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옹이의 글터
2008년쯤에 고라에 끄적이다가 만 글인데...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끄적여 봅니다.
그동안 게임만 하고 놀기만 했더니 글이 안 써지네요.
-------------------------------------------------------------------------------
마왕은 누운 채로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꺼져가는 모닥불의 온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고 하늘은 맑았다. 마기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깨끗한 밤하늘이었다.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왕은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서 졸고 있는 좀비를 발로 툭툭 쳐서 깨웠다.
"근데 말야. 정말 우리 승산은 있는 거야?"
"무슨 말씀이십니까?"
좀비는 졸린 눈을 비비며 입이 찢어지게 하품을 했다. 좀비 치고는 지나치게 똑똑해 대마도사의 리치가 모습을 바꾼게 아닌가 의심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리치였다면 마기를 감지하는 성단기사들이 지금까지 가만 두었을 리 없다. 그들이 성단기사에 입문하면서 제일 먼저 익히는 성스킬은 마기를 추적하는 능력이다. 기사단장정도 될 실력이라면 대륙 끝에 있는 마기까지도 추적 가능한 수준이라니 리치 정도의 마물은 이 대륙 위에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봐야 할 거다.
"생각해봐. 마왕은 이미 토벌되고, 마왕군은 좀비 한 마리 뿐이고, 사룡이나 뭔가 리치왕이라든가, 몬스터 군단 같은 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 고작해야 있는 건 가끔 빛이 나는 소녀 하나랑 미모와 지력을 갖춘 신출내기 마왕 하나 뿐이잖아. 반면에 적은 5개 왕국의 영웅왕들이랑 성단기사단, 그리고 모험과 공적을 갈구하는 영웅왕의 자식들, 친구들, 마법사들, 영웅지망생, 대현자랑 기타등등 이거 게임이 되기는 하는 거야? 그냥 칼 물고 칵 엎어져 죽어야 하는 거 아냐?"
"마왕님 역시 냉철한 판단이십니다. 사실 저희에게 승산이 별로 없는 건 사실이죠. 하지만 저희가 꼭 불리한 싸움인 것만은 아닙니다. 이 세상은 균형이라는 게 있거든요. 마기와 정기가 서로 맞물려 조화를 이루게 되는데 어느 한쪽이 핀치에 몰리면 자연스럽게 다른 쪽에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패널티? 뭐 그럼 신성력이 사라지거나 교황이 마기에 사로잡혀 미친다거나 뭐 그런 일이라도 일어나나?"
"그 정도까지는 아니고요. 신성력에 심취한 자들이 후손을 남기지 못한다거나, 영웅이란 놈들이 지들끼리 쌈박질을 한다든가 그런 거죠."
"그럼 우리한테 좋은 건 뭔데?"
"마왕님은 자손이 번성할 것 같다는 이야깁니다. 아들딸을 숨풍숨풍...."
"이게 처녀에게 못하는 말이 없어!"
마왕이 좀비의 머리를 후려 치고 씩씩대며 돌아서자 좀비가 머리를 주워와 다시 결합하며 조용히 말했다.
"사실 마왕이 죽어도 마기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다음대 마왕을 향해 모여들게 되죠. 마기보존의 법칙이라고 합니다만."
"그럼 난 왜 이런 허접인데? 이게 무슨 마왕이야! 마졸이지! 아니 마졸도 이것보단 낫겠다."
마왕은 볼멘 소리로 투덜거렸다. 그 말을 들은 좀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제가 아는 범주에서도 마왕님은 제일 약한 분입니다. 아니 마왕군 역사에서도 그 정도로 약한 분을 찾기는 쉽지 않죠. 하지만 그건 다 이유가 있습니다. 마왕의 힘이라는 것이 마왕이 쓰러진 뒤에 성유물에 의해 봉인되었기 때문입니다. 저희 모험의 목적은 그 성유물을 치우고 마기를 복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 되면 마왕님의 힘이 되돌아옵니다."
"그럼 성단기사단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거야?"
마왕은 희망적인 말에 조금은 기대를 가졌다. 만약 성단 기사단에게 쫒기는 것만 피할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은 훨씬 나은 것이 될 테니까.
지금처럼 들짐승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건 무리죠. 풀 파워인 전임 마왕님도 성단 기사단과 붙을 생각은 안 하셨거든요."
"뭐야 그 놈들은 그렇게 최강인 거야?"
"아닙니다. 꼭 그렇게 쎈 건 아닌데 얍삽해요. 싸우기 짜증나는 상대입니다. 인질극이라든가, 협박이라든가, 뭐 하여간 드럽고 치사한 짓도 서슴치 않거든요. 정의의 이름으로 말이죠."
"그런 거라면 우리에게도 승산은 있어. 나도 얍삽한 놈들을 좀 알고 있으니까. 그 놈을 데려다가 싸우게 하자."
마왕은 도적 시절에 알고 지내던 동료들을 떠올렸다. 성단기사단이 아무리 강해봐야 그 놈들의 얍삽함에 도달한다는 것은 무리다.
성단기사단이 가진 얍삽함이라는 건 아마추어의 레벨일 터, 사기와 야바위가 일상 생활인 놈들 사이에선 답이 없을 것이다.
"그러다가 기사단에 스카웃 되는 건 아니겠죠. 음.. 그런 얍삽하고 치사한 놈들이 있으면 마졸로 만들어 버리십시오."
"마졸? 어떻게 만드는 건데?"
