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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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와 구시대 과학 기술의 오묘한 결합을 보여준 <아케이넘>]
요즘 차이나 메르빌이 쓴 <퍼디도 스트리트 정류장>을 읽는 중입니다. 도시 판타지로 유명한 작가인데, 화려한 서술과 묘사로도 평이 자자하더군요. 소설 내용은 뉴크로부존이란 배경 도시를 샅샅이 훑고 다니는 게 대부분인데, 각 장면들이 그림처럼 눈 앞을 스쳐갑니다. 장르는 판타지이긴 한데, 기술 수준은 15~17세기 근대풍입니다. 증기 열차가 돌아다니고, 하늘에는 비행선이 떠있고, 대학의 연금술 실험에다가 군인들은 플릭트록 소총을 쏘고 등등. 그래서인지 고딕 장르 느낌도 나고, 일부분 스팀펑크처럼 보이기도 하더군요. 개인적으로 모던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터라 이런 구시대 풍경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니 관련 삽화 같은 것도 찾아보게 되고, 단골처럼 등장하는 소품에도 눈길이 가네요. 예를 들어, 우주탐사물이나 외계침공물에 우주선이 필수요소이듯, 구시대 SF는 증기선이나 열차, 비행선 등이 필수죠.
흔히 SF물의 시대 배경은 미래라고 생각하며, 사실 그 생각이 맞기도 합니다. 상상력과 가능성에 중점을 둔 만큼, 먼 훗날을 이야기하는 게 자연스럽죠. 하지만 Sf물이 항상 앞만 보고 무작정 달리는 건 아니며, 때로는 현재를 고민하거나, 과거를 반추하기도 합니다. 과거가 어땠는지 알아야 미래도 내다볼 수 있지 않겠어요. 이런 작품들은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최첨단 과학이나 기술을 배제합니다. 대신 낡고 구닥다리 소품을 쓰며, 인류 사회가 예전에 어떻게 발전했는지 강조하죠. 소위 ‘복고풍 SF’라는 건데, 대개 펑크 스타일이 주류이며, 사이버펑크, 스팀펑크, 디젤펑크 등이 여기에 속합니다. 또한 대체역사로 이루어진 포스트 아포칼립스도 해당하고, 색다른 분위기를 추구하는 도심 판타지도 이런 성향을 띱니다. 고딕 장르도 특성상 이것과 맞물릴 때가 많고요. 리트로 퓨처리즘, 그러니까 구시대 미래주의도 딱 맞아 떨어지진 않으나, 어느 정도 통합니다.
이런 작품은 ‘한때 우리가 이렇게 살았었지’라는 추억을 자극합니다. 미화를 하든, 비판을 하든 옛 시절을 돌아보게끔 하는 목적이 있어요. 지리적으로 서구가 배경일 때가 많습니다.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까지 흥했던 쪽은 유럽과 미국이지,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은 전쟁과 식민 정책 때문에 과학 발전의 여유를 누릴 새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서구인에게 보다 어필하는 장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아시아 사람이 무조건 디젤펑크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요. 똑같은 복고풍이라도 어느 시대를 기준으로 하는지에 따라 양상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이 떠올리는 과거 모습은 각자 다르니까요. 고전적인 빅토리아 시대와 산업혁명, 1930년대의 고난과 전기 발명, 우주 진출과 별별 공상이 만연하던 1970년대 등 시대별로 특징도 뚜렷하죠. 그런 고로 특정 사물이 공식처럼 그 시대와 장르를 대표하기도 합니다. 펑크 스타일은 아예 사물/기술에서 장르 명칭을 따왔죠.
[증기기관, 비행선, 거대 교통수단… 스팀펑크의 요소를 고루 갖춘 견인도시.]
