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연재 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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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앙.'
7422년 7월 12일 00:35
"거의 다 왔네."
기체를 타고 흐르는 빗소리는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잠들었던 정신을 일깨운 테카이는 손을 더듬어 몸에 있는 것들을 점검했다. 허리를 따라 두른 탄창과 대검, 리모칼 권총, 가슴 앞에 비껴 맨 벡터 돌격 소총과 수류탄, 다용도비상팩등 모든 것이 제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바닥이 조금 기울어져 있는 느낌이 들어 헬멧 화면을 보자 중력 수평계가 10도 정도 전방을 향해 치우쳐져 있었다. 전자나침반은 지구자장 부유장치의 영향으로 뱅글뱅글 돌았다.
"어느 정도 남았습니까?"
"7에서 8분 정도야. 장비 점검은 했나?"
"그렇습니다."
"좋아."
기체가 다시 오른편으로 약간 기울어지며 선실 앞에 있는 문이 열리고 사령관이 튀어나왔다. 그 앞은 조종석인 듯 바깥의 풍경이 수많은 계기들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푸른 머리카락을 길게 등까지 길어 내린 사령관은 그리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 젊은이였다. 선이 가는 얼굴에선 눈빛이 번뜩이고 상처 하나 없이 고운 얼굴에는 이제 막 피고 있는 젊은 혈기가 가득했다.
전신이 금속판으로 이루어진 강화전투복을 입고 있는 몸도 가늘고 늘씬하여 연약한 인상을 주었다.
"요란스럽게 들어가는 것도 이제 끝이네. 적 경계 레이더가 빈틈이 없어. 에피앙 외곽 주거지를 침투지점으로 그곳부터 도보로 이동해야해."
"알겠습니다."
길다란 머리카락을 정리해 넣고 헬멧을 쓴 사령관은 선실의 서랍을 열고 무장하기 시작했다. 전투복 곳곳에 달린 비행용 장비들을 떼어내고 야전용 장비들을 부착한 다음 리모칼과 대검을 끼워 넣었다. 그런 다음 배낭을 매고 길다란 금속상자를 꺼내어 배낭 옆의 거치대에 장착했다.
수류탄과 휴대용 탄창은 몸 여기저기 빈곳에 끼워 넣었다.
"좋아. 거의 다 왔군."
커다란 자동권총을 꺼내 손에 든 사령관이 신호를 보내자 테카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선실 출입구 앞에 대기했다.
바닥이 앞으로 살짝 기울어지며 몸이 한쪽으로 쏠리다가 조용히 멈췄다.
잠시 정적이 지난 다음 문 내부의 기관이 작동하며 쇠가 마찰하고 램프가 열리기 시작했다.
아무런 불빛도 없이 어둠에 잠겨 있는 건물과 거리의 윤곽이 희미하게 번개 빛에 드러나고 거센 바람과 빗방울이 몸을 강타했다. 죽어버린 도시의 전경은 가만히 서 있어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괜찮은 날씨군요."
"그래. 도둑질하기에 좋은 날이지."
램프 위에서 승강장치가 튀어나와 하강로프를 내렸다. 먼저 내려가라는 수신호에 테카이는 줄을 잡고 단숨에 뛰어 내렸다. 밖으로 나오자 빗소리가 엄청나게 커졌다.
테카이는 벡터를 겨누고 한바퀴 몸을 돌리며 사방을 경계했다.
"방위, 이상 무. 안전, 이상 무."
"확인."
폭풍우가 몰아치는 도시에는 어떤 불빛도 없었다. 겨냥했던 벡터를 내린 테카이는 사령관이 줄을 타고 내려오자 옆으로 조금 물러났다.
등화관제 때문에 외부 항공등을 모두 끄고 있는 전투기, 전략항공군 소속 전략통제 지휘기 라시스는 승강줄을 재빨리 말아 올리고 램프를 닫은 다음 소리 없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금방 바닥 면에서 파랗게 빛나는 지구자장 부유장치의 불빛만이 보였다.
"공중지원은 좀 불가피해. 라시스를 잃을 순 없네."
아군기호로 떠 있던 라시스는 천천히 상승하며 부유장치의 불빛마저 희미해지더니 이내 비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기호가 구름 위로 계속 상승하다가 어느 순간 신호가 완전히 끊어졌다.
테카이는 사령관의 헬멧을 보며 주위를 경계했다.
"천둥과 비가 모습을 가려줄 거야. 신중하게 움직이게."
고개를 끄덕인 테카이는 벡터를 어깨에 견착하고 발을 내디디기 시작했다. 그 뒤에서 사령관은 권총을 치켜들고 주변 건물을 경계했다.
폭격에 맞아 반쯤 지붕이 부서진 5층 건물은 텅 비어 있었다.
"안전 확인. 움직임 없음. 진입."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에서 피어난 물안개에 감싸인 시가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벡터의 탐색 레이더파가 어두워져 보이지 않는 도로 저편까지 뻗어갔지만 건물의 반송파 외엔 잡히는 것이 없었다.
