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화 <블루홀>, <블루월드>의 일부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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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과학자, 저널리스트가 중생대 야수들 사이에서 벌이는 생존기 <블루월드>]


호시노 유키노부의 공룡시대 탐험물 <블루월드>는 <블루홀>의 속편입니다. <블루홀>은 지구상에 선사시대와 이어지는 관문이 있다는 내용의 만화였습니다. 아프리카 해안에서 실러캔스가 자주 잡히는데, 알고 보니 해저에 고대 지구와 통하는 동굴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폐어들이 그곳으로 드나드는 바람에 현대에서 잡힌 거고, 이 말은 인류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렇게 공룡과 만난 인류는 세계의 존망을 목전에 두고 여러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공룡 자체는 판에 박힌 묘사라서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습니다. 티-렉스는 덩치 크고 못된 악당이고, 트리세라톱스는 박진감 넘치게 돌진하고, 마이아사우루스는 이름답게 새끼 돌보기에 여념이 없고 등등. 이런 장면은 너무 흔해서 새로울 것도 없잖아요. 허나 이 작품의 매력은 전지구적인 스케일에 있습니다. 괴물이 사람들 물어 죽이는 단순한 줄거리를 넘어서 장대한 역사를 뒤돌아보는 포부가 있습니다.


<블루월드>는 <블루홀>의 설정을 이어가되, 한층 넓어진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우선 중심 설정이 그러한데, 전작에서는 현대 문제를 중점적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블루홀을 이용해 현재 인류가 당면한 과제를 풀어보고자 하는 아이디어 위주였죠. 속편에서는 비단 현대만이 아니라 고생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지구의 변화를 두루 살핍니다. 블루홀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지역에 다수가 있어서 시공을 넘나드는 관찰이 가능한 까닭입니다. 물론 여러 시대를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산만하고 헛갈리므로 작중 주로 나오는 블루홀은 하나이고, 블루월드도 그에 맞춰 고정했습니다. 그렇다 해도 블루홀이 여러 개라는 전제가 깔렸기에 주제를 훨씬 풍부하고 밀도 높게 전개합니다. 현재 지구의 변화를 과거와 연결하고, 거기서 다시 현재의 변화를 추론하거든요. 그냥 공룡시대와 현대 두 가지만 왕래하던 전작보다 훨씬 유기적인 짜임새였습니다. 널리 알려진 유성 충돌보다 작가만의 독특한 설정을 부여해 공룡 멸종을 설명한 것도 장점입니다. 과학적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들며 지구가 걸어온 길을 되짚고 미래를 논하는 주제가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고로 좋은 공룡 작품은 멸종에 관해 자신만의 견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적 사실에 입각하면 더 좋고, 판타지로 기울더라도 독창성이 있었으면 합니다. 공룡은 멸종을 대변하는 동물이고, 그렇게나 많은 생물이 사라졌다는 이유는 상상력을 자극하기 충분하니까요. 멸종을 논하다 보면, 그저 동물 이야기를 떠나 지구라는 행성이 어떤 변화를 거쳤는지, 앞으로 어떻게 바뀔 것인지도 이야기할 수 있고요. 공룡이란 과거의 생물에서 출발해 현대 인류를 거쳐 미래까지 내다본다고 할까요. 그런 점에서 대규모 화산 폭발과 지자기 약화, 시공의 왜곡 등을 열거하는 <블루월드>는 만족스러운 설정이었습니다. 너무 방대한 아이디어라 일견 오류도 있고, 억지로 끼워 맞추는 듯한 부분도 없진 않습니다. 이게 1998년에 나온 만화라서 지금 보면 고개를 갸웃할 구석도 있고요. SF 설정이 대개 그렇듯, 세월이 너무 지나면 낡기도 하잖아요. 허나 몇몇 단점을 감안해도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상상과 거기서 비롯되는 갈등 구조는 흥미진진합니다.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볼거리인 공룡도 가짓수가 훨씬 늘어났습니다. 전작에서는 백악기가 배경이라 등장하는 공룡도 제한적이었습니다. 위에서도 말한 것처럼 티-렉스나 트리세라톱스가 전부였죠. 대신 다양한 수장룡과 해양동물을 추가해서 다양성을 확보했지만, 육상동물 묘사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거대 규모를 자랑하는 용각류가 별로 없다는 게 뼈아픈 단점이었죠. 이번 작품은 쥐라기가 배경이므로 알로사우루스나 켄트로사우루스도 얼굴을 비춰줍니다. 이 점이 참 좋았는데, 알로사우루스는 유명세에 비해 주연으로 등극한 경우가 드물거든요. 이 시대 최고의 육식공룡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무시무시한 위용을 드러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게다가 용각류가 전성기인 시절이라 이를 최대한 활용합니다. 드넓은 습지나 초원에 집채만한 공룡들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장관을 자주 연출합니다. 역시 브라키오사우루스나 아파토사우루스 같은 종류가 빠지면 안 된다는 걸 새삼 느꼈네요.


