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역본 <쿼런틴> 해설에 보면, 소설 느낌이 싱글 몰트 위스키와 비슷하다는 문구가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정제되어서 순수함의 결정체라고요. 그 해설을 읽다 보니, SF 장르를 주류에 비유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이런저런 종류가 많은 맥주가 적당하다 싶었습니다. SF가 유럽에서 태생한 장르이니까 유럽 주류랑 어울릴 것도 같고. 하여서 하위 장르와 맥주 종류를 서로 연결해봤습니다. 다만, 이하 서술하는 항목은 저만의 주관이기 때문에 대략적인 공통점이 이렇다는 것뿐입니다. 게다가 맥주 전문가도 아닌지라 틀린 부분이 있을 수도 있고요. 순전히 재미로 술과 SF를 연결했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는 점을 먼저 밝힙니다. (흠, 꼭 유리알 유희를 하는 기분도 드네요.)




스페이스 오페라 & 페일 라거


공통점: 접하기 쉽고 가볍기 때문에 가장 대중적입니다. 굉장히 흔해빠지고 만만해 보이죠. 공장에서 찍어낸 양산품으로 보이기까지 하나, 그만큼 폭넓은 사랑을 받아요. 꼭 철저한 장인 정신으로 무장해야 좋은 건 아니잖아요.


비교 설명: 페일 라거는 그냥 목 마를 때 부담 없이 마실 수 있어요. 휴일 오후 간식거리가 생각날 때, 맛있는 식사에 반주가 필요할 때, 일하고 돌아가는 길에 한 잔 하고 싶을 때 등등 어느 상황에서건 무난하게 잘 어울립니다. 덕분에 맥주의 양산화에 일조하긴 했으나, 그만큼 저변이 늘어났죠. 스페이스 오페라도 그렇습니다. 때로는 SF물이 아니라고 비난을 받거나, 너무 황당무계하다는 말을 듣죠. 그럼에도 남녀노소 모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습니다. 이쪽 장르에 입문하려는 사람들한테 추천하기도 좋고, 취향이 서로 다른 사람들도 공통 요소를 가지고 함께 즐길 수 있죠. 페일 라거가 명품 소리는 못 듣는 것처럼 스페이스 오페라도 최고의 SF 장르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누구나 좋아할 수 있죠.




외계 전쟁물 & 필스너


공통점: 역시 무난하고 대중적입니다만, 자기 색깔을 간직했습니다. 딱히 진입 장벽이 없고 어디에나 널리 퍼져있어서 찾기도 쉽습니다. 그러나 밋밋하고 무미건조한 게 아니라 자기 강점을 잃지 않았어요.

비교 설명: 외계 전쟁물이 그러한데, 아마 SF라는 단어를 들으면, 흔히 외계인과 광선총을 떠올릴 겁니다. 침공하는 외계인에게 반격하는 줄거리는 금방 떠올릴 만합니다. 허버트 조지 웰즈가 기념비적인 <우주전쟁>을 쓴 이후로 말입니다. 일견 진지하고 복잡해 뵈는 밀리터리물부터 호쾌하고 신나는 모험물까지, 외계 침입자들은 도처에 널렸습니다. 다양한 방법으로 응용이 가능하고, 그만큼 여러 작품에서 가리지 않는 소재가 되었죠. 이쪽 장르의 정수를 담으면서도 무난하게 사용할 수 있다고 할까요. 그 면모는 널리 인기를 끄는 필스너를 닮았습니다. 필스너는 맥주를 좋아한다면, 거의 대부분 누구나 마실 수 있습니다. 청량감을 좋아하는 이도, 알싸한 맛을 찾는 사람도, 기분 전환을 위한 사람에게도 알맞습니다. 그러면서도 본연의 풍미를 잃지 않고, 씁쓸한 홉의 향취를 간직했죠.