사령관이 출입구 바깥으로 나오자 테카이는 반대편 건물 그늘로 달려가 엄폐하고 진입루트로 표시된 길에 벡터를 겨누었다.
"확인. 조용한게 마음에 드는군."
쥐죽은듯한 적막에 휩싸인 도시는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에 집어삼켜져 있었다. 길가에 주저앉은 자동차는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모든 건물에 동력이 나가서 빈번하게 떨어지는 벼락이 아니면 바로 눈앞에 있는 손도 알아볼 수 없었다.
헬멧 마스크에 떨어지는 빗방울의 소리가 너무 거세서 소음제거 기능을 켜지 않으면 바로 뒤에서 방아쇠 당기는 소리가 들려도 알아채지 못할 것 같았다.
"목표 정보 열람 비밀번호는 라 스탈당이야. 열어보게."
"불편하군요."
"비밀은 다 그런 법이지."
테카이는 헬멧에 손을 대 무전을 잠시 끊은 다음 비밀문서 열람 메뉴를 열고 작게 암호를 읊었다. 표시창에 정보가 떠오르며 도시의 최신 지도가 업데이트 되고 진입루트를 표시한 화살표가 목표지점을 가리키기 시작했다.
안전을 확인한 사령관이 전진하라는 신호를 보내자 테카이는 벡터를 살짝 내리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경로가 부정확할지 몰라. 20여일 전 투입됐던 분견대가 보내온 정보가 전부이니 방심하지 말게."
목표까지의 거리는 꽤나 멀었다. 화살표가 가리키고 있는 곳에 그래픽으로 덧 씌워진 마천루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주위 하늘이 사방에서 뻗어 나오는 레이더 전파 때문에 요란했다.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은 절대 아니다.
"정말 편하겠군요."
사령관은 낮게 웃는 소리를 냈다.
"총알 비를 맞아가며 약진하는 것보다는 빗방울이 낫지."
테카이는 고개를 내젓고 다시 경계에 집중했다. 빗방울과 돌풍, 천둥소리로 요란한 도시는 재난영화 속 멸망한 도시와 비슷했다.
음산하고 기분 나쁜 분위기가 모든 거리와 건물을 지배했다.
"여기 10만명이 살고 있었는데, 정말로 조용해졌어."
사령관의 넋두리 같은 감상에 테카이는 아무런 의사도 표시하지 않았다. 통상 작전처럼 경계를 하며 골목과 어스름을 주목하고 레이더파 반향을 살폈다. 헬멧에 띄워진 장비창에는 수류탄 두개가 활성화 상태로 대기하고 있었다.
"자네는 장군이 되면 뭘 하고 싶나?"
"별다를 것이 없습니다. 작전에 투입되고, 총을 쏘겠죠."
"흥. 장군이 되서도 그렇게 생각하면 곤란하네."
손에 든 권총을 내리고 여유롭게 걸어가고 있는 사령관의 모습은 밤거리를 가볍게 산책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주위에 대한 아무런 경계심도 없는 모습에 테카이는 언짢음을 느꼈지만 아무런 토도 달지 않았다. 12번쯤 격추 당하고 생환하다보면 이런 잠입임무는 시시해지는 모양이었다.
"자네는 이런 시대에 태어난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테카이는 어깨를 으쓱하고 개머리판을 다시 견착했다. 그러나 목소리에 불쾌한 감이 묻어 나왔다. 내심 알아챘을까 싶었지만 사령관은 변함이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80여년 전 최초로 떨어진 궤도폭격에서 살아남았던 테카이와 가족들은 살아남은 군부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외계인의 부대에 당해 먼지로 사라져 버렸다. 테카이는 다시 정신을 집중했다. 옆에 있는 사람은 최고위 사령관들 중 한 사람으로 한번 목숨을 잃으면 그 전략적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총알은 사람을 피해가지 않습니다."
"이야. 역시 철두철미하군. 그다지 크게 위협적인 건 없는 것 같은데? 쟤들도 이런 빗속에서 돌아다니기는 싫을 거야."
계급차이가 대여섯이나 나면 조언도 잘 먹히지 않는 법이다. 테카이는 고개를 흔들어 헬멧에 흐르는 물을 털어 내고 길 앞쪽에 있는 7층 건물을 벡터로 한번 훑었다.
"경계의 기본을 모르시지는 않으리라 믿습니다만, 이런 상황에선 어떤 기지든 경계를 강화합니다. 임무가 실패하는 건 가급적 보고 싶지 않군요."
"너무 날카롭게 굴지 말게. 내가 이런 비 오는 풍경을 좋아하거든. 조금 감상적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나. 대공경계망이 크게 변화하는 기색은 없군. 라시스는 잘 숨은 모양이야."
