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근래에 개봉날짜를 기다리는 작품 중 하나가 <에반게리온 Q>입니다. 갖은 떡밥과 감질나는 예고편을 조금씩 드러내더니, 얼마 전에 11 7일로 날짜를 정했죠. 이번 편을 특히 기다리는 이유는 신() 에반게리온 극장판의 성격이 가장 명확히 드러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제가 알기로 소설에 기-승-전-결 구도가 있는 것처럼 이번 시리즈도 그런 순서로 진행한다고 합니다. ‘로 화두를 열고, ‘로 방향을 전환한 다음, ‘Q’로 절정을 찍고, 마지막 편으로 마무리하는 거죠. 소설에서도 3단계인 절정이 제일 급박한 것처럼 이번 시리즈 역시 Q편이 그러지 않을까 싶습니다. 특히나 에바 세계관의 가장 큰 낚시인 인류보완계획의 실체가 얼마쯤이라도 나올 확률이 높아요. 이전작 두 편으로만 봐서는 제레가 인류보완계획을 그대로 실행하려는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짐작할 길이 없죠.

 

제 추측이긴 하지만, 어쩐지 신 극장판에서는 인류보완계획이 실패할 듯합니다. 이 음모는 결국 모든 인류가 AT 필드를 잃고, 하나로 합쳐진다는 발상인데요. 여기에는 감독인 안노 히데아키의 성향도 반영되었다고 들었습니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들 당시의 안노는 꽤 비관적인 성격이었다고 하고, 그래서 모든 인류가 LCL 바다에 녹아버리는 결말을 상정했다고 합니다. 소년과 소녀가 남았으니 완전한 멸망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비극적인 엔딩이죠. 하지만 지금의 안노 감독은 예전과 달리 성향도 바뀌었다고 하고, 신 극장판 역시 보다 전형적인 소년과 로봇 이야기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TV판보다는 좀 더 희망적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이거야 뭐,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죠. 오히려 이렇게 희망적일 거라는 기대를 심어주고 충격적인 결말로 뒤통수칠 거라고 보는 관객도 있으니까요. 신 극장판의 수수께끼를 풀려면 이게 핵심입니다.

 

이렇듯 인류보완계획은 에바 세계관을 뒤흔들 정도로 중요한 설정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을 실행하는 주체가 제레나 이카리 겐도 같은 악당들이다 보니 인류보완계획도 오해를 받는 것 같습니다. 기실 작중의 보완계획이야 나쁜 게 맞습니다. 자기들 욕심 때문에 전 인류를 바꿔놓는 발상이니까요. 문제는 인류의 변화, 그러니까 정신적 공동체로 바뀌는 설정 자체를 나쁘게 보는 사람도 있다는 점입니다. 인류가 정신적 공동체로 바뀐다는 설정은 예전부터 서구 SF에도 종종 나왔습니다. 90년대 장르 문화의 주류였던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이 워낙 충격적이었던 터라 정신적 공동체가 무조건 나쁜 걸로 간주하는데, .인류의 종말은 끔찍한 소재니까 디스토피아에서 사용하기 좋은 소재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를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객관적으로 보는 작가도 있어요 지구인이 진화 혹은 발전하는 개념에서 정신적 공동체를 바라보는 작품도 있죠.


