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나온 왕자가 영웅이 되는 이야기는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왕자는 혈통에 따라 권력을 계승받지만

때론 스스로의 우수함과 우월성을 강조해야 할 필요도 있기 때문에 그걸 위해 더러는 전쟁을 벌이고 더러는 업적을 쌓는다.

그러려면 궁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엔 한계가 있다. 왕자의 이름으로 권력을 휘둘러 문제를 해결해 버리면

주변인에게 왕자의 실력임을 입증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출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과 무관하게 그냥 궁이 싫어 나가는 왕자도 있다. 

'환' 이란 이름을 가진 매우 평범하고 띨해보이는 이 왕자도 그렇다. 

왕자로서 쌓아야 하는 교양을 쌓기를 거부하고 탈출을 벌이는 것이다.


왕국은 평안하고 백성들은 만족했다. 

하지만 그런 평화롭기 그지 없는 시기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왕자 '환' 이었다.

왕자는 졸려 보이는 눈매와 축 쳐진 어깨를 가졌지만 그는 나라를 세운 건국 시조, 왕중의 왕, 영웅중의 영웅으로 불리는

절륜왕의 직계 후손이었다. 졸렬한 외모에 불구하고그에게서 풍기는 기도는 왕가의 피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으니 그것을 

감히 부정할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의 핏속에는 모험과 위험을 찾는 끓어오르는 피가 넘치고 있었으니 그런 그에 안온한 궁정 생활은 말 그대로 지옥과도 다를 바 없었다.


왕자가 몸을 숨기고 어둠을 틈타 궁궐 담을 넘었지만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왕자의 방에 왕자를 깨우러 들어온 시녀는 깜짝 놀랐다.

왕자의 침대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뭐야! 왕자가 없어!"

보고를 받은 국왕은 뭔가 불길한 느낌을 감출 수 없었다. 며칠 전부터 심심하다느니 외롭다느니 먼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쉴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국왕은 당장 왕실 비고를 조사하라고 일렀다. 시종장이 뛰어와 사색이 되어 말했다.


"보.. 보물중에 몇몇 보물이 보이지 않습니다. 은신의 보옥과..운명의 목걸이. 그리고 치유의 단검이 사라졌습니다."


"무.. 무어라!"


은신의 보옥은 때가 꼬질꼬질한 눈깔사탕만한 크기의 수정구슬이었는데, 이것은 가진 자의 기도를 감추어 찾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 구슬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한눈에 왕자의 패기를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나 이 구슬을 지니고 있다면 왕자의 기색을

알아채는 것은 불가능했다. 왕자가 이걸 들고 나간 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함이 틀림 없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보물은 왜 들고 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운명의 목걸이는 잘될 운명이든 잘못될 운명이든간에 이 목걸이만 있다면 그 운명은 매우 강렬하게 다가온다고 전해져 있었다. 

5대왕이 즐겨 착용하고 있었으나 그의 치세에 너무나도 황당하고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난 탓에 궁중비고에 엄중히

보관되어 착용이 금지된 봉인된 보물이었다.

치유의 단검은 5대 성검중 하나로 그중 가장 작았다. 이 단검은 상대를 죽이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이 단검으로 찌른 상처는 칼을 

떼기가 무섭게 금새 아물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근위대장!!!!" 

국왕이 노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예!"

"당장 왕자를 잡아들여라! 근위대를 모두 동원해!"

"예!"

근위대에 비상이 걸렸고 왕자를 체포하기 위한 부대가 추적에 나섰다.


왕실비고에 보물들은 많았다. 그중 일부는 나라가 아니라 세상을 뒤흔들 만한 것들도 있었다.

그중에 없어진 물건들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자의 신분으로 왕실비고를 털었다는 점이 국왕의 진노를 사

근위기사단은 졸지에 토벌대가 되어 왕자를 쫒기 시작했다.



"역시 바깥 세상은 좋구나."


팔자좋은 소리를 하던 왕자 환은 매우 촌스러워 보이는 복장을 하고 왕궁에서 제법 떨어진 시골길을 터덜 터덜 걷고 있었다.

첫날 밤에 시속 8km 속도로 4시간 동안 도주했으니 30여 km 쯤을 이동한 것이다.

한참을 걸어가던 그는 한 다리 위에서 소란을 피우는 한 무리를 만났다. 


"당장 놓지 못해!"

한 16세쯤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지만 주위의 불량해 보이는 패거리는 히죽거리며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 놓으라고? 싫은데?"


"당장 놓지 않으면 네 놈들 죽어서도 묫자리도 찾지 못하게 해 주지."


