에 있어서는 좀 더 예쁜 돼지 정도의 의미밖에는 없다. 신이란 본디 완벽에 가까운 존재이므로 불완전한 인간의 미학 같은 건 크게 대수롭지 않거든. 하지만 미인이란 존재는 언제나 감정을 몰고 다니지. 애정 선망 질투 시기 분노 동경, 이런 감정들은 앞서 이야기한대로 신적 존재에겐 매우 관심있는 감정분야니까 좀 더 가산점을 준다고 할 수 있겠지. 자 그럼 마지막 질문?"
"악마는 신과 대립하는 존재입니까?"
"음...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종종 신마전쟁 같은 걸 치르기도 하고. 하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건 프로레스링 같은 거라고 보면 될 거다. 우리는 신도들이 바라는 소망에 의해 힘을 부여받고 또 구속되기 때문에 인간들이 바라는 그 역할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편이다. 하지만 개인적인 자리에서 만난다면 우리는 신과 꽤 친하게 지낸다고 할 수 있지. 선과 악을 나누어서 대립하는 걸 보여주지만, 그건 쇼에 가깝다는 거다. 이제 시간이 거의 다 되었군. 제군들 중에 계약자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계약자가 나온다면 산제물 대신 생크림 케이크를 부탁한다. 싸구려 말고 좀 비싼 게 좋을 것 같아. 그럼 계약 시간이 지났으니 가봐야 겠군. 그럼 아디오스."
악마는 멋들어진 귀족식 인사를 마치고는 푹 하는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자. 수고해주신 악마 메스트로 아이스타 볼레 강글리오님과 강변호사님께 박수! 다음 시간은 마계학 입문 중간고사가 있으니 준비해 오기 바랍니다. 과제는 악마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에 대한 리포트를 써 오세요. 이상 수업 마치겠습니다."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
악마찡...사...상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