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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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영화 <퍼시픽 림> 때문에 이런저런 말들이 많습니다. 그 중 하나가 전투 장면이 유독 어둡다는 지적입니다. 거대로봇과 괴수는 대개 밤중에, 그것도 비까지 퍼부을 때 싸웁니다. 하기야 폭풍우 치는 한밤중은 긴장감을 조성하기 딱 좋습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어둠을 무서워하는데, 거기다가 거센 비바람까지 몰아치니 격렬한 연출에 알맞죠. 오죽하면 영문소설에 ‘It was a dark and stormy night’란 오프닝 문구까지 있겠어요. 하지만 저런 배경이 아쉽다고 토로하는 관객들도 있습니다. 컴컴한데다 빗물 때문에 로봇이랑 괴수가 잘 안 보인다는 겁니다. 컴퓨터 그래픽 효과를 감추려고 의도적으로 저렇게 찍었다는 말도 있고요. 잘은 모르겠지만, 그런 목적도 아예 없진 않겠죠. 그래픽 작업은 잘 모릅니다만, 주변이 어둡고 가려주는 게 있다면 티가 덜 나겠죠. 사실 괴수 특촬물에 야간 장면이 많은 건 비단 이 영화에만 국한하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전의 서양 괴수물도 그랬고, 일본 슈트 액션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비 오는 야간을 적극(?) 활용한 갓질라. 액션이 단순해서 별 욕은 안 먹었습니다.]
이런 꼼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대표 사례는 아무래도 <갓질라>입니다. 괴수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고서부터 도대체 화창한 날씨가 없습니다. 처음 뉴욕에 상륙했 때는 대낮이었지만, 억수같이 비가 내렸습니다. 그나마 이건 양반이고, 이후 군대와 본격적으로 전투하면, 밤중에다 역시 비가 퍼부었죠. 강에서 수중전을 펼쳤을 때도 침침하기는 다를 바 없었고요. 막판으로 나왔을 때는 그나마 비는 안 내렸으나, 컴컴한 밤이었습니다. 한번쯤 멀쩡한 대낮에 갓질라가 나왔을 법도 한데, 그런 장면은 끝까지 없었네요. 정말로 환한 날씨에 괴수가 나왔다면, 글쎄요. 그렇게 거대하고 무서운 짐승이 맑은 날에 돌아다니면, 별로 어울리지 않았을 것 같긴 합니다. 여하튼 이 영화가 개봉했을 때, 어두워서 보기 불편했다는 지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오히려 시각효과는 괜찮다고 했죠. 물론 작중의 갓질라의 액션은 별 거 없이 그냥 빌딩 사이를 뛰어다니는 게 전부라는 점도 고려해야겠습니다. 동작이 단순하니 어두워도 상관없었겠죠.
<클로버필드>는 좀 애매합니다. 일단 작중 사건은 밤중에 벌어집니다. 자유의 여신상 모가지가 날아가는 것부터 도시가 쑥대밭이 되고, 군대가 출동하고, 헬기로 탈출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밤중이죠. 하지만 이게 그래픽 효과를 감추기 위한 베일이라고 하기도 좀 뭣합니다. 괴수 클로버가 나오는 분량이 지극히 짧거든요. 군대와 교전할 때 얼굴이랑 앞다리가 몇 초 스치고 지나가는 게 전부입니다. 물론 환한 대낮에 이걸 보여줬더라면 제작비가 더 올랐겠지만, 어쨌든 몇 초 나오지도 않아서 가리고 자시고 할 게 없었죠. 나중에는 환한 새벽빛에 전신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마찬가지로 아주 잠깐이었습니다. 그나마도 폭격하는 와중이라 연기에 가렸고요. 또한 이 작품은 괴수의 파괴보다 주인공 일행의 도피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혼란의 도가니에서 우왕좌왕하는 인간상을 보여주죠. 그래서 밤중이라 답답하다는 지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보다 카메라가 하도 흔들려서(…) 어지럽다는 말이 더 많았네요.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미국 괴수물을 봤으니, 슈트 액션으로 찍은 일본 괴수물도 볼까요. 평성 가메라 3부작은 상당한 수작으로 평가 받습니다. 각각 갸오스, 레기온, 이리스가 나오는데, 이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메라와 싸우곤 했어요. 갸오스는 대낮에 사람을 습격하거나 공중전을 펼치기도 했으며, 모든 역량을 집중했을 막판 전투까지도 날이 훤했습니다. 레기온 초거대 개체와 최초로 맞붙을 때도 역시 대낮이었죠. 그렇다고 항상 밝은 건 아니었고, 적절하게 야간 전투도 보여줘서 분위기를 전환하고 긴박감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레기온이나 이리스와 싸울 때 그리 침침하다는 느낌이 없는데, 비록 밤중일지언정 영상 자체는 또렷하기 때문입니다. 괜히 비를 뿌리거나 연기를 피우는 요령도 부리지 않고, 최대한 괴수 전신이 웅장하게 드러나는 구도로 잡았죠. 뭐, 굳이 따지자면, 주간보다 야간 전투가 더 뽀대나긴 합니다. 아무래도 주변이 어두우면 긴장감을 형성하기 좋고, 괴수 슈트의 질감이나 광원도 가릴 수 있으니까요. 특히, 이리스와의 막판 싸움은 대낮이었다면 격렬함이 훨씬 떨어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가메라와 싸우는 레기온. 야간 촬영임에도 별 다른 장애물이 없어 그리 흐릿하다는 느낌은 없습니다.]