우주 탐험물 & 페일 에일


공통점:뚜렷한 특징을 강하게 풍기지만, 그러면서도 정석적입니다. 그건 아마 해당 종류/장르의 대표자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겁니다.


비교 설명: 우주 탐험물은 SF의 얼굴마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야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물음, 그러니까 미지와의 조우를 탐구합니다.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존재를 마주하며, 인식의 한계를 넓혀주고, 독특한 느낌을 자랑합니다. 때로는 진부한 외계인과 교류하거나, 그저 그런 우주판 대항해시대가 될 수도 있죠. 하지만 미지의 공간을 떠난다는 발상 자체는 언제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합니다. 페일 에일이 에일이란 광대한 영역을 대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른바 오리지널에 가까운 맛으로 향긋한 꽃이나 과일, 구수한 견과류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여전히 맥아 향의 비중이 높습니다. 묵직한 뒷맛이 있지만, 한편 탄산의 시원함도 잃지 않았죠. 라거처럼 일률적이지 않지만, 표준으로 자리잡을만한 중심이 있는 페일 에일. 독특하고 정석적인 우주 탐험물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드 SF & 스타우트


공통점: 진하고 풍미가 가득하며, 굉장히 묵직합니다. 겉보기도 시커멓고 복잡해 뵈는 것이 함부로 접근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실제로도 그렇습니다. 그리 시원하거나 청량하다는 느낌도 없고, 독하고 씁쓸하기만 합니다. 한 입에 털어 넣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천천히 맛보는 게 낫겠죠. 누구에게나 권할만한, 그런 무난함이나 대중성은 없습니다.


비교 설명: 이런 것만 존재한다면 시장이 넓어지지도 않을 테고, 팬층도 사그라지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가치가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묵직한 맛에 한번 빠져들면 다른 것들이 시시해 보일 수 있습니다. 워낙 씁쓸한 탓에 자주 접하지는 못하겠지만, 때때로 생각나서 영영 끊지를 못해요. 스타우트는 필스너나 페일 라거, 아메리칸 라거 등과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선호 계층은 적지만, 일단 마음을 빼앗기면 그쪽으로 계속 끌려갑니다. 다행히 그 풍미와 명성이 높기 때문에 선호 계층이 적지만, 명작으로 길이 남을 수 있죠.




사변소설 & 인디아 페일 에일


공통점: 우와, 강렬합니다. 이건 마치 뭐라고 할까요. 워해머로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치는 느낌? 세상에, 이런 느낌도 있구나 싶습니다. 무겁긴 한데, 단순히 묵직하다는 것보다 뭔가 강렬한 것에 덴 듯합니다.


비교 설명: 스타우트가 그랬듯 역시 가볍거나 시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팬이 많지 않은 것도 당연하죠. 누가 이런 걸 두루 즐기고 싶어하겠어요. 하지만 엄청난 농도를 자랑하기에 가끔 그 맛을 다시 찾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인디아 페일 에일은 말 그대로 영국에서 인도로 보내려고 만든 맥주입니다. 방부 효과를 위해 홉을 대량으로 첨가했는데, 덕분에 특유의 쓰고 강렬한 맛이 생겼습니다. 보존을 위해 처리했더니 독특한 맛이 생겼다는 점에서 삭힌 홍어랑 비슷하다고 할까요. 어쨌든 그 강렬한 맛 때문에 한번 접하면 (좋든 싫든) 잊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변소설 역시 골치 아프고 복잡해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뉠 겁니다. 그러나 머릿속이 정제되는 느낌만큼은 선호도를 떠나 뇌리에 짙게 남겠죠.




괴수물 & 라우흐비어


공통점: 어느 분야에나 노리고 만든 장르가 있습니다. 널리 사랑 받지도 않고, 대중적이라고 하기엔 색다르고, 이게 지나쳐 약간 괴상한 감각이 나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게 좋아서 찾는 사람이 있기에 특정 계층을 노리고 만들죠.


