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용사여. 축배를 들게나!"

국왕은 연신 유쾌하게 웃으며 잔을 건넸다. 하지만 용사로서는 그걸 마냥 기쁘게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전 술을 못 마십니다."

"그러지 말고 한잔만 드세요? 네?"

옆에서 아리따운 공주도 한팔 거들었다. 웃는 얼굴로 건네는 잔을 마다하는 것도 한두번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생명의 은인이자 장인이 될 사람. 한 나라의 국왕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술을 피하기는 했지만 금주를 모토로 하는 성직자들도 축배를 드는 이런 상황에 언제까지나 빼고 있을 수는 없었다. 마왕을 무찌르고 모든 인류의 미래를 구한 이 마당에 까짓거 한잔 정도라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포도주 같은 건 음료수니까 마셔두지 않으면 안 된다. 용사는 웃으며 잔을 들었다.

 

"용사를 위하여! 미래를 위하여! 승리를 위하여!"

마왕과의 치열한 싸움이 머릿속을 스쳤다. 쓰러져 간 동료들. 그리고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마족과의 치열한 전투. 자신이 연 제국에서 배워왔던 격투술이 아니었다면 진작 차디찬 시체가 되어 쓰러졌을 것이다. 용사는 잔을 들이켰다. 입안 가득 포도주의 향이 알싸하게 맴돌았다. 나라가 망해가는 와중에도 보관되어 있던 포도주다. 인류가 멸망할 와중에도 아껴두었던 술이다. 그 맛은 술을 즐기지 않는 용사에게도 꽤 훌륭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이 세계로 넘어온 것일까. 용사는 봉인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술 잘 드시네요! 한잔 더 하세요!"

뭔가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다. 봉류산 정상에서 운무속 비무를 나누던 일이 떠올랐다. 마교와의 전쟁을 멈추고 마교 교주와 친구가 되었던 일도 떠올랐다. 전쟁은 끝났고. 축제가 벌어졌다. 그리고 거기서 기억은 끊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이 세상에 와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다른 세계로 이동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처음엔 그 세상에서의 할 일을 모두 마쳤기 때문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았다. 국왕도 공주도 즐겁게 웃고 있었다. 술을 마시며 사람들은 즐겁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용사가 기억하던 마지막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용사는 황량한 대지 위에 누워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기계들과 인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뭐야. 여기는."

용사는 심한 두통에 머리를 감싸 쥐었다. 숙취였다. 주위엔 로카드리안의 왕성도 국왕도 공주도 아무도 없었다. 여기가 또 뭔가 엉뚱한 세계라는 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젠장. 이래서 술은 싫어."

저 멀리에선 전투가 점점 격화되고 있었지만 용사는 자리에 앉아서 머리를 감싸 쥐었다. 또 시간이 지나면 기억은 봉인되고 더 이상 생각해 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지금 떠올려야 한다. 술을 마시고 남의 집에서 일어나는 정도는 약과다. 술을 마시고 유치장에서 일어나는 일도 있을 수는 있다. 쓰레기장에서 잠을 깰 수도 있고 정신차려 보니 사자 우리에 들어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술에 취했다가 깨어났는데 다른 세계에 와 있다는 건 좀 심각한 일이다. 용사는 자신이 술에 취해 있는 동안에 술주정을 부린 건 아닌가 잠시 걱정을 했다. 만약 그가 술에 취해 뭔가 집어던지거나 폭렬마법을 쓰거나 했다면 로카드리안 왕성 정도는 가볍게 날려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차원이동에 대한 노마법사의 말이 떠올랐다. 차원이동을 한다는 게 그냥 뿅 하고 사람만 이동하는 건 아닐 테니까. 생각해 보면 차원이동에 필요한 에너지는 대충 계산해도 핵폭탄 몇 개쯤의 에너지가 필요하다. 차원의 벽에 구멍을 뚫어야 하니까. 문득 과거에 봉류산 정상에서 마교 교주와 친구 먹은 뒤에 했던 술내기가 생각났다. 연 제국은 어떤지 몰라도 봉류산맥은 지금쯤 지옥으로 변해 있을지도 모른다. 로카드리안 왕성도 아마 박살났을 거고 거기 있던 사람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수도 있다. 그의 몸이 거의 벌거벗은 채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그의 육체 말고는 가장 강한 금속인 아만트리움으로 된 도구나 칼, 금속이고 옷가지고 차원이동의 힘을 이겨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다 죽었으려나."

용사는 잠시 고개를 저었다. 노마법사가 함께 있었으니 어쩌면 몇몇은 구해냈을지도 모른다. 그의 기억 한편에서 젊은 아가씨와 춤을 추던 노마법사의 취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한 손에 기를 모아 올려 강한 념을 심었다.

 

'술은 먹지 마라. 먹으면 마왕이 강림한다. 그리고 술주정에 대해서는 잊어라. 이번엔 잘 해보자.'

용사는 자신의 뇌에 거칠게 념을 투사해 넣었다. 과거 세계를 멸한 사실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은 그가 일어섰다. 지금 해야 할 일은 저 앞에 보이는 전쟁을 멈추는 일이었다. 새로운 세계에서의 새 출발이었다.

 

그에게 술만 권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이 세상에 사는 이들은 구세주를 만나게 될 것이다.

 

 

profile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