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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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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일라이>의 치명적인 내용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 안 보신 분들은 주의하세요.
영화 <일라이>는 알버트/알렌 휴즈가 감독하고, 덴젤 워싱턴, 게리 올드만, 밀라 쿠니스가 주연한 포스트 아포칼립스입니다. 이름부터가 그렇듯, 이런 장르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대재앙 이후 벌어지는 비극입니다. 참담하고 끔직한 상황을 연이어 보여주며 풍족한 현대인들에게 재앙에 관한 경각심을 일깨우죠. 언뜻 보면 <일라이>도 다를 바 없습니다. 모든 게 무너진 세상은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어디에도 생기가 넘치지 않아요. 약탈자들이 사방을 돌아다니며, 조금이라도 방심한 자들을 습격합니다. 먹거리가 부족해 사람 고기를 먹는 것도 일상적이며, 깨끗하고 순수한 물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입니다. 폭정과 광기가 사람들을 지배하고, 여기에 반항하며 곧 목숨을 잃습니다. 이런 세상을 떠도는 일라이는 커다란 칼과 산탄총으로 무장하고, 시체에서 생필품을 구하고, 남들과 엮이길 싫어하는 과묵한 남자입니다.
이런 부류의 작품에서 늘 그렇듯, 황야를 방랑하던 일라이는 폭력이 얼룩진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사소하지만 큰 싸움을 거친 후, 마을 지도자를 만나죠. 마을을 지배하는 카네기는 물을 이용해 권력을 쟁취한 야심가입니다. 수원지를 점령해 사람들을 억압하죠.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민중을 완전히 수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민들을 보다 공고히 뭉치게 하고, 자신의 지도력을 발휘해줄 어떤 계기를 찾는 중입니다. 일라이와 마주친 카네기는 자신이 원하던 것이 상대방에게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넘기라고 요청합니다. 일라이는 단호히 거절하지만, 카네기는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에게 넘기라고 재차 요구합니다. 처음에는 회유하고, 그것이 안 통하자 설득을 하며, 나중에는 무력으로라도 빼앗으려 합니다. 일라이는 마을에서 도망치고, 카네기는 집요하게 상대를 쫓습니다. 이 와중에 카네기의 딸인 솔라라가 휘말립니다.
이쯤 되면, 한 가지 물음이 나올 법합니다. 일라이가 그렇게 소중히 지키려고 하고, 카네기가 혈안이 되어 빼앗으려는 저 물건이 뭘까요. 도대체 그게 무엇이길래 사람들을 한데 모으고 지도자의 위상을 높여준다는 걸까요. 아마 원제목을 보고 그 물건이 무엇인지 짐작한 사람도 있을 법합니다. 영어 제목은 <The Book of Eli>로 책, 그것도 뭔가 특별한 책이라고 암시합니다. 수수께끼는 비교적 초중반에 밝혀지는데, 바로 기독교 성경입니다. 사실 이 작품에서 대재앙 이후로 종교는 거진 사라진 것처럼 묘사합니다. 아마 각지에서 믿는 민간신앙이나 작은 종교 정도는 있겠지만, 세계를 주름잡던 굵직한 종교, 특히 배경이 미국임을 감안하면 기독교는 흔적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기도하는 법이나 십자가를 모르며, 눈 앞에서 성경을 보고도 그게 뭔지 모릅니다. 그나마 그게 뭔지 알고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은 일라이나 카네기 같은 사람들뿐입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성경을 둘러싼 두 사람의 갈등이 주된 내용입니다. 한 사람은 문화(또는 신앙) 보전을 위해서, 다른 한 사람은 사람들을 불러모으고 이끌기 위해서 성경을 얻으려고 합니다. 여기서 ‘이거 기독교 영화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는데, 음, 종교적인 색채가 강하긴 합니다. 성경을 보전하려는 일라이의 행동이 사도처럼 보일 수도 있고, 이야기 전개를 기독교적 구원과 연결시킬 여지도 있습니다. 주요 소재가 성경인 이상, 기독교다운 면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는 성경을 다른 것으로 치환해도 성립 가능합니다. 미국 영화이고, 미국이 배경이니까 기독교 성경이 나왔을 뿐, 다른 종교 성경이 나왔어도 괜찮았을 거에요. 같은 아브라함 계열인 꾸란은 말할 것도 없고, 불경이 나왔더라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합니다. 구원의 중심이자 깨달음(각성, 계시)을 주고, 사람들의 구심점이라는 점에서는 다 비슷하니까요.