이쪽에서 제일 유명한 작품은 뭐니 해도 아서 클라크가 쓴 <유년기의 끝>입니다. 이 책에서 인류는 아직 미성숙한 종족, 그러니까유년기에 해당합니다. 인류를 진보한 상태로 이끌기 위해 외계종족 오버로드가 찾아오고, 이들의 관리와 도움을 받으며 인간은 정신적으로 통합합니다. 이 작품이 정신적 공동체를 긍정하는지 독자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부정적인 느낌보다 경외하는 감성이 더 강하긴 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가히 지구를 벗어나 신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처럼 묘사해놨습니다. 오버로드가 인류를 이끄는 이유도 인류를 관찰하면서 자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죠. 그래서 진화의 정점에 선 것처럼 보이는 오버로드가 도리어 인류를 부러워합니다. 육체에서 탈피한 인류 공동체를 바라보는 오버로드의 시점이 눈물겨울 정도. 이쯤 되면 지구인은 (초월체 오버마인드가 신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신에게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정신적 공동체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또 다른 작품으로는 시어도어 스터전의 <인간을 넘어서>가 기억납니다. 다만, 인류 전체가 한꺼번에 탈피하는 건 아니고, 몇몇 발달한 초인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읽은 지 오래 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인간 정신을 조종하는 작중 주인공과 주변의 다른 초인들이 벌이는 깡패짓이 주요 내용입니다. 하지만 막판에 주인공은 각성하고, 주변의 다른 초인들과 하나로 융화합니다. 각 초인들마다 능력이 다른데, 그런 능력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보다 전능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 거죠. 주인공은 단순히 주변 인물과만 융합하는 게 아니라 선배 초인들과도 정신적인 영역에서 만나 교감합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걸 깨닫고 선하게 변하는데, 그 동안의 행패와 비교되어서 더욱 선한 존재로 그려집니다. ‘호모 게슈탈트라고 하는 이 공동체 혹은 생물에 관해 할 말은 많지만, 어쨌든 마지막 결말을 보면 긍정적인 시선이 더 강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쓴 단편 <최후의 질문>에는 독특한 정신적 공동체가 나옵니다. 이 소설은 인류의 진화가 주제도 아니고, 풍자적인 성격이 더 강해서 딱히 설정을 뒤져볼 여지는 없습니다. 다만, 인류가 슈퍼 컴퓨터와 하나로 합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신선하더군요. 미래에 멀티백이라는 슈퍼 컴퓨터가 있습니다. 멀티백은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정도로 만능입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기술도 발전하고, 이 기술을 적용한 멀티백은 더욱 뛰어난 컴퓨터로 업그레이드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하드웨어를 벗어 던지고 오로지 소프트웨어만 남을 정도로 발전합니다. 전우주가 멀티백의 회로망이며, 정보처리를 하기 위해 항성계를 이용할 정도죠. 인류는 멸종하여 그 정신세계를 컴퓨터가 흡수합니다. , 이건 정신적 공동체라기보다 다른 초월체가 빨아들였다는 표현이 맞겠네요. 여하튼 컴퓨터와 인류의 통합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웠습니다. 통합 멀티백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지만요. 작가의 다른 서사작 <파운데이션>에서는 그래도 정신적 통합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습니다.


희극이냐, 비극이냐를 떠나 이런 과정을 충격적으로 묘사하는 작품은 많습니다. 그 중에 으뜸을 꼽으라면 단연 그렉 베어의 <블러드 뮤직>이 있습니다. 으윽,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지 두 번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책입니다. 이 작품에서 어느 과학자는 지성이 있는 미생물을 만들어내고, 실험이 촉박한 사정상 이를 자기 몸에서 배양합니다. 문제는 이 놈의 미생물이 자기가 사는 곳을 좀 좋게 만들어보려고 인간 신체를 바꾸어 나갑니다. 처음에는 슈퍼 히어로마냥 신체 능력이 좋아지지만, 이후로는 인간 전체를 하나로 통합하려고 시도합니다. 아니, 그저 인간이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체를 하나로 엮으려고 합니다. 인류가 통합하는 과정을 상세히 묘사한 게 꽤 끔찍한데, 육체가 녹아내려 걸쭉한 액체(?)로 합쳐지는 모습에 몸서리가 쳐질 정도입니다. 통합 과정이 너무 징그러워서 부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인간이 미생물과 교감도 하고, 의식의 흐름도 거치는 묘사도 나름대로 나옵니다. 긍정과 부정을 떠나객관적인 충격을 보여주려는 게 작가의 의도 같습니다.


이런 사례에서도 드러나듯, 장르 작가들이 생각하는 정신적 공동체는 진화의 정점이나 차기 단계에 가깝습니다. 현재 인간은 불안정하므로 제한적인 육체에서 벗어나 완숙한 정신적 존재로 발전하는 식이죠. 어디까지나 생물의 발전 과정일 뿐, 음모나 계획은 아닙니다. 저는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잘 모르지만, 초기에는 일본 SF도 이런 개념을 받아들인 걸로 압니다. 그러나 육체를 탈피하면 인류가 멸망하는 것처럼 보일뿐더러, 정신적 공동체라는 게 전체주의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개개인이 서로 다른 인간을 하나의 정신으로 녹여내는 결과니까요. , 자연적인 면만큼 부정적인 면 또한 강한데, 이를 일본 SF쪽에서 잡아낸 것 같습니다. 소년 모험물이나 전투물은 맞서 싸우고 쳐부술만한 악당의 음모가 필요합니다. 그것도 세계정복만큼 거대한 음모가 있어야죠. 여기에 인류의 멸망을 초래할 정신적 공동체가 딱 맞아떨어지고, 결국 제레 같은 집단까지 나온 듯합니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가까우니 딱히 근거는 없습니다만.)

 

, 솔직히 저도 정신적 공동체가 마음에 안 들기는 합니다. 클라크나 스터전의 원대한 상상력에는 경의를 표합니다만. 인류가 다른 존재로 바뀌는 건 사실상 멸망한다는 말이랑 똑같잖아요. 자연계 전체로 보면 진화일지 모르지만, 막상 인류 입장에서는 멸망인데 반가울 리 있겠습니까.

 

예시로 든 소설 말고도 정신적 공동체를 소재로 다룬 작품은 많을 겁니다. 하지만 본문에서 이야기한 소설들이 그랜드 마스터 작품이거나 유명 수상작이니 저 정도면 예시로는 충분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