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모닥불 앞에 앉아서 조용히 불을 응시하고 있었다. 늦가을의 차가운 바람이 앙상해진 가지 사이로 거친 비명소리를 질러댔다. 모닥불이 주는 온기는 너무 하찮아서 금방이라도 꺼져 버릴 것만 같았지만 부는 바람은 되려 그런 모닥불을 채찍질하듯 되살려 내고 있었다.


"아......"

"일어났나?"


파리한 안색의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몸 여기 저기엔 피와 먼지가 묻어 있었다. 피가 나는 상처는 남아있지 않았지만 꽤 심한 일을 겪은 것 같았다.


"여긴 어디죠..?"


소녀는 지친 표정으로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안전한 곳."

"제 동생은요?"

"발견된 것은 너 뿐이다."


남자는 그 말과 함께 모닥불로 시선을 돌렸다. 그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구태여 상기시킬 필요는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하지만 묻겠지. 묻고 캐묻고 확인하고 파헤쳐서 다시 가장 깊은 절망에 빠져들겠지. 인간은 그런 존재다.


"왜 구하신 거죠?"

"사람은 보통 그렇게 하지 않나?"

"보통 그렇게 하지 않아요."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보통 그렇게 한다."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우리 마을에 한 일은 그렇지 않아요. 모두 다 죽이고 태우고 약탈했어요. 제 동생도 죽었겠죠."


남자는 말없이 나무 그릇을 내밀었다. 안에는 따뜻한 죽이 담겨 있었다.


"먹어 둬. 속이 비어 있으면 더 힘들거야."

"먹고 싶지 않아요. 살고 싶지 않아요. 이 세상은 너무 끔찍해요."

"그런 거구나. 하지만 먹어 둬."


소녀는 남자가 내민 죽그릇을 쳐다보지도 않고 웅크린 채로 울기 시작했다.


"왜 나만.. 왜 나만 살아남은 거죠.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요! 이런 세상 살고 싶지 않아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히 죽 그릇에 소금을 뿌리고 입으로 가져갈 뿐이었다. 모닥불이 거센 바람에 세차게 흔들렸다.


"네가 만약에 네 가족을 따라 죽고 싶은 거라면 그 소원을 이뤄줄 사람들이 나타난 것 같구나."

"네?"


소녀의 눈이 공포에 물들었다. 그녀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자신이 덮고 있던 낡은 담요가 방패라도 되는 양 꼭 움켜 쥔 채로 뒤로 물러났다. 어둠 속에서 절그럭 거리는 소리가 다가왔다.


"야.. 여기 있었군. 꼬맹이. 니가 도망쳐서 우리는 몹시 곤란했단 말야."


중무장한 남자의 뒤로 모닥불을 든 병사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남자는 제식용의 중갑을 갖춰 입고 있었다. 첫 눈에 보아도 성기사임을 짐작할 수 있는 복장이었다. 하지만 그 말투는 몹시 거칠고 천박해 산적의 것이라 해도 어색함이 전혀 없었다. 성기사와 그 일행은 모닥불을 피우고 있는 남자와 소녀를 빙 둘러 포위했다.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거야. 당장 잡아와."


성기사의 말에 몇 명의 병사가 앞으로 달려나와 소녀를 거칠게 잡아 끌고 가기 시작했다.


"아저씨. 살려줘요! 난 가기 싫어요! 이 사람들이 날 죽일 거에요. 죽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들은 널 죽이지 않을 거다. "

"아니에요. 절더러 마녀랬어요. 절 죽일 거에요."

"죽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죽기 싫어요! 구해줘요!"


소녀가 울며 소리치자 병사는 인상을 쓰더니 소녀의 뺨을 후려쳤다. 하지만 병사의 손은 어느새 남자의 손에 잡혀 있었다.


"뭐야 네놈은......."