테카이는 사령관의 수다를 들으며 생각을 정정했다. 전설적인 베테랑이라 하더라도 하늘 위에서 지휘만 하는 고위장성이 땅 위의 상황을 제대로 알리가 없었다. 여태까지 생존한 만큼 기본적인 전투경험은 있겠지만 전투기만 몰던 사람이 제대로 된 보병전투를 할 수 있을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테카이는 주변을 경계하며 다시 정보를 불러왔다.
20일 전 파견되었다던 분견대의 마지막 보고 위치는 마천루들이 모여 있는 중심가의 고층 빌딩이었다. 과거 네슬렌 주식회사의 사옥이었던 그곳에서 약간의 관측 정보를 보내온 후 실종된 분견대는 아마도 공격을 받아 전멸했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그 후 구름이 모여들어 폭풍으로 바뀌는 바람에 그 이상의 자세한 관측 정보는 받지 못했다.
귀환한 대원은 없었고 지금은 비상 전파 신호도 잡히지 않았다. 기밀 유지를 위해 정보 파기를 제대로 했기만 바랄 뿐이었다.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이런 곳에 침투하려면 특수전 한 개 분대는 필요합니다. 더구나…."
"자네 말대로야. 너무 몸집이 컸네."
테카이는 입을 다물었다. 사령관급이면 이미 작전의 전말 정도는 훤히 알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어두침침한 가운데에도 그래픽 실루엣으로 강조된 헬멧이 혀를 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테카이는 전방손잡이에서 손을 떼어 가슴에 달린 리모칼을 만졌다.
"인명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 움직여."
비가 새까맣게 흐르는 으스스한 거리 안쪽으로 파고들수록 빗소리가 무언가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행군거리는 거의 1km에 가까워져 있었고 번개가 번쩍일 때마다 어디서 뭔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테카이는 앞서 가는 사령관의 등을 보며 계속 걸었다. 군문에서 오래 지내며 수없이 많은 작전과 탈출을 감행하다보면 옆에 있는 사람과 자연히 동조해서 움직이게 된다. 발소리를 같이 맞춰 작게 들리게 하는 것은 기도비닉의 첫번 째였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은 경계의 기본이었다. 손에 들린 총은 적의 전열화학식 총에 비해 우월한 소형화 레일건이고 몸에 두른 것은 전신강화복으로 웬만한 총탄에도 손상이 가지 않으며 주변 상황에 맞춘 능동위장까지 제공하는 물건이었지만 전장의 기본은 역사에서 배운 것과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클로소스."
"응?"
"공군은 어떻게 싸웁니까."
사령관은 약간 당황하는 듯 싶었다. 발걸음을 멈추지는 않았지만 손에 쥐고 있던 권총을 어깨에 척 걸치고 잠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방약무인하고 아무런 긴장감 없어 보이는 태도는 사실 조종사들에게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테카이는 몇 번에 걸친 추락 조종사 구출 임무에서 야전과 적들의 추격에 지치고 부상당한 조종사를 보았다. 엄청난 속도로 나는 전투기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딘 조종사들은 해병대와 동일한 생환훈련과 전투기술을 훈련받았지만 근본적으로 테카이처럼 전문적인 야전 요원은 결코 되지 못했다.
"그래. 좋은 질문이야. 자네는…근접 항공 지원이나 수송선 밖에 경험해 보지 못했겠지."
테카이는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사령관의 통신을 기다렸다.
사령관은 손에 든 권총을 만지작거리며 바라보다가 멀리서 번개가 번쩍이자 반사적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수천 대의 전투기와 수백 척의 전함을 지휘하는 장군도 이런 단순한 질문에는 대답하기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언제나 휘하 장교들에게 말하네. 땅 위에 있는 전우들을 잊지 마라. 솔직히 위에서 바라보면…전부 다 장난감처럼 보이거든. 허공에 떠 있다는 건 기묘해. 비싼 전투기 안에 앉아 있으면 머리 위로 포격이 떨어지고 아래에서 대공미사일이 올라와도 뭔가 현실감이 없어. 비행착각이야. 그래서 죽은 녀석들도 많지."
장난감.
테카이는 소리내지 않고 입술만으로 곱씹으며 총구를 따라 헬멧에서 흔들리는 탄도지시선을 노려보았다. 야전요원인 그에게 공군이란 적이든 아군이든 달갑지 않은 대상이었다. 가끔은 절호의 구원자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공군을 부를 때에는 임무 실패, 적 공군에 노출될 때에는 목숨을 포기해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이어지곤 했다.
손에 든 최첨단 기술이 집약된 레일건은 공중에서 떨어트리는 반물질 탄두가 담긴 폭탄에 비하면 새총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무기와 고출력 X선 레이저를 장비한 전투기를 타고 수십 대에 달하는 무인기의 호위를 받으며 날아다니는 파일럿의 입장이라면 땅에서 기어다니는 전투 사단은 모래알과 같은 느낌이 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테카이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령관은 그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을 거야. 고대로부터 누구도 그 간격을 메꾸지는 못했어. 앞으로도 그럴거고. 나라고 해도 다른 건 없어. 이해시킬 생각은 없네. 하지만 위에서 보면 정말 많은 것들이 보인다고 말하고 싶네. 파일럿들은…!"