비교 설명: 때로는 보다 많은 소비층에게 알리기 위해 기존의 대중적인 장르와 혼합하기도 하고요. 괴수물이 그런 쪽입니다. 애초에 괴수가 나온다는 것부터가 이쪽 팬들에게 보라고 어필하는 거죠. 건물만한 짐승들이 깽판치는 내용에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겠고, 자기 색깔이 너무나 뚜렷하여 다른 장르 팬들은 기피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괴수는 희화화되기도 싶죠. 하지만 SF 분야의 한 축을 이루는 기둥임은 분명합니다. 라우흐비어는 훈연 향으로 승부하는 종류로서 맥아와 홉, 기타 부가물에 치중하는 여타 맥주와는 궤를 달리합니다. 그 때문에 찾는 사람도 적고, 유통 지역도 한정적입니다만. 다양한 에일, 라거와 결합하여 이를 보완하려는 움직임도 있더군요. 컬트적인 인기를 끄는 괴수물처럼 라우흐비어도 그렇지 않을까요.




공룡 & 둥켈, 다크 라거


공통점: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많은 사랑을 받으며, 널리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대중적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모자랍니다. 아마 겉보기가 너무 뚜렷해서 기피시하는 경향도 있겠고, 특정 계층에서만 향유한다는 생각도 한몫 하겠죠. 그 특정 계층이 상당히 폭넓긴 하지만요.


비교 설명: 괴수물보다야 훨씬 대중적이지만, 공룡물 역시 뚜렷한 소비층이 존재합니다. 공룡이 나온다는 사실부터가 공룡 팬을 위해 만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재 자체는 흔하지만, 막상 무난하다고 하긴 이릅니다. 독일 둥켈이나 유럽 다크 라거도 이와 비슷하다고 봅니다. 흔한 라거에게서 기대하는 요소들, 시원한 탄산과 고소한 맥아, 알싸한 홉 등 모든 걸 갖추었습니다. 하지만 볶은 보리를 썼기에 씁쓸하고 탄내가 함께 배어 나오죠. 그래서 필스너나 페일 라거처럼 남녀노소 만인이 즐기는 수준은 아닙니다.




비경탐험물 & 바이젠, 밀맥주


공통점: 고전적이면서도 풍부한 맛이 납니다. 요즘 시대에 이런 건 낡지 않았나 싶은 생각도 들고, 사실 클래식이라고 불려도 할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루함이 아직까지도 인기를 얻는 까닭은 오래된 듯하면서도 접근하기 좋고, 풍성한 여운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비교 설명: 입문자도 간단하게 즐기기 쉽고, 입맛 까다로운 미식가도 만족스럽죠. 독일식 바이젠이나 유럽식 밀맥주는 탄산의 청량감, 크림 같은 거품 그리고 무엇보다 달달한 향내와 진한 맛이 일품입니다. 효모까지 따라 마실 정도로 풍미가 가득하지만, 너무 묵직하지 않아 거의 모든 상황에 어울립니다. 느낌이 좀 진득한 터라 마냥 맑고 상쾌하진 않지만, 젊은 층도 부담 없이 마시는 편이에요. 비경탐험물도 그렇죠. 알려지지 않은 미지로 떠나는 탐험대는 꽤 고루한 이미지입니다. 탐험의 세계는 이미 예전에 막을 내렸는데요. 하지만 고대 유적이나 오지를 발굴하는 소재는 여전히 인기만점이며, 무대를 우주와 외계 행성으로 넓혔습니다. 이만큼 진한 여운을 풍기는데, 노땅이면 좀 어떤가요.




포스트 아포칼립스 & 복


공통점: 으으, 이건 단순히 넘어가기엔 꽤나 셉니다. 첫 느낌이 해일처럼 밀려온다거나 머리를 워해머로 두드리는 충격까지는 아닙니다. 그런 경우도 있지만, 그보다는 뒤끝이 안 좋다고 하는 게 맞겠네요. 막판에 정신이 멍해지는 편입니다. 가끔 무미건조할 때도 있으나, 강도가 세서 쉽게 흘려 보낼 수가 없습니다.


