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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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생각나는 로이 베티. 그리고 빗속의 눈물.]
전국이 장마로 화제입니다. 하루 종일 내리는 비 때문에 사고가 난 지역도 많고, 날씨도 어두워서 마음까지 우울해지는군요. 이런 속성 때문인지 장마나 우천은 SF물에서도 분위기 전환 삼아 종종 쓰이는 기법입니다. 거센 폭풍우가 몰아쳐서 재해가 일어난다거나 끊임없이 내리는 비로 우울함을 강조한다거나 하는 식이죠. 순문학 작품에서도 비를 이용한 연출이나 기법은 있습니다만, SF물은 비일상적인 사건이 자주 벌어지기에 그런 연출이 더 부각되는 법입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컴퓨터 그래픽을 이용하는 영화가 늘어났는데, 아무리 기술이 좋아져도 CG 처리를 제작비를 많이 까먹는 기술입니다. 그래서 이를 무마하려고 비 내리는 날씨를 고른다고 들었습니다. 하늘이 찌뿌드드하면 영상이 흐려 보이니까 그래픽 티를 조금이나마 감출 수 있으니까요. 또한 비가 내리면 다들 옷깃을 세우거나 비옷을 덮어쓰니까 비인간형 생명체나 괴물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죠.
이런 연유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블레이드 러너>입니다. 느와르 SF의 대표주자로서 온종일 내리는 비(그것도 산성비!)가 인상적이죠. 영화를 보노라면 마음까지 꾸물꾸물해지는 게 정말 꿈도 희망도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 미장센이 얼마나 기가 막히는지, 후대의 영화들도 뭔가 암울하게 보이려고 뒷골목에 하루 온종일 비를 뿌리는 게 클리셰가 되었죠. 무엇보다 로이 베티의 마지막 대사는 거의 시적이죠. 죽기 전에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담담히 회상하는데, 결국 수명이 다하면 그 기억 역시 사라질 거라고 말합니다. 비 속에 눈물이 스러지는 것처럼요. 뭐, 클럽에도 여러 번 읊었던 대사지만, 다시 한번 적어보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너희 인간들이 믿지 못할 많은 것들을 목격했어. 오리온 자리 부근에서 불길에 휩싸여 공격함과 탄호이저 관문 근처에서 빛나는 C 빔도 봤지. 이 모든 순간들은 시간 속으로 사라질 거야. 빗속의 눈물처럼. 이제 죽을 때가 되었어.”
소설 <쥬라기 공원>도 장마 때마다 생각나는 작품입니다. 아예 첫머리부터 코스타리카 해안에 비가 내리는 걸로 시작합니다. 작중 인물이 원래는 열대 해변의 낭만을 찾아왔지만, 끝도 없이 내리는 비 때문에 짜증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정은 쥬라기 공원을 세운 존 해먼드나 데니스 네드리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해먼드는 환경청과 라이벌 기업의 눈길을 피해 외딴 섬을 사들여 공원을 건설했습니다. 하지만 하필이면 폭풍이 곧장 지나가는 길목이라 재난이 불러 들였죠. 데니스 네드리 역시 공룡 수정을 빼돌릴 계획을 완벽하게 세워놨건만, 하필 비가 내리는 바람에 시야가 어두워 실패했습니다. 나름대로 다행이라고 할까요. 특히,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T-렉스 습격 대목입니다. 폭풍우 치는 밤중, 쏟아지는 빗줄기를 뚫고 나타난 거대 육식수는 그야말로 태고의 전율을 일으키기 충분했습니다. 번쩍이는 번개, 귀를 찢는 천둥, 그 가운데 울부짖는 육식 공룡….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폭우를 뚫고 나타나 포효하는 T-렉스도 잊을 수 없어요.]
롤랜드 에머리히가 감독한 <갓질라> 역시 처음부터 끝까지 주구장창 비가 내리는 괴수물입니다. 아주 질리도록 비가 내리는데, 날씨 화창한 날보다 비 내리는 날에 괴수가 습격하는 게 어울려서 그렇게 설정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관객 눈에는 컴퓨터 그래픽을 감추려는 요행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쥬라기 공원>은 폭우가 재난으로 이어진다는 설정이라도 있지, 이 영화는 비 내리는 거랑 내용이랑 아무런 상관도 없거든요. 악천후 때문에 군 장비를 동원하기 힘들다거나, 괴수를 찾기 힘들다는 언급도 없어요. 그러니 그래픽을 감추려는 시도로 보일 수밖에요. 저야 시각효과 기법은 잘 몰라서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지만, 화면이 어두우면 그래픽 티가 안 나는 건 사실이죠. 비가 내리면 광원이나 명암을 덜 표현할 수 있으므로 작업이 한층 수월해질 테고요. 그래서 <갓질라>는 (안 좋은 의미로) 비가 내리면 생각나는 영화입니다. 어이구야.
스튜어트 고든이 감독한 <다곤>은 러브크래프트의 <인스머스의 그림자>를 원작으로 한 영화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꽤 싫어하는 편입니다. 원작 설정과 안드로메다로 멀어졌기 때문이에요. 괴물들이 대거 등장하는 후반부에 이르면, 감독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만들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원작에서 묘사한 인간-어류-양서류 생명체는 어딜 가고, 별 상관도 없는 촉수괴물만 득실대거든요. 하지만 비 내리는 어촌에서 헤매는 초반부만큼은 섬뜩하고 긴장감 있게 연출했습니다. 외투를 뒤집어쓴 주민들이 구부정한 채 빗속을 돌아다니는데, 낯선 곳을 떠도는 이방인의 공포가 잘 드러났죠. 이 분위기만 계속 이어갔다면 꽤 그럴듯한 B급 공포물이 될 수 있었을 텐데요. 이게 원작 분위기와도 더 가깝고요. 참고로 소설에서는 비가 내린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감독은 긴장감을 배가할 수단이 필요했고, 그래서 고른 게 우천일 테죠.
흐음, 비를 이용하는 작품들을 막 꼽아보니가 이 정도 되겠네요. 위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우천 용도도 분위기 연출부터 시각효과 보조까지 참 다양하게 쓰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내일모레 개봉하는 <퍼시픽 림>도 비가 꽤 많이 오는 듯하더군요. 예고편에서는 주구장창 내리던데, 본편에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컴퓨터 그래픽 티를 감추느라고 그러는 거 아니냐는 말이 있던데. 어차피 바다에서 싸우느라 물보라가 넘칠 테니, 비가 내리든 말든 상관 없으려나요.
한국 <고전영화>나 <전설의 고향>을 보면, 유난히 비오는 장면들이 종종 연출되지요. 물론 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것들 입니다.
예전에는 이게 상당히 유치했는데, 지금은 가끔 고전영화들을 감상하다 보면, 은근히 기대되는 장면들입니다.
과거에는 주로 감정표현이나 사고칠때 이런 장면들이 종종 등장 한듯합니다.
비가 오면 저한테 생각나는것은 잠입니다. 비오면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어느새 침대에 쓰러져서 잠들어 버립니다. 빗소리를 들으면서 잠들면 잠이 잘오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