우뚝 멈춰 선 사령관의 허리가 옆으로 흐르며 순식간에 몇 개의 수신호가 그어졌다.
무선 봉쇄. 엄폐. 적.
테카이는 즉시 반대편 건물 아래로 전력 질주해 건물 모퉁이 아래에 있는 부서진 콘크리트 더미 뒤에 엄폐했다. 앞에 있던 자동차 아래로 엄폐한 사령관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부서진 콘크리트 위로 빠져 나온 철골에 벡터를 올려놓고 단단히 견착한 테카이는 몸을 잔뜩 긴장시키고 호흡을 안정시켰다. 침묵이 찾아오자 억수로 쏟아지는 빗줄기의 소리가 한층 더 거세져서 긴장감을 배가시켰다.
문득 전방 표시창에 경고 알람과 전파추적이 시작되었다.
자욱하게 쏟아지는 비속에서 적외선을 비롯한 열감지 탐지 수단은 그렇게 유효하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수없이 떨어지는 빗방울의 반향에 청음 센서도 거의 먹통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가 건너편 벽과 부서진 창틀, 꺾어진 표지판 따위에 반사된 강렬한 적외선 서치라이트 불빛이 이리저리 난반사 되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금방 빗속에서 뭔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율 정찰 로봇. 적외선 감지 센서, 진동 센서, 광대역 전파 탐지 센서. 5.56mm 화약 격발식 기관총.'
머리 속에 자동으로 떠오른 단어들이 눈앞에 떠오르며 전투복이 로봇의 확실한 위치를 붙잡아 화면에 표시했다. 꼬리표가 자동으로 따라 붙으며 저위험 표적임을 표시했다.
3대가 한 조로 이루어진 6족 로봇들은 빗속을 뚫는 요란한 모터소리와 사방을 향해 광고하듯 쏘아대는 적외선 서치라이트를 휘두르며 테카이와 사령관이 숨은 길로 움직였다.
기지 경비를 위해 풀어놓는 무인 로봇이었다. 벡터에 내장된 레이더의 출력으로도 간단하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 쉬운 표적이지만 원래 그런 로봇들은 자율 정찰이라도 네트워크에 연결된 채 계속 상황보고를 한다. 어느 한 순간 연락이 끊기면 당장 경보가 울릴 것이 틀림없었다.
숨을 살짝 내쉬고 벡터의 방아쇠에서 손가락을 뗀 테카이는 차분히 기다렸다.
외계인의 전자기술은 상당히 투박하고, 모터소리가 나는 저급 정찰 로봇들은 적외선의 반사광으로 보아도 그다지 괜찮은 것들은 되지 못했다. 서치라이트가 몇 번 전투복에 와 닿았지만 주변 풍경에 녹아든 위장색 때문에 로봇들은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했다.
하늘을 채우던 통신신호가 완전히 끊어지고 나서야 사령관이 불쑥 몸을 일으켜 주변을 경계하고 수신호를 날렸다.
1차 접촉, 필요할 경우 통신, 정밀 탐색, 접근시 발포 금지.
테카이는 수락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고 사령관에게 답문을 날렸다.
전위, 엄폐 유지, 출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나 벡터를 다시 견착하고 조심스럽게 건물 모퉁이까지 간 테카이는 슬쩍 사거리 길을 내다보았다. 왼쪽엔 아무 것도 없었고 오른쪽엔 약한 전파신호가 수신됐지만 큰 문제가 없는 수준이었다.
다시 고개를 끄덕여 안전을 알린 테카이는 휘릭 몸을 돌려 정찰로봇들이 온 길에 조준을 유지한 채 반대편 건물 아래로 신속히 이동했다.
"예상대로 기지 경계망이 증강됐군. 이후에 파악되는 사항은 따로 정보를 모은 후 교차 검증을 하겠네. 알겠나."
"예."
뒤이어 따라 온 사령관이 어깨에 손을 얹고 통신을 했다.
"좋아. 이제 시작이야. 전위를 맡게."
첫 정찰을 마주치자 유유자적하던 사령관의 태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목소리에 기백이 실렸다. 여유가 있을 때는 풀어졌지만 본격적인 작전행동에 들어가자 무시할 수 없는 힘이 느껴진다. 테카이는 헬멧 안으로 긴장된 숨을 들이키고 발을 옮겼다.
정지. 위쪽, 지붕.
후방의 사령관에게 수신호를 보낸 테카이는 조심스럽게 지붕을 보았다. 슬슬 도시 바깥의 주거지역에서 상업지역으로 들어서는 와중에 마주친 삼거리에는 지붕마다 하나씩 무인 센서가 설치되어 길을 비추고 있었다.