병사의 말은 다 이어지지 않았다. 병사의 목은 어느새 꺾여 있었고 생명이 빠져나간 몸뚱이는 썩은 짚단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너 이 자식이 감히 우리가 누군줄..."


자신들이 누군지 몹시 말해주고 싶었던 병사 역시 그의 동료의 뒤를 따랐다. 그 즈음에야 상황을 바라보고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았다. 상대의 움직임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빨랐던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병사 둘이 쓰러졌다.


"뭐냐 네놈은. 감히 신성왕국의 일을 방해할 셈이냐! 이단, 악마! 저 놈을 쳐 죽여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병사들은 칼을 들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남자는 달려드는 병사들을 하나 하나 쳐서 쓰러뜨렸다.

아무런 표정 변화나 소리도 없이 유령처럼 모두를 때려 눕히는 데 세 호흡도 걸리지 않았다. 성기사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너... 너...."

"왜?"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응."

"죽어도 죽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신의 저주를 받을 것이다!"

"너희가 믿는 신은 축복이라고 말하던데."

"뭐라고?"


남자는 벌벌 떨고 있는 성기사의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그리고는 손에 든 것을 망설임 없이 내리쳤다.


"믿음이 부족하구나."


남자가 내리친 것은 작은 현악기였다. 십 수명의 병사와 기사가 그것에 맞아 쓰러졌다. 소녀는 이 상황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남자는 죽은 병사들을 어두운 곳에 장작을 쌓듯 채곡 채곡 쌓아 올렸다. 소녀는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또 구해주신 거군요."


소녀의 말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모닥불에 와서 앉은 뒤 말없이 죽그릇을 내밀었다.

소녀는 식은 죽그릇을 받아들고 입에 떠  넣기 시작했다.


"악사이신가요?"

"그런.. 셈이랄까. 사실 연주는 못하지만. 부탁을 받았거든. 악사로 살아달라고."

"친구분이신가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누군가에게 부탁대로 살아달라는 건 친한 사람에게나 할 수 있는 부탁 아닌가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 친구라고 해 두지."

"제가 왜 저 사람들에게 쫒겨야 하는 걸까요."

"너를 마녀라고 불렀던 걸 보니. 상황이 짐작은 가는구나."

"아저씨도 신을 믿으세요?"

"믿지는 않지만 조금은 알지."

"알지만 믿지 않는다는 게 무슨 이야기죠?"


남자는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신이라 불리는 사람을 알고 지냈지. 그런데 딱히 믿지는 않아. 너는 시체 옆인데 무섭지 않니?"

"저 사람들 다 죽은 건가요?"

"응."

"잘 된 일이에요. 저 사람들은 죽어 마땅해요."

"니가 그렇게 바랬으니까. 그렇게 된 것 뿐이다."

"내가 바랬다고요? 내가 바라면 죽은 가족들이 돌아올 수도 있나요?"

"그럴 수도 있지. 네가 얼마만큼 바라느냐의 문제지만."

"어떻게 하면 되죠?"

"바라면 된다. 그거면 돼."


소녀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뭔가를 열심히 빌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그녀의 눈 앞에는 빛나는 형체가 여럿 있었다. 그녀의 가족들, 그리고 이웃들. 하지만 그들은 소녀에게 몇마디 말을 남기고는 웃으며 빛 속으로 사라졌다.


"가버렸어요. 나만 남겨두고...."

"좋은 곳으로 간 거다. 너무 염려치 말거라."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시는 거에요?"

"네가 날 불렀으니까. 지켜달라고 부탁했으니까. 도와달라고 바랬으니까."

"그럼 제가 신성왕국을 멸망시켜 달라고 해도 들어주실 건가요?"

"네가 바란다면."


소녀는 그제서야 눈 앞에 있는 남자가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들어줄 수 있고 무엇이든 해 줄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소녀는 남자의 발치에 엎드렸다.


"마녀로 살고 싶지 않아요. 살려주세요."

"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신.... 님?"