가령, 구시대 연상을 위해 자주 쓰이는 소품이 증기기관입니다. 산업혁명이 이루어지고, 인력을 기계로 대체하던 시절이 무대입니다. 증기기관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걸 대표하는 것이 바로 열차입니다. 지상에서 묵직한 엔진을 실은 만큼 튼튼한 교통수단이 기차 외에 전무했으니까요. 더군다나 겉보기도 얼마나 멋집니까. 큼지막한 열차가 지붕 위로 시커먼 연기를 뿜어내며 요란스레 달리잖아요. 실로 역동적인 장면이라 21세기인 오늘날에도 기차라고 하면 증기기관차를 떠올릴 정도입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소형 기기나 등신대 로봇에게는 장착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거대 이동수단이 자주 나오는 편. 어디든 예외가 있어서 오버 테크로놀러지로 가면, 주먹만한 증기기관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요. 문제는 사방 천지에서 죄다 이런 엔진만 쓰다 보니, 도시 상공에는 연기가 가득하고, 공해가 심각한 수준입니다. 그런 풍경이 오히려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하지만요.
증기기관과 함께 짝꿍으로 따라붙은 소재는 톱니바퀴입니다. 톱니를 맞물려 기기를 작동시키는 개념은 훨씬 오래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동력이 인력을 앞지르기 시작한 시기는 아무래도 19세기 후반이고, 그러다 보니 고대~중세의 톱니바퀴는 찬밥 취급하는 경향이 있죠. 요즘은 강철제 톱니바퀴도 많습니다만, 증기기관과 호흡을 맞추려고 황동제 톱니를 많이 쓰더군요. 복잡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모양새가 시각적으로 강렬해서 그런지, 내부가 훤히 드러나도록 설계합니다. 정밀기기일수록 보호를 위해 안에 감추어야 하지만, 볼거리를 위해 고증을 희생한 셈입니다. 주로 쓰이는 곳은 시계처럼 세심하게 작동하는 기기이며, 간혹 오버 테크놀러지를 무마하려는 목적으로 로봇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이 태엽인데, 머리나 등에 붙어서 가끔씩 돌려줘야 합니다. 태엽 모양은 구멍이 두 개인 것으로 거의 공식화한 듯.
증기기관이 도시 상공을 연기로 채우면, 그 위로는 비행선이 날아다닙니다. 크고 거대한 물체가 하늘에 둥둥 떠다니기에 초현실적인 느낌도 납니다. 실제 비행선은 여러 한계에 부딪힌 교통수단이지만, 창작물에서는 그 거대함에 반해 과장된 연출이 자주 등장합니다. 부피가 엄청나게 커진다거나, 그에 따라 적재량도 늘어나 요새화하거나, 프로펠러를 수 십 개 달아서 속도도 빠르거나 등등. 여기다 그 무거운 증기기관까지 싣고 연기를 푹푹 내뿜으며 도시 공해에 일조하기도 해요. 판타지에서도 공중 수송이 필요한데, 비행기를 쓰면 어색하니 모던한 감성이 없는 비행선을 선호합니다. 간혹 반중력 장치나 부력 마법을 걸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실제 비행선마냥 폭격도 하며, 대포를 장착하고 적 비행선과 공중전을 벌이기도 합니다. 으음, 비행기 놔두고 뭐 하는 짓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비행기는 작아서 폼이 안 나잖아요. 거함거포주의를 바다가 아닌 하늘에 반영한 심정이랄까요.
[고전압 방출은 디젤펑크의 필수요소기도 하죠. 테슬라는 실제로 저런 짓을 자주 했다는군요….]
고전압 발생 장치도 인기스타입니다. 전기를 발명하면서부터 빛의 시대가 시작된 만큼, 그냥 넘어갈 수 없겠죠. 그렇다고 전구에 불 들어오는 장면은 심심해 뵈니 별 인기가 없고요. 창작물에서 더 쳐주는 건 테슬라 코일을 비롯한 고전압 장치입니다. 코일을 감고, 둥그런 구체나 주변에서 시퍼런 전류를 번개처럼 뿜어내는 이미지로 알려졌죠. 니콜라 테슬라 본인이 워낙 시대를 앞서갔고, 성격이 괴팍해서인지, 과학의 부정적인 면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솔직히 굵직한 전류가 빠지직~ 요동치는 게 장관이지만, 그리 안전해 보이지는 않잖아요. 번쩍거리고 화려한 탓에 미치광이 과학자와도 잘 어울리고요. 사방팔방에 전류가 진동하고, 그 바람에 인조인간이 깨어나는 설정은 클리세나 다름없죠. 위험해 보이기 때문에 가끔 무기로도 쓰이는데, 전류를 목표물에 뿜어내는 모습은 라이트닝 볼트가 따로 없습니다.