뒤에서 숨죽인 발소리가 들려오다가 어깨에 손이 얹히자 테카이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왼쪽 상가 지붕에 동작감시 센서와 열영상 센서, 무인총탑, 오른쪽 지붕에는 적외선 센서, 단파 레이더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중간에 마주친 정찰로봇의 정찰 주기는 약 30분. 테카이는 그것을 머리 속에 넣고 다시 마주친 거치 센서 경계망을 지도와 대조해보았다. 지금까지 4블럭을 경계망을 따라 이동했지만 높은 밀도로 설치된 센서망 때문에 안쪽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다행이 경계망 자체는 기지를 중심으로 동심원 모양으로 배치된 일반적인 구성이라 큰 문제는 없었지만 빈틈을 찾기가 힘들다.
때마침 비마저 살짝 잦아들고 있었다.
"정면 돌파하는 수밖에 없나. 상당히 고밀도로 설치한 방어망이야. 라시스를 불러 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사령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거기엔 일정한 파장이 계속 쏘아지고 있는 대공경계레이더가 하늘을 빈틈없이 비추고 있었다.
"여기부턴 내가 전위를 맡지. 저쪽 사령관은 꽤나 꼼꼼한 모양인데, 어디 부하들까지 그런지 볼까?"
"괜찮으시겠습니까?"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고."
자신감이 충만한 긴장감 없는 목소리로 답한 사령관은 테카이의 어깨를 툭 쳐 물러나게 했다. 엄폐물에 붙어 서서 바깥으로 권총만 내민 사령관이 살짝 총을 휘두르며 관측을 했다. 그의 어깨에 손을 얹은 테카이는 전투복에 흘러드는 정보를 보고 무심결에 감탄성을 흘렸다.
지도에 표시된 관측정보는 벡터로 얻을 수 있는 것과 확연히 틀렸다.
거리, 높이, 전파 세기, 전파 방향, 열원 감지, 심지어는 전원선로의 미미한 열기까지 빗속에서도 잡아냈다. 가능한 성능인가 싶기 이전에 이 정도 장비를 가지고 있다면 돌파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테카이는 지도를 검토해봤지만 지붕에 설치된 센서는 서로의 사각을 거의 완전히 커버하고 있었다.
"좋아. 움직인다. 은폐기능을 최고로 올리고 내 뒤를 바짝 따라오게. 절대 떨어지지 마."
단호한 목소리에 테카이는 사령관의 어깨를 살짝 터치하고 전투복을 조작해 은폐기능을 최고로 올렸다. 손에 든 벡터의 색깔이 검은색에서 주변의 색을 받아들여 밝아지다가 다시 안정되며 완전히 주변에 녹아들었다.
엄지손가락을 뻗은 주먹을 어깨 위로 들어 대기를 명령한 사령관은 계속 지붕 쪽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득 주먹을 내리고 권총을 잡은 다음 재빨리 엄폐물에서 달려나갔다.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던 테카이는 그의 족적을 좇아 바짝 붙어 달렸다.
동물적으로 움직이는 사령관의 움직임은 테카이로선 따라가기 벅찰 정도였다. 길가에 세워진 자동차 위를 소리 없이 구르고 바닥에 내려서자 단거리 도약으로 길 저편까지 뛰어 넘는다. 그리고 테카이가 올 때까지 지붕을 바라보다 휙 뛰었다.
길을 인도하는 고참의 등을 쫓아 달리는 것은 정말 오래간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테카이는 그럴수록 불안해져 벡터를 가슴 깊이 붙였다.
저렇게 앞을 달리는 고참과 선임들이 총격을 맞고 거꾸러지는 것은 너무나 흔했다. 옆에 서 있는 동기도, 뒤에 쫓아오는 후임과 부하들도 언제나 그렇게 한 순간에 허무하게 스러졌다. 이제는 셀 수 없는 시간동안 수행해 온 작전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 나온 대원은 그 혼자였다.
"이쪽으로."
마침내 다다른 반대쪽 건물 벽에 붙어 서서 수신호를 보낸 사령관은 하늘을 힐끔거리며 동태를 살피다가 등을 기대고 있던 유리창을 부쉈다.
안은 그다지 약탈당한 흔적이 없는 옷 가게였다.
테카이는 배낭의 주머니에 손을 넣어 거치식 센서들을 몇 개 꺼내 주목할만한 창가 옆에 설치했다. 사령관은 가게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권총을 내려놓고 배낭과 헬멧을 벗었다.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나는 푸른 머리카락이 흐트러졌다.
"바람이 잦아드는데. 폭풍은 앞으로 3일은 더 지속된다고 하지 않았었나?"
"국지적인 소강상태로 보입니다. 구름은 옅어지지 않았습니다."
"경계 자체는 느슨해 보이는데, 병력 배치 자체는 정석적이군. 어떻게 생각하나? 하늘 위에 오래 있다보면 감각이 조금 틀려진다네."
