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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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측한 괴물들이 설치는 광기의 산맥. 델 토로의 성향은 이런 쪽 아닐까요.]
개봉을 앞둔 영화 <퍼시픽 림>은 거대로봇을 홍보 소재로 삼습니다. 메인 포스터 및 배너에도 집시 데인저를 비롯한 여러 예거들이 나오고, 예고편도 로봇을 제작하고 탑승하거나 조종하는 장면들 위주입니다. 작품 외적으로는 자신만의 예거를 디자인해보는 사이트나 거대로봇의 청사진, 각 기체 상태를 수치화한 카드 등이 돌아다니죠. 로봇과 맞서는 괴수도 등장합니다만, 아직까지도 정보 공개를 아끼는 편입니다. 어떤 놈들이 나오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지지도 않았고, 이름조차 밝혀진 게 별로 없죠. 괴수가 홍보물에 쓰이는 경우는 드물며, 쓰였다 해도 예거의 스파링 상대일 따름입니다.
이러다 보니, 영화를 기대하는 관객들 역시 로봇에 초점을 맞추기 마련입니다. 그러면서 감독인 길예르모 델 토로와 작품 완성도에 우려를 표하기도 합니다. 이전에 로봇물이나 메카물을 만들어본 적도 없으면서 어떻게 거대로봇물을 찍느냐는 거죠. 게다가 <트랜스포머> 실사판 시리즈가 워낙 압도적으로 흥행해서 걱정하는 목소리가 더 커집니다. <트랜스포머> 시리즈는 경쾌하고 빠른 액션 위주인데, 여기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퍼시픽 림>의 느릿하고 육중한 전투를 외면할 거란 뜻입니다. 더군다나 옵티머스 프라임 등은 그저 로봇이 아닌 하나의 캐릭터로 대접받는데, 예거는 그렇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은 좀 다릅니다. 현재 홍보 분위기와 달리 이 영화는 거대로봇보다 괴수의 비중이 더 클 것 같습니다. 감독의 전작들이 그런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헐리우드 데뷔작이라 할만한 <미믹>은 인간을 모방하는 거대 바퀴벌레/사마귀가 소재입니다. <블레이드 2>는 기괴하고 끔찍한 뱀파이어 열전이죠. <헬보이>는 지옥에서 올라온 영웅이 지옥 괴수들과 한판 붙는 내용입니다. <판의 미로> 역시 상상의 극치를 달리는 기묘한 크리처들이 돋보였습니다. 그리고 제작이 중단된 <광기의 산맥> 역시 온갖 외계 괴물이 득실거리는 작품이에요. 이쯤 되면 델 토로가 어떤 분야를 지향하는지 견적이 나옵니다. 데뷔작부터 제작 중단된 작품까지, 하나같이 전부 괴물이 중점적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따라서 <퍼시픽 림>의 진정한 주인공은 거대로봇이 아니라 괴수라고 봅니다. 물론 예거도 작품의 든든한 기둥이므로 소홀히 디자인하진 않겠죠. 하지만 우열을 따지자면, 괴수 쪽에 손을 들어줘야 하지 않을까요. 거대 바퀴벌레부터 흉악한 흡혈귀, 지옥 괴물, 환상 속의 생물들과 외계 생명체까지 만든 감독이라면, 당연히 로봇보다 괴수에 더 애착이 가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특기를 십분 발휘할 수도 있을 테고요. 심지어 에픽 판타지를 찍는 피터 잭슨 같은 감독도 (흉측한 괴물 좋아하는) 자기 취향이 일부분 남아있지 않습니까. 델 토로라고 다르지 않을 겁니다. 그런 고로 <트랜스포머>나 <에반게리온>과의 비교는 방향을 잘못 잡았다고 봅니다. 비교하고 싶다면, <고지라>나 <울트라맨>처럼 괴수가 중점인 작품을 거론해야 하겠죠.
그러면 배급사는 왜 로봇을 가지고 홍보하는 걸까요. 답이야 뻔합니다. 괴수를 히든 카드로 삼으려는 의도도 있겠지만, 그보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트랜스포머> 실사판이 엄청난 흥행을 거뒀으니까요. 배급사 입장에서는 이런 물살을 타고 싶겠죠. 근래에 나온 미국 괴수물이라고 해 봤자 이미 개봉한 지 5년이나 지난 <클로버필드>가 고작입니다. 그 전에는 기껏해야 1998년의 <갓질라>가 전부인데, 평가도 별로고요. (2005년에 <킹콩>이 나와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이쪽은 비경탐험물에 가까우니 예외로 치겠습니다.) 하지만 홍보는 홍보일 뿐, 막상 뚜껑이 열리면 괴수가 주역이 아닐까 싶어요. 로봇물에 편승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홍보 방향이 잘못된 거 아닌가 싶습니다. 괴수 쪽에 초점을 맞춰야 차별화를 꾀할 텐데 말이죠.
물론 괴수라는 게 워낙 극단적인 소재라서 쉽지는 않겠습니다만. 지금 분위기는 괴수 없는 울트라맨을 보는 듯한 느낌입니다. 길예르모 델 토로가 이 참에 유치하다고 구박받는 괴수물의 신기원을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 하지만 이 감독은 <미믹>부터 <헬보이>까지 어째 미적지근한 작품만 찍었죠. 그 점은 좀 불안합니다. 괴물 디자인은 정말 인상 깊지만, 영화라는 게 설정놀음과 달리 괴물 하나 잘 만들었다고 끝인 건 아니니까요. 물론 <판의 미로>처럼 완성도 높은 작품도 있었으니, 기대해 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