진공관 역시 이전 시대를 추억하게 해주는 물품입니다. 유리관이라서 내부 구조가 훤히 보이고, 따라서 아름답지만 복잡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굳이 전자 부품으로 사용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서 멋이 나요. 다이오드나 트랜지스터처럼 썰렁하게 생긴 후배랑 비교하면 예술품처럼 보일 정도죠. 진공관들이 빛을 반짝이는 모습은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의 전기 버전을 보는 듯한 느낌도 들어요. 크기도 큼지막하기에 몇 개 설치하면 전자기기도 덩달아 커지니, 스케일 뽐내기에도 좋죠. 에니악 같은 컴퓨터의 어마어마한 덩치를 생각하면…. 물론 증기기관이 그런 것처럼 이것도 얼마든지 소형화하는 작품도 있습니다. 진공관이 나오는 작품은 숫자를 표시하는 닉시관도 함께 나올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게임 매체에서는 규칙 때문에 수치를 보여줘야 하므로 유용한 인터페이스입니다. 닉시관으로 체력, 액션 포인트, 공격력 등을 보여주면, 세계관 설정에 어울리니까요.
디자인으로 접근하자면, 교통수단이나 건물, 기타 물품 등은 원형 또는 곡선 형태를 띱니다. 자동차와 기차는 유선형이 두드러지고, 건물 귀퉁이도 둥그런 기둥으로 이어지며, TV나 라디오 등도 그리 각이 지지 않았습니다.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물건들, 그러니까 50~70년대 광선총이나 우주복도 둥글둥글하게 생겼죠. 저는 미술 사조나 건축 양식은 잘 몰라서 왜 이런 디자인이 유행했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산업을 주도한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이 그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기존에 없던 조형미를 추구해서 그렇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뭐가 진짜인지 헛갈리지만, 어쨌든 곡선 디자인이 옛 시대를 풍미한 건 사실이죠. 어쩌면 아르 데코의 유행과도 연관이 있을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만 해도 자연물을 도안한 아르누보가 한창 잘 나갔는데, 2차 대전이 끝나고 아르 데코가 상승세를 탔습니다. 화려한 장식을 추구하면서도 기하학적인 면이 섞인 게 특징입니다. 아르 데코를 기차나 건물에 적용하면 저렇게 유선형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개인적인 추측이라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만.
[진공관과 녹색 모노크롬 화면, 가이거 계수기까지, 냉전의 추억이 잔뜩 깔린 핍보이.]
검은 바탕에 녹색 픽셀이 돋보이는 모노크롬 화면은 초기 컴퓨터를 상징합니다. 모노크롬 색깔은 이거 말고도 황갈색과 하얀색이 있지만, 인지도는 녹색이 압도적입니다. 오죽하면 그린 스크린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 창작물에서는 일반 가정용/사무용 컴퓨터는 물론이거니와, 개인 단말기나 거대 운영 컴퓨터에도 널리 쓰입니다. 손바닥만한 단말기에 진공관 채워 넣고, 모노크롬 화면으로 디스플레이하는 식이죠. 설사 항성계 항해용 우주선을 관리하는 컴퓨터라도 출력 장치는 썰렁한 녹색 화면입니다. 텍스트야 별 문제 없지만, 총천연색이 아니므로 그림 구현은 한계가 있는 편입니다. 고화질 그래픽이나 입체 영상은 무리죠. 그래도 어지간한 지도나 청사진, 그림 등은 다 표현하므로 주인공은 별 어려움 없이 난관을 헤쳐나갑니다. 모노크롬 화면을 사용하는 컴퓨터는 옵션으로 천공 카드나 녹음 테이프 등이 따라옵니다. 이때만 해도 플로피 디스켓이란 게 없는 시대였으니, 블루레이를 가지고 노는 요즘 시각으로 보면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 싶습니다.