헬멧을 벗고 전투식량을 하나 꺼내 문 테카이는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잠시 생각했다. 사람도 그렇지만 저들도 개체 자체는 그다지 큰 능력을 가지지 않은데다 강화도 되지 않아서 이런 날씨에 적극적인 작전을 벌이기는 무리였다. 그리고 야전에서 험하게 굴리는 전자장치들은 망가지기 일쑤여서 경계라인 강화는 무리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사령관은 그런 면에서 침투작전의 전문가인 테카이에게 묻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현재 기상 상황으로 보면 경계 작전 자체는 상당히 무리하고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가용 병력의 부족을 무인 전력으로 대체하고 있는 듯 싶지만 그 무인 전력도 공백이 보입니다. 조금 더 움직이면 틈도 보일 것 같지만, 그럴 시간까진 없어 보입니다."
"흠. 그렇군. 틈이 보일 때까지 움직이고 싶었지만 탈출하는 시간도 생각해야 하니. 전투식량 좋아하나?"
"괜찮습니다. 적어도 단맛은 있습니다."
열량을 최우선으로 한 갈색 막대기는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쓰고 달았다. 누구나 그걸 좋지 않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지만 감히 사령관 앞에서 말하기는 껄끄러웠다. 그리고 쉴새 없이 움직일 때는 적어도 공복감은 채워주는 물건이었다. 한 개가 아까웠다.
"그런가? 부하들은 거룩한 똥이라고 부르던데? 나도 이의는 없어."
사령관의 투정에 테카이는 아무 말 없이 나머지 조각을 먹어 치웠다. 군대에 들어오기 전 만들던 빵에 비하면 정말 저렴한 맛이다. 사령관도 말만 그런 모양인지 손에 들고 있던 조각을 우물거리는 입에 던져 넣었다.
"그러고 보면 에피앙이 멀쩡한 건 전쟁 전이었는데 말이야, 엉망으로 부서져도 여긴 아직 아름답군."
"저는 처음입니다."
"그래? 하긴 자넨 비질리아 출신이었지. 난 전쟁 전부터 군인이었네. 전투기에 타고 싶었거든. 자넨 뭘 하고 있었나?"
"흔합니다. 빵집에서 일하고 있었죠."
"흥. 난 산 속의 경계부대에 있어서 첫 폭격에서 살 수 있었네. 산 너머로 보이는 불길은 참 예뻤지."
테카이는 벡터에 묻은 물을 털어 내고 탄창과 배터리를 점검했다. 보병용 저위력 표준 레일건인 벡터는 제식 소총인 만큼 상당한 신뢰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끔 배터리 접촉 불량이 일어나곤 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첫 폭격 때는 정신 없이 도망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가 없을 정도였지만 그때는 동네 빵집에서 일하는 철없는 아이일 뿐이었다. 한번 떨어지면 동네 하나가 사라지는 불덩이의 폭격 속에서 멀쩡히 살아난 것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기적과 다름이 없었다. 군대에 들어오고, 온갖 위험한 훈련과 작전을 수행하고 지금까지 있는 것은 끝없는 그 기적 같은 운 덕분이었다.
"운이란 것은 덧없는 것이네. 처음에 내가 속해있던 비행단은 이제 남아있지 않아. 요행히 탈출했던 상관도, 몇 번의 격추에서도 살아남은 질긴 후임도 가버렸지. 자네는 몇 사람의 목숨 위에 서 있나?"
"수도 없습니다. 쉬었으면 가죠. 바람이 다시 거칠어집니다."
"흥. 자네의 그런 면이 좋군."
사령관은 코웃음을 치며 권총을 들어 점검하고 헬멧을 썼다. 일견 건방진 말이었거니 싶어 불안해졌던 테카이는 태연한 4성 장군의 태도에 속으로 한숨을 삼키고 다시 장비를 점검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있었다.
빗줄기는 잠시 약해져 있었지만 흉흉한 바람은 그대로였다. 조명 한 점 없는 거리에 거센 바람을 따라 파편과 간판 등이 굴러다니면 결코 무시 못할 장애물이 되었다. 도시를 뒤덮은 폭풍 구름은 일반적인 암시장비를 무용지물로 만들고 수시로 쏟아지는 천둥과 벼락은 탐색파에 사소한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침투하는 입장에서는 유리했다. 무인 센서와 기총들은 특별히 계속 관리해 주지 않는 한 먹통이 되고 문제가 일어나고 고장이 잦는다. 그 이상의 효용이 있으니 쓰는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사람이 없다는 것은 감시의 공백이 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 사이를 사령관과 테카이는 교묘히 파고들어 시가지를 뛰어 넘었다.
"40분 지났습니다."
5번째인가의 경계라인을 돌파한 직후 테카이는 헬멧 바이저 한쪽 구석에 떠 있는 시계를 보고 작게 말했다. 세찬 폭우가 다시 일기 시작해서 거리는 물 폭탄의 폭격을 맞는 소리가 요란하게 퍼지고 끊임없이 번개가 작렬했다. 주위에 있는 건물들은 이제 요주의 저격장소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높아지고 커졌다. 시 외곽에서 중심가로 접어들었다.