시공이 엇갈리기 때문인지 원래 백악기나 가서 나타날 공룡들도 우정 출현합니다. 가장 이색적인 놈은 스피노사우루스였습니다. 반수생이라는 특성을 살려 강에서 기습하는데, 가늘고 길쭉한 머리, 커다란 앞발, 부채 같은 등지느러미로 전형적인 생김새입니다. 평상시는 물 위로 등지느러미만 보이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나죠. 이 만화가 나온 시기를 감안하면, 스피노사우루스를 골랐던 게 꽤 그럴듯한 안목이었네요. 지금이야 물에서 활약하는 육식공룡이라면 이 놈이 대세지만, 1998년 정도만 해도 그렇지 않았으니…. 이 외에 알로사우루스는 습격한 범인도 있는데, 내용누설이라 정체를 밝히지 않겠습니다. 허나 이 놈이 아무리 대단해도 만화처럼 알로사우루스를 이길 수 있을지는 좀 의문이군요. 그 밖에 수장룡이나 해양동물도 일부 나오지만, <블루홀>처럼 비중이 크진 않습니다. 육상 공룡이 더 많이 나오는지라 출현 분량이 줄은 거죠.


무대가 커진 만큼, 등장인물도 많아졌습니다. 과학자와 사업가가 마찰을 빚었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주로 군인들이 나옵니다. 자문을 맡은 과학자 소수, 취재를 위해 몰래 숨어든 민간인 두어 명 그리고 나머지가 전진 기지를 세우려고 넘어온 군인들입니다. 당연히 총 한 자루 없어서 도망치기 급급했던 <블루홀>보다 전투 장면이 더 잦습니다. 그에 따라 각종 액션이 늘어난 것도 볼거리에 한몫하고요. 갑갑하게 도망만 치는 게 아니라 전투력을 발휘해서 싸우는 모습은 속이 다 시원하더군요. 물론 군인들이 주연이라고 해도 조명을 받는 인물은 일부 장교급이고, 나머지 병사는 병풍에 불과하지만요. 공룡들이 습격하면 낙엽처럼 우수수 쓸려가는 광경이 좀 뻔했습니다. 반면, 주인공 캐릭터는 꽤 마음에 들었는데, 사실상의 주인공인 진 허트 중위는 아이를 돌보는 모성애와 강인한 성격이 혼합된 여군입니다. 비경탐험물의 주인공이 대개 거친 남성이라는 것과 대조되어 참신했습니다.


