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쥬라기 공원>에는 1980년대 후반의 유전공학 산업 이야기가 잠깐 나옵니다. 전통적인 바이오 산업이 약품이나 의학으로 수익을 얻는 것과 달리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다는 내용이죠. 이런 기업들은 90년대 들어서면 레저나 스포츠, 애완동물 등의 수요가 늘어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그래서 ‘소니의 워크맨에 대항하는 생물학적 상품이 뭔지 찾아 다녀요. 당시의 실제 유전공학 산업이 그랬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하필이면 예시로 든 상품이 소니 워크맨이라는 게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경제 뉴스에 자주 나오는 것처럼 요새 소니가 어렵다고 하니까요. 플레이스테이션이 잘 나가지만, 가전 쪽의 타격이 큰지라 게임으로 보충이 안 된다고요. 콘솔 게임 유저들은 소니가 무너질 바에야 PS 부문이라도 따로 떼어내길 바랄 정도입니다. 하여간 이 책을 읽으니, 그간 경제 사정이 참 많이도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승승장구하는 롤 모델로 워크맨을 거론할 90년대 초반이니까요. (요즘이라면 아마 아이폰이겠죠.)



마이클 클라이튼이 <쥬라기 공원>을 내놓은 때가 1990년 11월입니다. 그러니까 실제 집필은 그 이전에 했다는 뜻이죠. 그리고 이 당시는 일본이 경제 강국으로 한창 바쁠 때였습니다. 2차 대전 이후로 급격하게 성장했고, 그 정점을 찍은 시기가 1980년대였죠. 다들 섬나라의 자본력을 경계했고, 이는 서구 SF 작품에도 드러납니다. <블레이드 러너> 같은 수작부터 <에일리언> 시리즈를 거쳐 <로보캅 3>처럼 졸작까지, 곳곳에 일본 자금이 도시를 지배하리란 예상이 퍼졌죠. 기모노 여인의 광고판, 우주선에 새겨진 한자, 속을 알 수 없는 일본 기업인들. 허나 90년대 중반이 넘어서며, 소위 거품이 꺼지면서 화려한 막은 내려갑니다. 여전히 국제 사회에서 대접받는 강대국이지만, 기업 명성이나 인지도가 살짝 떨어진 건 사실이죠. 그래서인지 2000년대 이후로 일본 기업이 산업 아이콘으로 나오는 SF 작품은 그리 없는 듯합니다. 그걸 떠나서 <쥬라기 공원>은 80~90년대 소설이고 상업주의 경고가 주제인 만큼, 일본 산업 이야기가 저렇게 비유적으로 가끔 나오곤 합니다.



기실 작중 등장하는 배경인 쥬라기 공원 역시 일본 투자자들이 세운 겁니다. 존 해먼드는 공원을 세우려고 자금을 유치했는데, 사업 특성상 조건이 까다로웠습니다. 비밀 유지가 심했고 5년간 비용 회수가 안 된다고 했거든요. 해먼드는 굉장히 수완 좋은 흥행사라서 상당한 자금을 모았지만, 저런 계약 내용에 겁을 집어먹고 물러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결국 대다수를 일본인으로 구성한 국제 자본가 협회에서 투자 받아 나머지를 채웠죠. 그걸 도와준 인물이 인젠 법률 고문인 도널드 제나로인데, 그 당시는 일본만이 인내심 있는 투자자였다고 회상합니다. 아마 이것이 당시 80년대 일본 경제를 반영한 설정 아닌가 합니다. 이 시기는 눈에 보일 정도로 쑥쑥 크지 않았지만, 꾸준하고 안정적으로 성장했으니까요. 전쟁 패전국으로 시작해 순식간에 미국의 개인 소득을 따라잡았죠. 서구권은 고용 불안정으로 몸살을 겪었는데, 안정적인 성장을 이어가니까 저런 사업에 투자할 수 있었을 테고요. 이런 이유가 맞든 틀리든 간에 인젠을 일본 자본으로 설립했다는 게 의미심장하더군요.