"저쪽이군. 저기 반대편 지붕에 열영상 장비가 있으니 조심하게."
적 부대의 보급 사정은 꽤나 좋은 편이었다. 지나가는 곳곳 센서나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고 몇 번이나 피해서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경계병력 자체는 거의 보이지 않아 병력에는 여유가 없거나 사고를 우려하고 있는 듯 싶었다.
테카이는 사령관이 가리킨 센서의 위치에 표시가 부여된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건물 모퉁이에 몸을 숨기고 살짝 내민 총구에 빗물이 엄청나게 튀겼다. 사령관은 총의 내장 레이더로 거리를 죽 훑어보고 손을 어깨 위로 올렸다.
손가락 세 개.
셋, 둘, 하나.
숫자를 센 다음 사령관은 넓게 트인 8차선 도로 반대쪽으로 달려나갔다. 세찬 빗줄기를 칼처럼 가르며 반대쪽 건물 벽에 들이 받힐 듯이 뜀박질한다. 테카이는 그 등을 보며 전력질주했다.
느닷없이 총소리가 들렸다.
앞서 달려가던 사령관이 그대로 앞구르기를 하며 넘어지자 테카이는 가슴이 철렁거렸지만 그는 재빠르게 다시 일어나 방향을 바꿔 전력으로 뛰어갔다. 엄청난 속도였다. 전력질주하는 테카이의 두 배 속도로 나는 듯 달려간 사령관은 전방 건물의 유리창을 그대로 몸으로 깨버리며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그 뒤를 따라 테카이가 뛰어 들어가자 또 한번 총성이 들렸다.
"찾아!"
사령관은 어느새 길다란 소총을 꺼내 든 채 양각대를 펴며 일갈했다.
단호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창문으로 접근한 테카이는 사각에 몸을 숨긴 채 열영상 화면을 켰다. 빗줄기 때문에 식별하기가 어렵지만 해상도를 최대로 높이자 센서는 용케 아지랑이처럼 열기가 퍼진 곳을 찾아냈다. 어슴프레 보이는 도로 바닥에 부서진 돌 조각들이 보였다. 목표를 지정하자 기록된 소총소리와 함께 대조되어 탄도 분석이 시작됐다.
정확히 0.5초 후에 계산식이 떠오르고 탄도가 눈앞에 표시되었다.
상당히 누운 각도로 땅에 박힌 총알의 예상 궤도산출은 8차선대로 저편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사원 종탑에서 발사된 것으로 추측되었다.
"저격하겠다."
테카이가 사령관의 어깨를 잡자 데이터가 전달되고, 사령관은 양각대를 옆에 있는 벽에 박아 넣었다. 짧은 폭발음과 함께 돌 부스러기가 휘날리며 볼트가 박혀들자 뜻 밖에도 총열이 칼을 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저격용 2차 가속 레일이 달린 고급 소총이었다. 테카이는 살짝 놀라 바라보았다가 다시 경계에 집중했다.
사령관용으로 특별히 만들어진 물건인 모양인지 소총의 내장 레이더 출력은 벡터의 최대출력을 가볍게 상회했다.
"엄호."
짧게 구호를 외치고 사령관의 앞에 있는 유리창으로 달려간 테카이는 레이더에 환하게 빛나서 선명하게 보이는 종탑에 대고 신중하게 사격을 가했다.
"쥐새끼 같이 숨었군."
어깨를 한번 턴 사령관은 숨을 고른 다음 그대로 붙박이처럼 얼어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맹렬히 회전하는 소음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만 이어졌다.
테카이는 숨을 죽인 채 거리를 지켜보았다.
강력한 레이더가 있는 것은 좋지만 그것은 서치라이트나 마찬가지였다. 외계인들의 전자기술이 조악하다곤 하나 무인경비장비에 기본적인 광대역 레이더 정도는 장착할 수 있을 수준은 되었다. 다행이 세찬 빗줄기에 접근하는 다른 적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경계하는 시간이 길어질 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파앙!
갑자기 들리는 총성에 놀란 테카이는 어깨를 떨며 사령관을 돌아보았다. 연달아 두 번 더 소총의 총구에서 불꽃이 번쩍거리며 강렬한 열기가 공기를 이그러 트렸다. 레일건의 단점은 강력한 총알의 위력에 강렬한 열기로 데워지는 주변 공기에 의해 발각되기 쉽다는 기초적인 설명이 문득 떠올랐다.
"처리했다. 움직인다."
사령관은 박았던 양각대를 뽑고 소총을 뒤로 돌려 넣었다. 배낭 옆에 끼고 있던 금속 상자가 저절로 열리며 소총을 받아들어 내부로 감쌌다. 전용 컨테이너까지 있는 모양이니 어지간히 고급장비인 모양이었다.
"뭐하고 있나? 빨리 움직이게."