뭔가 살아남을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에 마왕은 눈을 반짝였다.
"음료나 음식에 마왕님의 정혈을 섞어서 먹이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그놈들은 마왕님과 심령이 연결되어 마왕님의 뜻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뭔가 흡혈귀 같은 이야기네."
"흡혈귀란 놈들은 어차피 마왕님의 권속들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그럼.. 이 놈들이 여기서 맴도는 건 내 피를 먹어 마졸이 된 까닭인 거야?"
마왕은 편대비행하며 주위를 날아다니는 모기들을 가리켰다.
"오. 마왕군 전력이 상승했군요. 좀 더 많은 권속을 만들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왕님. 목표는 있으신지요."
"목표라니?"
"그러니까 마왕이 되어 힘을 되찾으면 무얼 해야 한다든가. 나는 이런 세상을 만들겠다든가 하는 목표 말입니다. 앞으로 저희는 5왕국 연합체와 맞서 싸워야 하는데 그 이야기는 엄청난 고난 앞에 던져진다는 거니까요. 그런 힘든 일을 겪으면서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면 분명 어떤 이상이나 목표가 필요합니다. 농노제 폐지라든가. 아니면 귀족 신분 타파. 마물과 인간의 공존, 사회 부조리와 부패 척결, 가정폭력 퇴치, 기아와의 전쟁, 할렘건설, 마왕 1인 독재 체제 완성, 세계정복, 무정부주의의 완성, 자연으로의 회귀, 대륙온난화, 인류말살등 여러 목표가 있을 수 있겠죠."
"생각 안 해봤어."
"목표는 있는 게 좋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게 좋죠. 마기의 주인이신 마왕님께서 가진 생각과 품은 염원은 이 세상을 분명 어떤 형태로든 바꾸어 놓게 되니까요. 그리고 그런 염원이 저희의 모험에도 영향을 미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지금처럼 한가할 때 그런 생각을 해두시는 것도 좋습니다."
"세계 최고의 도둑이 되는 건 어떨까."
"도둑이 적성에 맞으시는 건가요?"
마왕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도둑질이 재미있어서 한 건 아니다.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일을 했겠지.
"백마탄 왕자와의 로맨스 같은 건 어때? 내가 마왕인줄 모르고 왕자가 프로포즈했다가 고뇌하게 되는 거지. 사랑이냐 왕국이냐."
어릴때 읽었던 로맨스 소설이 생각났다. 왕족이라는 게 생각과는 좀 달랐다는 걸 알게 된 뒤에도 그때 읽은 소설의 이미지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꽃돌이 왕자를 납치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그럴싸하군요. 기왕이면 기사단 채로 생포해서 지하에 우흐흐흐.... 공주를 납치하는 것보다는 쳐들어온 기사단 채로 생포하는 게 쉽긴 하겠네요. 함정만 제대로 놓으면 한방에. 큭큭큭. 공주들은 꼭꼭 숨겨놔서 잡으러 가려면 귀찮거든요."
"잠깐. 너의 저질스런 취향에 나를 끼워 넣지 말아줘."
마왕의 눈앞에 지하 공동을 가득 메운 반라의 기사단원들이 신음하는 모습이 잠시 떠올랐다. 위험한 상상이다. 마왕이 된다고 해도 최소한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여튼. 외로우신 모양이군요. 하긴 썩어가는 시체와 함께 여행하시는 입장에선 무언가 든든하고 믿음직스러운 누군가가 필요함직도 하죠."
"외롭다라."
도둑이 되고난 뒤에도, 그 전에도 외롭기는 매한가지였다. 외롭지 않은 적이 있었으랴. 고아로 떠돌다가 소매치기를 하다가 도둑이 되어 살다가 새끼마왕의 위치에 오르는 동안 뒤를 돌아보게 해주는 친구한명 딱히 없었던 것이다. 돈 떼먹은 놈이라든가 뒷통수를 친 놈들의 이름은 하나 하나 떠올랐다. 도둑이 되기 전에 자길 도둑으로 몰아서 몰매를 주던 이웃집 사람들도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이 딱히 증오스러운 건 아니었다. 마왕은 잠시 눈을 감았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일들, 그리고 앞으로 겪을 일들. 누군가에게 품은 원한보다 앞으로 쌓아갈 원한이 더 클지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마왕이 되는 길 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들이 싸우지 않고 행복하게 살아갈 방법 같은 건 없을까?"
"모든 인간을 잡아서 마졸로 만든 다음 마기로 다스리면 됩니다. 니들 싸우지 마라. 마왕의 명령이다. 라고 하면 절대 안 싸우죠. 팍스 데모나. 마왕에 의한 절대 평화라고나 할까요."
어이가 없어진 마왕은 그냥 몸을 돌려 누웠다. 작아진 모달불이 전해주는 온기가 줄어들자 좀비가 옆에 모아온 잔가지를 불 속에 집어 넣었다. 덜 마른 가지가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야영을 마치고 아침이 되자 마왕은 의도하지 않게 피를 빨아먹은 모기군단 1개 부대를 거느리게 되었다.
좀비는 빈대와 이, 벼룩을 동원한 마졸 육성계획을 내 놨지만 마왕은 단호히 거절했다.
세상은 원래 비정한 법이야.
자의적 헌혈로 인한 모기군단 육성 -> 적 진지에 풀어놓기 -> 감염으로 인한 아군화. 생화학병기를 쓰는 마왕이 되겠군요. 숙적으론 CDC나 WHO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