공원을 관람하는 차량인 랜드 크루저도 토요타 트럭이라고 합니다. 사실 공원에는 랜드 크루저 말고도 다수의 관람 및 놀이기구가 있었습니다. 강을 타고 지나가는 배라든가, 거대 새장을 둘러보는 공중 차량이라든가 등등. 하지만 기본적인 시설만 완성하고 개장하려고 했기에 랜드 크루저만 가동시켰죠. 그리고 여기 쓰인 차량이 토요타 것이고요. 별 거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토요타는 일본 경제를 대표하는 얼굴마담입니다. 한창 부흥기를 상징하는 상품으로 토요타 차량, 니콘 카메라, 소니 전자제품을 꼽을 정도니까요. 월등한 성능을 승부하는 게 아니라 비용 대 효율이 좋을 뿐이지만, ‘싼 가격에 좋은 품질은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죠. 이 당시 형성한 이미지가 지금까지도 죽 이어지기에 리콜 사태 같은 장애도 돌파하고, 세계 1위 자동차 기업 자리를 지키죠. 일본 자본으로 세운 공원이라서 일본 차량이 관람객의 발이 된 건 아니겠지만, 아예 관계가 없지도 않을 겁니다.



마이클 클라이튼은 이런 자잘한 언급으로 90년대 일본 경제를 슬쩍 이야기합니다. 나중에는 아예 그와 관련된 소설을 하나 발표하죠. <떠오르는 태양>이 그겁니다. <쥬라기 공원>이 90년에 나왔고, 곧바로 이어서 92년에 출판했습니다. 흠, 우연이라면 재미있는 우연이네요. 내용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일본 기업이 독자적인 기술로 미국 자본 시장에 침투한다는 내용입니다. 비단 경제만이 아니라 일본 특유의 문화나 대인 관계 등이 나오는 것도 눈여겨볼 부분이죠. (일본인은 아니지만) 같은 동아시아 독자가 보기엔 잘못 쓰거나 오해한 부분도 없지 않아요. 하지만 클라이튼만한 서구 작가가 일본 기업과 산업, 문화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는 책이었죠. 허나 이후 작품에서는 더 이상 일본 자본의 영향력을 의식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 거품 경제가 꺼지면서 경계심이 줄었기 때문인가 봐요.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90년대 중반 이후로는 SF 설정에서 일본 위상이 서서히 내려가고, 2000년대에는 거진 사라지니까요. 요즘에는 그 자리를 중국이 대신하는 듯.



물론 <블레이드 러너> 같은 작품이 남긴 인상은 아직도 뚜렷하긴 합니다. 산업이 급속도로 발전한 미래상을 묘사할 때, 히라가나와 한자는 안 빠지는 배경 장치입니다. 도시에 자리잡은 퇴폐한 아시아 식당이나 주점도 일본식이죠. 여기다가 기업 비리를 실행하고 뒷골목 패권을 노리는 야쿠자가 카타나 들고 난리치기도 하고요. 특히 사이버펑크 도시 묘사와 일본 기업은 떼기 힘든 관계인 것 같네요. 게다가 중국이 신흥 강국으로 엄청나게 뜨긴 하지만, 일본처럼 기업으로 침투하지는 않는 것으로 나옵니다. 땅 넓고 인구 북적대느라 그걸 바탕으로 성장하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자원을 집어먹는 블랙홀로 나오곤 하며, 경제가 아니라 군사적으로 미국이나 러시아와 맞서는 게 테크노 스릴러의 주된 테마입니다. 덕분에 ‘서구를 위협하는 외세(아시아) 자본은 여전히 일본의 잔재를 따릅니다. 꼭 일본이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풍으로 표현하는 편이죠.



소설에서 몇 줄 안 되는 언급으로 일본 경제의 영향 운운하는 건 비약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왕년에 잘 나갔다는 소니 워크맨 언급을 보니, 요즘 상황과 너무 다르다는 느낌이 새삼 드네요. (플레이스테이션을 위해서라도 소니가 좀 회생했으면 좋겠는데, 어찌 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