"아, 예."
마음이 많이 풀어졌다.
권총을 집어들고 슬쩍 바깥을 내다보는 사령관을 바라보며 테카이는 어느새 느슨해진 마음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마음을 놓고 있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고 있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 방금 전에도 적 저격수가 어설프게 총알을 날리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것이다.
테카이는 준비를 끝마치고 사령관의 뒤에 섰다.
사령관의 강화복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고 테카이에게 보이는 화면에는 그의 머리에 클로소스라는 호출명만이 나타날 뿐이다. 하지만 그는 스톨레 공군 전부를 책임지는 공군사령관이다. 그런 중요인물이 이런 위험한 단독 침투 작전에 나왔다는 것 자체가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 스톨레에 부는 거대한 폭풍 두개 때문에 전선이 소강상태라고 해도 어째서 직접 와야했는지 의문 투성이었다.
앞장서서 달리는 사령관의 뒤를 따르며 테카이는 그의 등이 왠지 커다랗게 보여 눈을 의심했다. 몇십 번이나 되는 작전을 거쳐 살아 남은 그는 언제나 주위 전우와 부하들을 책임지는 상관이었다. 죽은 사람만큼이나 그가 살린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같이 빗속을 달리는 자는 그보다 몇 계급이나 높으며,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전과는 테카이로서도 고개가 내저어질 정도로 한심스런 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앞서 달리는 등을 보면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날은 어두웠다.
분견대의 최종 좌표로 잡힌 엘 라하 호텔은 폭격에 반쯤 무너져서 주위 거리를 온통 파편으로 쌓아놓고 있었다. 그 밑에는 일반 차량과 장갑차, 백골이 되어버린 시체들이 깔려 있고 그 위로 치열했던 교전의 흔적을 비가 씻어 내리고 있었다.
"좌표 상으론 이곳이 마지막이군."
건물 파편을 타고 기어올라가 안쪽에 숨은 사령관과 테카이는 총구만 머리 위로 올려 사방을 감시했다. 엘 라하 자체는 10층부터 20층까지가 완전히 박살난 건물이라 용케 서 있다 싶을 정도로 내부는 엉망이었다. 그 위층으로 접근하는 방법은 사실상 없었다.
2km 정도 떨어진 적 기지는 등화관제를 하고 있지만 주변에 설치된 대공레이더들에서 뿜어내는 전파는 온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지옥 같은 폭우 속에서도 기지에서 피어오르는 열기는 열영상 장비를 환하게 비출 정도였다.
"그냥 들어가기엔 위험합니다. 분견대 탐색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지 않습니까?"
"분견대의 관측 데이터가 필요해. 적어도 기지 근방까지는 접근했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봐선 그다지 필요할 것 같진 않군."
시간이 촉박하다. 테카이는 몸을 숨기고 다시 총을 고쳐 잡았다.
조금 전 적 저격수를 해치웠고, 경계병력의 빈틈은 곧장 발견될 것이 틀림없다. 심야라 경계가 느슨해져 있긴 하지만 저쪽이 완전히 마음놓고 있지 않는 정기연락도 하지 않을 일은 없다.
"3시. 목표 셋. 엄폐하게."
사령관이 파편 아래로 내려가 틈 사이에 숨었다.
테카이는 재빨리 감시 장비 하나를 돌 틈에 숨겨두었다. 그리고 헬멧에 영상을 불러와 시야를 조정했다.
"제대로 온 모양입니다."
"그래. 나태해져 있군."
무너진 돌 더미를 피해 걷고 있는 병사 세 명은 세찬 빗속에서도 빨갛게 담배 불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암시장비의 시야 한가운데서 그 불빛이 또렷하게 보였다. 테카이는 강화복의 컴퓨터를 이용해 노이즈 캔슬링을 시행한 후 희미하게 묻혀 들리는 말소리에 주목했다.
"shit, rain…."
"시시한 잡담이야. 이런 빗속에서 야간근무는 여간 짜증나는게 아니겠지."
"아직…잠깐."
테카이는 손을 들어 사령관의 말을 멈추었다. 잦아든 빗소리를 배경으로 병사들이 나누는 잡담에 중요한 듯한 내용이 섞여 들렸다.
"2시, 보급선…출발. 경계…약화."
"보급선이라, 이런 악천후에 잘도 띄우는군. 하긴 전선이 500km나 밀렸으니 후방 보급점이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닌가. 겨우 2년 만에 꽤나 밀리는 군."
"전반적인 무장 수준은 평이합니다. 다른 이동 수단이나 무인 수단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령관은 가볍게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테카이를 바라보았다.
"따라간다. 유지 거리는 100m. 이제부터 바짝 정신 차리게."
테카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화면을 주시했다. 방수포를 쓴 경계병들은 잡담을 나누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다시 행군하기 시작했다. 계속 바라보며 대기하고 있다가 거리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감시장비를 회수한 테카이와 사령관은 그 뒤를 조용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