진짜 중요한 건 일라이라는 사람의 신념입니다. 일라이는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성경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히 밝히지 않습니다. 이전 세대의 지식을 후대에 전하려는 목적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자신이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도나 역사 속 성인처럼 누군가의 음성을 들었고, 그 음성이 성경을 전수하라고 명령했다는 거죠. 자기는 단지 그 음성에 따라 책을 구하고, 전달할 뿐이라고요. 허나 작중 일라이가 대단한 사람이긴 해도, 그 말이 사실일지 확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희귀한 물품인 성경을 가졌지만, 그냥 우연히 찾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지만, 기적이 아니라 운이 좋았을 수도 있습니다. 음성을 들었다고 해도 어쩌면 정신 착란이었을지도 모르죠. 동행인 솔라라 역시 별 황당한 소리를 다 들어보겠다는 표정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정말 신이 점지했든, 운수 좋은 방랑자든 간에 일라이는 자기 임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라고 믿은 이상,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밀고 나갑니다. 이 영화를 종교적인 감흥이나 기독교적 구원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보다 더 앞서는 건 한 사람의 신념이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되물어볼 법합니다. 정말 신이 계시를 내린 건지, 자신이 뭔가 착각한 것은 아닌지 말입니다. 하지만 일라이는 그런 회의를 전혀 하지 않고 묵묵히 맡은 일을 해낼 따름입니다. 왜 자신에게 이런 가혹한 시련을 주는지, 어째서 자신이 그런 일을 해야 하는지 의심하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맹목적이고 목적 없는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으로 자기 삶을 망치는 종교인도 많으니까요. 하지만 작중 묘사로 봐서는 신을 따르는 종교인이 아니라 장애에 굴하지 않는 초인이나 철인에 더 가깝습니다.
어쩌면 보는 사람에 따라 영화 주제를 달리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일라이의 진짜 정체가 뭔지 모르기 때문에 열린 결말로 끝나거든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라면, 정말 계시를 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조직에서 파견한, 뚝심 굳은 여행자라고 볼 여지도 있습니다. 정신 착락을 일으킨 사람이 벌인 짓이라고 하는 것도 뭐, 말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물론 일라이의 마지막 기도는 분명히 종교인답고, 영화 속에서도 성경 내용이 두어 번 언급되기도 합니다. 솔라라가 여행을 떠나는 와중에 성경 내용을 퍼뜨릴 수도 있고, 알카트라즈에서 마침내 성경을 완성했으므로 이곳을 중심으로 종교가 부흥할 확률도 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세상을 떠나는 일라이의 모습은 보는 사람에 따라 너무 노골적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영화 포스터에는 ‘우리를 인도하소서!’라고 나오는데, 이렇게 보면 종교물에 가깝긴 하네요.
재미있는 건 이 작품이 종교의 부정적인 측면도 언급한다는 겁니다. 비열하고 잔인한 카네기 역시 성경이 필요합니다. 사람들을 종속시키는 그 위력을 익히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종교에 빠지면 광신도로 변하기도 하고, 비이성적인 짓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습니다. 무턱대고 믿음을 강요해서 자기 말만 따르게 하는 것도 가능하죠. 평소 카네기의 성격으로 볼 때, 성경을 이용해 다른 마을을 침공하거나 독재 정치를 할 우려도 충분합니다. 기독교가 아무리 구원을 떠들어도 성경, 그리고 거기에 적힌 신의 이야기는 이용하기에 따라 흉악한 무기로 변모할 수 있습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우리 곁에서도 광신도들이 얼마나 비논리적으로 행동하는지 잘 보이지 않습니까. 카네기라면 신도들에게 그런 행동을 강요하고, 자기는 뒤에서 배를 불리고도 충분한 인간이죠.