"난 그냥 사람이야. 남들보다 좀 더 강하고 좀 더 많이 알고 좀 더 빠르고 좀 더 잘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란다."


남자는 자신이 설정한 경계가 소녀의 소망에 의해 침식당하는 걸 느꼈다. 소녀의 소망력은 생각보다 컸고 이대로 소망력을 계속 방치한다면 남자는 경계가 무너져 초월적 존재가 되어 버릴 수도 있었다. 남자는 이쯤에서 상황을 정리하기로 했다.


"난 신이 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사실 인간은 유일한 신성한 존재야."

"네?"

"신이 준 성스러운 힘이라든가, 악마가 준 권능 같은 건 없다. 모두 인간이 만들어내고 상상하며 소망한 결과일 뿐이지."

"하지만 악마가 만들어낸 마물도, 신성력이나 신관들도 세상에 있잖아요."

"모두 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신성력도요?"

"인간은 소망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넌 성녀, 혹은 마녀, 어느 쪽이든 될 수 있지."


평소 같았으면 남자는 소녀가 자신의 삶을 정의하고 세상을 바라볼 시선을 정리할 시간을 주면 충분했다. 그리고 남자는 남자의 길을 가고 소녀는 소녀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곤란했다. 그냥 두고 간다면 소녀는 심하게 어긋나서 세상의 축을 뒤틀어 버릴 수도 있었다. 심지어 남자의 삶도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그를 악사로 만든 어떤 사람처럼.


"이해가 안 가요."

"성스러운 힘은, 인간이 성스럽다고 믿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사악한 힘은, 인간이 사악하다고 믿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야. 믿는 것이 곧 힘이다. 소망하는 것이 곧 이루어지고, 네가 바라보는 것이 곧 진실이 된다."

"믿으면 이루어진다고요?"

"그래. 누구나 인간은 소망의 힘을 갖고 있다. 너는 그게 남들보다 좀 더 클 뿐이야."

"제가 왕자님을 만나고 싶다면 그게 이루어지나요?"

"모든 소원은 반작용이 따른다. 회의나 반감, 의문이나 걱정, 두려움 같은 것들이지. 그걸 네가 잘 제어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이루어진다. 하지만 보통 인간들은 그 반작용에 의해 소원을 이룰 기회를 잃게 되지."

"저는 다른가요?"

"좀 특별한 편이야. 그게 저들이 너를 마녀라고 생각하는 이유기도 하고. 성녀라는 이는 저들이 원하는 방식으로만 소망력을 투사한다. 하지만 너는 어떤 방향으로든 뻗어나갈 수 있어."

"저는 성녀가 되지 않겠어요. 하지만 마녀도 되지 않겠어요."

"좋을 대로."

"대신 모험가가 될 거에요."

"그렇...구나."

"아저씨는 저 도와주실 거죠?"

"그래...야 할 것 같구나."

"아저씨는 친절한 사람 같아요. 전 의지할 아무도 남아있지 않아요. 아저씨를 믿.을.께.요. 고대 제국의 유적도 보고 드래곤도 보러가고 마계도 탐험하고 천사도 만나고 왕자도 만나고 요정도 보고 싶어요. 세상 끝까지 여행하는게 사실 제 꿈이었거든요."


아직 눈물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얼굴로 해맑게 웃는 소녀를 보며 남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빨리 상황이 정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자신이 자신으로 남아 있기 위한 경계 같은 건 이 소녀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선택했고, 자신이 살아갈 세상을 정했다. 필멸자들 사이를 스쳐 지나는 자신 같은 이들은 소녀의 말을 거절할 수 없었다. 태초 이래로 소망력을 투사하는 많은 존재들 가운데 이 소녀는 분명 손에 꼽힐 정도의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 스스로가 여신이라 믿는다면 여신도 될 수 있을 것이고 세상의 멸망을 바란다면 그것은 이루어지리라.


남자는 다만 그녀가 바라는 모험이 너무 거창한 것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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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