그러나 공룡시대라 할 지라도 악당이 있는 법. 이 작품에서는 그록 대위가 이끄는 미군 네이비 씰이 악역을 맡습니다. 첫 등장부터 꿍꿍이를 숨긴 데다가 무자비하게 생긴 게 ‘나 악당이오’ 하고 써 붙인 꼴이네요. 주인공이 참신해서 그런가 그록 대위는 여느 악당처럼 못된 짓거리에 충실합니다. 냉정한 군인의 부정적인 면은 죄다 갖다 붙였다고 보면 됩니다. 살아남기 위해 약자를 내치거나, 민간인에게 위협을 가하거나, 동물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거나 등등. 다른 매체에서는 구원자로 나오는 미군이 적으로 나오다니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일본 작가라서 미군을 적대하는 감성이 배였다는 말도 들었는데요. 유키노부가 어떤 작가인지 잘 몰라서 단정할 수야 없습니다만. 극우 성향이 두드러지거나 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블루홀>에서 거슬리던 부분이 인간과 자연을 별개로 보는 시각이었는데, 다행히 <블루월드>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인간의 탐욕을 묘사할지언정, 자연이 인간보다 위대하다 어쩐다 소리는 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군인이라 당장 생존하는 문제에만 매달리는 면도 있고요. 전작의 주인공 가이아는 그 이름만큼이나 자연친화적인 행동을 하지만, 알고 보면 꽤 가식적입니다. 육식공룡을 악당 취급하거나, 초식공룡에게만 살갑게 군다거나, 백악기 멸종이란 역사적 사건을 부정하려 했죠. 아니, 다른 건 그렇다 치고, 공룡이 멸종한 건 엄연히 자연 법칙이건만 왜 그걸 부정하는지…. 이번 작의 진 허트는 비경탐험물의 주인공치고 공룡에 관해 무지하거나 별 관심이 없긴 하지만, 솔직하고 담백해서 좋습니다. 동행하는 과학자인 카멜롯 교수도 무조건 자연만 두둔하는 편애주의자는 아니고요. 하긴 <블루월드>는 인류의 간섭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지구과학적인 주제를 논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림체는 그리 정교하지 않고, 다소 거칠지만 이 점 때문에 원시 생태계가 더 부각됩니다. 거친 터치로 그려냈기에 공룡의 야성이나 거대함이 돋보이죠.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밤중에 습격한 알로사우루스 그림입니다. 세부 묘사를 하지 않고. 검은 윤곽선만으로도 대상의 흉포함을 잘 표현했네요. 무엇보다 책 전반에 걸쳐 중생대의 광활한 정글을 공들여 그려내서 속이 탁 트이기까지 합니다. 저야 만화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런 풍경을 일일이 그리기가 쉽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드네요. 판형을 키우고 색깔만 입히면 바탕화면이나 벽지로 써도 될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그 외에 서비스…를 노린 듯한 컷도 몇몇 있더군요. 장대함을 추구하는 SF 작가이면서도 은근슬쩍 잘도 집어넣었네요.


의외였던 건 <블루홀>에 관한 사항이 <블루월드>에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탐사 주체가 군대로 바뀌었으니 가이아를 비롯해 전작의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는 거야 이해가 갑니다만. 구출이란 명목으로 수송했던 공룡들이 현대에서 어찌 살아가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 많은 동물을 키우려면 막대한 부지가 필요하고, 먹이나 사료, 관리비도 상당할 테고, 보안상 절차도 까다로울 텐데, 그에 관한 설명이 일체 없습니다. 전작의 갈등 요인이었던 오염 정화는 블루홀이 급속히 사라진 까닭에 실행하지 못한다고 쳐도 말이죠. 오염 정화 역시 한 줄이라도 좀 언급하나 했는데, 아예 말이 없네요. 이왕 속편을 쓸 거라면 전편과의 연관성도 고려했으면 싶습니다. 블루홀이란 공통점만 있고, 전혀 딴 이야기 같아서요.


<블루홀>과의 연관성을 생각하면 다소 고개를 갸웃할만한 부분도 있습니다만. 전반적으로 흥미진진하게 봤습니다. 공룡을 소재로 해서 이만큼 박진감 넘치고 규모가 큰 이야기를 풀어내는 만화도 드물지요. 적어도 전편보다는 훨씬 나은 속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