게다가 폭정에 시달리는 주민에겐 하소연하고 의지할 곳이 필요합니다. 하루하루 희망도 안 보이고, 살 의지도 없습니다. 더럽고 비참한 삶만 이어지며, 카네기를 따르는 것도 무서워서 그러는 거지 마음에서 우러나와 그러는 건 아니죠. 이럴 때 종교는 주민들의 시름을 덜어줄 효과적인 방편입니다. 저 하늘에 있는 신이 하소연을 들어준다면 그거야말로 반가운 상황. 성경은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 메시아가 주민에게 한줄기 빛이 되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이 비루한 삶에서 구원해줄 그리스도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현재 삶을 인내하겠죠. 칼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는데, 그 부정적인 뉘앙스가 잘 맞아떨어지는 상황입니다. 종교는 지배자가 억압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피지배자 억압에서 피난하는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구원자가 올 거라는 말만 믿고 현재 모순을 개선하려 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카네기가 성경을 얻고 그걸 읽었다면 이랬을 것 같습니다. 우선 자신을 신부나 목사로 자처하겠지요. 그 다음에 마을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눠주거나 혹은 나눠주지 않고 이야기만 들려줄 겁니다. 주민들 중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성경을 제멋대로 해석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야기만 들려줄 가능성이 더 높을 듯합니다. 뭐가 되든 간에 종교 지도자를 겸한 카네기는 성경대로 살 것을 권장합니다. 척박한 세상에 그냥 설교만 한다고 주민들이 따라줄지 의문이므로 초기에는 물질적인 혜택도 제공하겠죠. 억압받는 주민들에겐 탈출구나 의지할 데가 절실할 테니까 서서히 독실한 신자가 나올 겁니다. 다른 마을과 교류가 별로 없는 폐쇄된 환경이니까 신자를 빨리 양성하겠죠. 제정신 차리고 반항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기독교가 늘 그랬듯) 믿음이 없다며 몰아붙일 겁니다. 서서히 퍼뜨린 불씨가 곧 크게 번지고, 마을은 기독교가 융성할 겁니다. 카네기는 땅따먹기를 위해 포교를 시작할 테고, 어쩌면 다른 마을로 쳐들어가는 성전을 벌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개인적인 추측인데, 세상이 멸망한 이유도 종교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작중에서는 핵전쟁이 벌어져 망한 것으로 나오는데요. 전쟁 원인이 혹시 종교 아닐까요. 기독교과 이슬람의 반목이 커져서 서로 쌈박질을 벌이다 같이 망했다거나, 카톨릭과 개신교의 불화로 핵탄두까지 쏴대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거나 등등.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성경이 상당히 귀하기 때문입니다. 일라이가 소유한 책이 지상에서 마지막 남은 성경인양 나오거든요.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흔한 물건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이며 그 흔한 성경이 단 한 권도 없다는 건 의심할만한 대목입니다. 기독교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전무하다는 것도 그렇고요. 게다가 성경 때문에 싸움이 일어났다는 식의 대사도 한두 번 나옵니다. 과거에도 명분이 어떻든 종교 전쟁은 벌어졌으므로 또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지요.
너무 기독교 이야기만 하는 것도 같지만, 사실 이 영화가 그렇습니다. 일반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재앙 이후의 비참함에 주목하지만, <일라이>는 재앙을 토대로 종교 또는 신념에 관해 늘어놓습니다. 저는 이런 설정이 참신하더라고요. 오늘날 3대 종교에 속하는 기독교를 아무도 모르고, 성경도 한 권만 남았다니, 희한한 세상 아닙니까. 물론 종교를 소재로 한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이 작품이 처음은 아니겠지만, 유명 배우가 출현하는 미국 상업 영화치고는 신선한 설정입니다. 특히나 ‘악당이 성경을 노리고 덤벼드는’ 플롯이 장점이라고 봐요. 성경은 선하거나 경건한 이미지가 있는데, 그걸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결국은 권선징악으로 끝나지만, 카네기가 성경을 차지하고 어떻게 될지 보여줬어도 좋았을 겁니다. 그랬다면 영화 주제가 좀 더 살아났을 텐데요.
영화의 단점이라면, 설정은 참신하나 캐릭터 연출이나 이야기 전개는 상투적입니다. 카네기는 비열한 악당이긴 하나 딱 거기까지이고, 그 이상 나가지 않습니다. 자기 애인한테만 잘 해주거나 배신당하고 무너지는 모습으로 입체적인 캐릭터를 구축하려고 한 것 같지만, 별 임팩트는 없습니다. 이왕 성경을 노리는 김에 사람들을 광신도로 몰아가는 모습을 보여줬어도 훨씬 나았을 것 같습니다. 일라이가 사도에 가깝다면, 카네기는 사탄이나 적그리스도 정도로 나와주는 게 어울리지 않을까요. 일라이는 우직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자세가 멋졌지만, 덕분에 개성이랄 게 없습니다. 고민도, 후회도, 다급함도 없어요. 그냥 앞에 뭐가 나오든 무찌르고 무뚝뚝하게 전진만 할 뿐입니다. 모호한 정체로 떡밥을 뿌리는 건 좋지만, 너무 평면적입니다. 솔라라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냥 히로인. 명배우들답게 다들 연기는 좋았지만, 시나리오 자체의 한계를 넘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길었지만, 사실 그렇게 대단하거나 뛰어난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디까지나 설정이 좀 색다른 포스트 아포칼립스 정도? 하지만 ‘좀 색다른 설정’ 덕분에 영화가 끝난 뒤, 여러 가지 생각도 해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