미치광이 과학자 역시 고전 SF에서 빼놓으면 섭섭합니다. 윤리를 저버리고 연구에만 몰두하는 과학자 캐릭터는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지만, 그 근간은 19세기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의학이 막 발달하던 시기였고, 당연히 창작가들은 이에 영감을 받아 작품을 씁니다. 인공물에 생명을 불어넣거나, 몸을 변형시키거나, 다른 생명을 합치는 식으로요. 즉, 의학이나 생물학을 응용한 악당 과학자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반을 대변하는 셈이죠. 이와 더불어 미치광이 과학자의 또 다른 전문 분야가 물리학인데, 냉전시대의 방사능 공포를 반영합니다. 당시 미국과 러시아는 서로 핵미사일을 날리려고 했으며, 그래서 방사능 피복으로 세상을 싹쓸이할 거란 두려움이 생겼죠. 자연스럽게 악당 과학자는 핵을 다루는 학자가 되었으며, 여기에는 니콜라 테슬라나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물리학도였던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즉, 미치광이 과학자나 생물을 가지고 실험하거나, 플루토늄을 만지작거리면 고전적인 캐릭터라고 봐도 될 겁니다.
미치광이 과학자와 반대로 돌연변이도 방사능의 공포를 나타냅니다. 과학자가 해당 물질을 다루는 것과 반대로 돌연변이는 피폭되는 게 큰 차이점이죠. 그런데 어쩐지 공포스럽다기보다 힘 세고 날랜 초인이나 괴수들이 나오는 경우가 많더군요. 이 정도면 피폭이 아니라 진화가 맞지 않나 싶을 정도…. 일단 닿기만 하면 몸집이 커지거나, 약골이 근육질로 변합니다. 그저 단순히 기형적으로 커지는 것부터 마천루를 깨부술 만큼 거대해지기도 합니다. 몸이 커지니 힘도 세지고, 철근을 떡볶이처럼 씹어먹는 건 예사입니다. 피부가 단단해지고 내구력도 강해져서 어지간한 총격은 버티고, 때로는 재생능력까지 보유합니다. 몸에 방사능이 축척 되었으니 이걸 뿜어서 무기로도 쓸 수 있겠죠. 여기다 각종 초능력, 그러니까 텔레파시, 공간이동, 염력까지 추가될 수도 있습니다. 음, 이쯤 되면 방사능의 공포를 해학적으로 반영했다고 하는 게 옳겠네요. 아니면 그냥 시대의 패러다임이 그거라서 써먹었다거나. 초인 영웅 중에서도 방사능 오염(?) 캐릭터가 있으니, 원.
이 정도면 복고풍 SF의 주요 소재를 적절하게 살펴본 것 같습니다. 이거 말고도 많겠지만, 저는 이 장르에 친숙하지 않은지라 더 이상은 잘 모르겠네요. 좌우지간 중요한 건 ‘복고’라는 단어가 어디까지나 상대적이라는 점입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야 19세기 후반이나 1930년대 풍경을 과거로 바라보겠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게 현실이었겠죠. 마찬가지로 100년 후의 인류가 보기엔 21세기 역시 고리타분한 과거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세련되고 모던하게 보이는 과학기술과 디자인이 몇 십 년 후에는 낡고 우스꽝스러울 수 있죠. 그러니 과거 시대가 추레하다고 너무 탓할 것도 아닙니다. 발전은 좋은 것이지만, 옛날 사람들이 디딤돌을 마련해주지 않았다면, 미래인이 그걸 밟고 올라서지도 못할 테니까요.
방사선 쬐고 초인 혹은 괴물이 태어나는 이벤트는 아무래도 예전에는 마법이나 하늘의 뜻으로 설명하던 걸 과학적으로 있어보이게 하려다 보니 가장 그 당시에 화제가 되고 사람들 머리에 쏙쏙 들어갈만한 게 방사선이라 갖다붙여서 그리 된 셈이죠. (90년대 이후로는 유전자 조작이나 나노머신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지만)
픽션 속의 감마선은 헐크를 비롯한 괴인들을 양산하지만 실제로 감마선 쬐면 건강에 지이이이이인짜 안좋다고 하더군요 OT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