비교 설명: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멸망한 세계가 배경입니다. 화려한 인류 문명은 무너지고, 남은 자들은 어떻게든 살기 위해 전전긍긍합니다. 당연히 전개는 암울하기 마련이며, 막판에 씁쓸한 뒷맛을 남기곤 합니다. 인류 재건을 바라보며 희망적으로 끝날 때도 있으나, 그렇다고 암울함이 완전히 가시진 않죠. 복, 그 중에서도 도펠복은 알코올 도수가 높아 묵직하고 얼떨떨하기로 유명합니다. 스타우트나 포터만큼 진하지는 않으나, 라거 중에서는 강하고 센 축에 속하죠.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감상하고 난 느낌은 도펠복 한 잔을 죽 들이키고 난 후의 입맛과 비슷할 것 같습니다.




우주적 공포물 & 람빅


공통점: 으음, 이거 뒤끝이 영 개운하지 않습니다. 그냥 맛이 없는 게 아니라 상당히 괴악합니다. 이런 걸 감상하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질 정도로 껄끄럽고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그런 껄끄러움이 이쪽의 매력인 걸요. 아마 당분간은 부담스러워서 찾아보지 않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생각이 날 걸요.


비교 설명: 그만큼 뇌리에 강하게 박힐 테니까요. 람빅은 그만큼 일반적인 맥주라고 하기 힘듭니다. 야생 효모를 쓰기 때문에 관리가 쉽지 않고, 하도 숙성시키다 보면 별의별 냄새가 다 들어가고, 심지어 시기까지 합니다. 허헛, 신 맥주라니, 뒤끝이 얼마나 안 좋겠어요. 한번 마셔보면 그 충격이 장난 아니라네요. 코즈믹 호러도 그렇습니다. 이게 SF물인지, 판타지인지, 공포물인지 구분이 안 가는데, 끝에 다다르면 뒤끝이 그렇게 짜증날 수가 없습니다. 재미나게 술술 읽어나갈 만한 장르는 아니지만, 대신 마음 한구석에 콱 들어박힐 겁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할지는 개개인에게 달렸습니다. 소화해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니면 괴악함에 진저리 치며 떨쳐낼지.




초인영웅물 & 아메리칸 라거


공통점: 대량 생산품이며, 소비층도 크고 넓습니다. 인지도도 높고, 가볍고 단순해서 접근하기도 쉬워요.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미국 특유의 색체입니다. 미국식 입맛이 너무 강한 탓에 여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금방 질립니다. 특히 진한 풍미나 독특한 입맛을 선호하는 이들은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입니다. 하도 뻔한 패턴을 반복하다 보니, 나중에는 식상하기도 하고요.


비교 설명: 초인영웅물은 그 전에도 높은 명성을 뽐냈고, 특히 2010년대 안팎으로 한창 뜬 장르입니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를 만족시킬 만큼 고른 인기를 자랑하죠. 하지만 강렬한 원색 때문에 한번 적응을 못하면 나중에 다시 발붙이기가 어려워요. 이 점은 옥수수 같은 부가물을 팍팍 넣은 아메리칸 라거와 닮았습니다. 뭐, 마침 둘 다 미국만의 문화가 담뿍 배였네요. 많은 비판을 받지만, 그만큼 장벽이 낮아 널리 인기를 끄는 점은 스페이스 오페라/페일 라거와 같은 맥락입니다.




이상으로 맛과 향, 분위기, 이미지 등을 가지고 SF 장르와 맥주 종류를 한번 비교해 봤습니다. 뭐, 그럴 듯한 것도 있고, 어색한 것도 있지만, 어쨌든 상기에서 밝혔듯이 재미로 해보는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