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흐르는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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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1년 하고도 1주일 전, SF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2012년 6월 5일에 고인이 되었으니, 1주년 기일인 셈입니다. 브래드버리는 국내에서도 <화씨 451>이나 <화성 연대기>, <민들레 와인>, <천둥소리> 같은 작품들로 유명하죠. 그 밖의 여러 작품도 있으나 우리나라에 번역된 건 이 세 가지 정도인 것 같습니다. 이 작품들이 대표작이니까 이만큼만 읽어도 충분하긴 할 듯. 특히, <화씨 451>이 대표작이고, 관련 일화도 많죠. 아이작 아시모프나 아서 클라크 같은 거장이면서도 꽤 최근까지 우리 곁에 있었으니, 어쩐지 살아있는 전설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유명 작가들이 그렇듯 이 양반도 실제 과학계에 이름을 남겼다고 하죠. 소설 제목을 따서 달에 패인 분화구 이름을 짓기도 했고, 소행성 중에도 이 아저씨의 성을 딴 게 있으니까요. 창작계와 과학계 모두에 이처럼 이름을 남기면 얼마나 좋으려나.
브래드버리는 SF 대가였을 뿐만 아니라 공룡 애호가로도 유명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살아있는 공룡’이란 제목으로 관련 단편집이 나오기도 했죠. 작가의 소설만이 아니라 여러 삽화가의 그림까지 곁들어 읽는 재미를 높여주는 책이었습니다. 관련 작품으로는 위에서도 말한 <천둥소리>와 함께 5편의 시나 소설이 들어있습니다. 게다가 친분이 있고 역시 공룡을 좋아하던 시각효과의 거장 레이 해리하우젠이 서문까지 써줬죠. (<공룡 100만년> 등을 제작한 분인데, 얼마 전 작고해서 세간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한편으로 <천둥소리>의 삽화를 담당한 윌리엄 스타우트는 그 솜씨를 살려 <뉴 다이노사우루스>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공룡: 그 매혹적인 세계>라는 제목으로 번역했어요. 일반적인 과학서적이 아니라 생태 관찰 수기에 가까운 구성으로 다큐멘터리 작가인 윌리엄 서비스의 맛깔 나는 글과 스타우트의 생생한 그림이 자랑입니다.
레이 브래드버리는 이 책을 읽고, 추천서를 짤막하게 써주기도 했습니다. 아마 소설이 아닌 브래드버리의 글 중에서는 얼마 안 되는 번역문일 것 같네요. 1주년 기일을 맡아 책에 있는 추천서를 한 번 옮겨봤습니다. 참고로 아래 추천서에 나오는 <해저 32킬로미터>는 국내에서는 <경적 소리>로 알려진 작품입니다. <심해에서 온 괴물>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죠. 번역가가 브래드버리 작품을 잘 몰랐던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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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어느 날 밤, 나는 아내와 함께 캘리포니아 주의 베니스 해변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래된 베니스 잔교 앞에 이르렀습니다. 주위 바닷가에는 구식 롤러 코스터의 버팀목과 선로가 여기저기 흩어져 파도에 씻기는 중이었죠. 그것을 보고 나는 물었습니다. “저 공룡 뼈는 왜 이 모래밭에서 뒹구는 걸까?” 그 만남 이후, 나는 <해저 32킬로미터의 야수>를 썼습니다. 안개가 짙을 때 등대에서 울리는 고동 소리를 사랑한 공룡 이야기입니다. 몇 년 뒤, 어느 저녁식사 자리에서 한 방송사 회장이 갑자기 내게 물었습니다. “백만 달러의 제작비와 황금 시간대를 배정한다면 어떤 쇼를 진행하겠습니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소리쳤습니다. “공룡이에요, 공룡!” 내가 선사시대의 그 신비로운 존재를 얼마나 사랑하는가를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일화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 모두 공룡을 좋아합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누구든 티라노사우루스에게 잡아 먹히거나 브론토사우루스의 발에 짓밟힐 위험이 있더라도 공룡 시대를 찾으려고 할 겁니다. 물론 잡아 먹히고 짓밟히는 것은 어쩌다 일어나는 일일 뿐, 우리는 그 강력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놀라고 사랑할 겁니다. 어쩌면 공룡 먹이에 휩쓸려 그들의 식사에 동참하는 것도 뜻 깊은 일일 겁니다. 바로 여기 그 타임머신이 있습니다. 윌리엄 스타우트, 윌리엄 서비스, 바이런 프레이스가 함께 만든 이 책을 타고 시간을 거슬러 여러분이 항상 마음에 그리던 그곳에 내려보세요. 발톱을 세운 거대한 도마뱀들이 우글거리는 끝없이 펼쳐진 정글 속을 누비고, 영영 끝나지 않을 잃어버린 시간 속을 날아보세요. 나는 이미 그곳에 다녀왔습니다. 정말 대단한 경험이었죠. 이제 여러분 차례입니다. 책을 펼치고, 떠나보세요. 그 야수들을 마음껏 사랑하세요.
- 레이 브레드버리
왕년에 브래드버리의 공룡 단편집 <살아있는 공룡> 번역본이 한국에 출간되었던 시기는
스필버그의 영화 <쥬라기 공원>이 큰 히트를 치면서 엄청난 공룡 붐이 일었던 때입니다.
거장 레벨의 예술가들이 여럿 참여해서 다양한 성격의 화려한 일러스트가 많이 실려 있는 것이 강점인데,
정작 번역 문장이 거친 편이어서 감수성을 건드리는 브래드버리의 매력이 잘 와닿지 않는다고나 할까요.
이제는 사실상 구할 수도 없는 책이고 공룡의 인기가 절정이었던 시기도 벌써 20년 전이므로,
안타깝게도 <살아있는 공룡>이 다시 재번역되어 출간될 가능성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