수작 슈트 액션을 봤으니, 이번에는 망작(…)도 이야기해야죠. <고지라 2000>은 아마 국내에서 유일하게 정식 개봉한 고지라 시리즈일 겁니다. 제한 상영 등은 한 적 있을지 몰라도 정식 개봉은 이게 유일한 것으로 기억해요. 하지만 하필 이 물건이 시리즈 중에서도 혹평을 받는 거라 안 좋은 이미지만 남기고 말았죠. 작중에서 고지라는 외계 비행체와 두 번 싸우는데, 첫 번째는 대낮이었습니다. 으음, 시각효과 품질은 과히 좋다고 하기 힘듭니다. 게다가 둘이서 가만히 노려보다 광선/열선이나 쏴주는 싸움이라 별다른 모션도 없었고요. 하지만 막판에 외계 비행체가 변한 오르가와 싸우는 장면은 볼만했습니다. 위의 가메라 사례처럼 야간 전투인데, 괴수를 가리는 장애물이 없어서 웅장한 구도가 돋보였죠. 이야기 전개나 캐릭터 구성, 주간 전투는 영 아니었지만, 막판 야간 쌈박질은 그래도 괜찮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 CG 2개, 일본 슈트물 2개를 봤는데요. <갓질라>는 시종일관 폭우가 퍼붓는 밤중이었으나, 갓질라 자체의 액션이 뜀박질이 전부라 별 불만은 없었습니다. <클로버필드>는 사실상 괴수가 거의 안 나오는데다가 카메라 흔들림이 심해서 어둡다는 비판이 없었고요. 가메라 시리즈나 고지라 시리즈처럼 일본 슈트 액션물은 주야간 전투를 혼합했습니다. 게다가 야간이라도 너무 어둡지 않고, 괴수를 함부로 가리지도 않았죠. 여기서 <퍼시픽 림>의 아쉬움이 드러나는데, 내용상으로는 일본 슈트 액션물입니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면, <갓질라>처럼 찍어놨어요. 내용 전개와 화면 연출이 서로 따로 돌아가는 거 아닌가 싶네요. 이왕 거대로봇과 괴수의 쌈박질을 보여줄 거면, 슈트 액션물처럼 솔직하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스트라이커 유레카가 무타보어를 쓰러뜨렸을 때처럼요. 그랬다면 다소 쌈마이스럽겠지만, 한결 시원하지 않았을까요.
※ 최근 샌디에고 코믹콘에서 리부트 <고지라> 영상이 나왔다고 합니다. 떠도는 영상을 보니, 아니나다를까 밤중에 창문 블라인드 너머로 보이는 모습이네요. 이거야 뭐, 초기 영상이니 어느 정도 얼굴을 가릴 목적도 있겠습니다만. 실제 작품은 야간 촬영의 비중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네요. 설마 1998년 <갓질라>처럼 밤중에 주구장창 비만 오는 건 아니겠죠. 이번 리부트는 <갓질라>와 달리 일본 괴수물에 더욱 가까울 것 같은데, 우천 야간만 있다면 <퍼시픽 림>처럼 답답하다는 비판을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코믹콘에 나온 리부트 고지라 모습이라던데, 역시 야간 장면으로 분위기를 잡아주는 것 같네요.]
※ 미국 블록버스터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괴수를 만든 본격적인 작품은 <쥬라기 공원>입니다. 그리고 밤중에 비가 퍼붓는 연출도 이쪽이 시초라 하겠습니다. (괴수가 아니라 공룡이 나오지만, 사람들 인식은 괴수나 공룡이나 거기서 거기니까 넘어가죠.) 이전에도 비슷한 연출은 있었지만, CG를 이용해 공룡을 선보인 시도는 여기서 비롯되었죠. 로봇과 컴퓨터 그래픽을 적절하게 섞었는데, 감독이 그래픽 효과를 감추려고 어둠을 택한 건지는 모르겠습니다. 원작 소설에서도 티-렉스 습격 장면은 폭풍우 치는 밤중이었거든요. 게다가 이 폭풍우란 게 공원 참사를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이라 그래픽을 감추는 베일로만 볼 수도 없고요. 작중의 존 해먼드는 이슬라 누블라에 폭풍이 친다는 걸 알면서도 환경청 감시를 피하려고 매입했을 정도니까요. 어쨌든 (감독이 의도했든 아니든 간에) 저런 배경은 그래픽 효과를 감춤과 동시에 긴장감을 배가시켰습니다. 일석이조 효과였고, 이후 나오는 괴수물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거죠.
쥬라기 공원때는 낮에 풀 CG를 오랫동안 보여주기가 어려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로봇과 모형을 섞어서 만들거나, 움직임을 빠르게 해서 자세히 보지 못하게 하거나, 혹은 원거리에서만 보여줬지요. 어차피 해상도란게 있고, 블러가 있으므로 빠르게 지나가거나 원거리에선 질감의 세부사항은 뭉개지게 마련이고...
밤에는 광원이 통제가 되고, 어두운 부분은 하이라이트에 묻혀서 자세한것 까지는 눈에 띄지 않지만, 낮에는 햇빛이 질감을 하나하나 드러내고, 여러 반사광으로 인해서 광원을 통제하기가 힘들어지지요. 생각해보니 트랜스포머가 왜 그렇게 뭐가뭔지 알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디자인을 했는지도 알것 같습니다.
밤에는 옷을 고르기 힘든것 처럼 말이지요.
비도 마찬가지로, 질감 통제가 쉬워질 것 같습니다. 물에 젖은 효과는 질감 쉐이딩을 어느정도 일률적으로 만들어줍니다. 아무래도 좀 더 유리하지 않을까요? 분위기는 부수적으로 따라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