"어이쿠 무서워라."


"일단 네놈부터 저주해주마!"

소녀가 독기어린 눈으로 상대방을 쏘아보았지만 패거리는 키득거리며 소녀를 끌고 어디론가 가려 하고 있었다.


"잠깐!"

왕자 '환' 은 백주 대낮에 벌어지는 납치극을 보고 핏속에 흐르는 정의감이 동하는 것을 느꼈다.


"네놈들은 무엇이냐. 백주 대낮에 소녀를 납치하다니. 당장 그 손 놓지 못할까."

왕자가 거들먹거리며 나서 외쳤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다. 왕자는 한층 더 기세를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아무도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소녀와 패거리는 욕지거리를 뱉으며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 자식들아! 내 말 안 들리냐!"

은신의 보옥의 효과는 탁월해서 왕자가 코끼리라도 쫒아보낼 듯 큰 소리로 외치자 그제서야 패거리와 소녀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뭐야 이 녀석은? 그진가?"

패거리는 왕자를 비웃었다. 왕자의 몰골은 계속되는 구보로  먼지 투성이 흙투성이가 되었고 도주를 위해 선택한 추레하고 평범한

작업복때문에 매우 남루해 보였다. 그런 몰골과 비무장인 왕자의 모습이 패거리에게는 우습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말은 왕자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왕자는 크게 스텝을 밟으며 거리를 줄였다. 20m 정도의 거리가 바람처럼 흐르며 지나갔고 다음 순간 왕자가 때려눕힌 한 남자가

10m쯤 떨어진 풀숲으로 쳐박혔다. 


"이 자식이!!"

패거리가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패드로!!" 

한명이 풀숲에 쳐박힌 일행을 향해 급히 뛰어갔다. 형제나 친한 친구쯤 되는 모양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내 목숨은 살려주려고 힘을 조절하였으니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왕자 '환' 은 거들먹거리며 이야기했다. 


"패드로가 죽었어!"

건달 한명이 울먹이는 소리로 외쳤다.


"뭐...? 뭐???" 

왕자는 당황했다. 왕궁에서 처음 나와 한 일이 살인이라니! 이들이 첫눈에 봐도 죄질이 나빠 보이는 엑스트라임엔 틀림없지만

칼도 아니고 대충 후려갈긴 주먹 한방에 날아가 죽을 정도라면 앞으로의 인명경시풍조가 보지 않아도 뻔할 듯 했다.


"용서할 수 없다! 페드로의 복수!"

일행은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들이 들고 있는 것은 약간 긴 정도의 단검, 오히려 근거리에 포위되었을땐

장검보다 더 골치아픈 것이다. 거리가 짧고 빠르기 때문에 휘두르는 데 크게 제약이 없고 등 뒤에서 사각을 파고드는 

경우엔 대치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인의 경우 이야기고 밥만 먹고 전투를 위해 단련된 전투민족. 혹은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왕자에겐 

그런 것은 통하지 않았다. 치와와떼에게 강철 발톱을 달아줘 봐야 호랑이 앞에선 아침요기 거리도 되지 않는 것이다.


왕자가 잠시 팔다리를 휘저으니 일행들은 모두 어디론가 나가 떨어져 길게 뻗어 있었다.


남은 것은 소녀를 붙잡고 있는 한명의 약간 나이들어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필시 리더로 보였다.


"이제 다 끝났다. 그녀를 놔줘라."


"너... 이 미친 놈.. 이 여자는 마녀란 말이야."

청년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마녀가 뭐." 

왕자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다가서며 말했다.


"저주받을 거다. 세상이 저주받는단 말이다!" 

남자는 여자를 잡고 칼을 높이 쳐 들었다. 


"거기까지!"

왕자는 바람처럼 날아 강렬한 진각을 밟으며 통배권을 날렸다. 소녀를 방패로 삼던 청년은 소녀의 몸을 통해

전달된 강렬한 진력에 복부를 얻어맞고는 몇바퀴 데굴데굴 구르며 날아갔다.


"다친 곳은 없소?"

왕자는 땅에 넘어진 소녀에게 손을 내밀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친 놈아! 때려 놓고 다친 곳이 없냐고 묻는 놈이 어디있어!"

소녀는 맞은 배가 몹시 아픈 듯 배를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통배권이라. 직접 맞아도 타격 목표가 아니면 직접적 타격은 입지 않...."


"아프잖아!"


"저기 쟤 정도 되어야 아프다고 하는 거요."

뒤를 보니 통배권에 맞고 날아간 청년은 게거품을 물고 쓰러져 꿈틀거리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상태가 매우 위중해 보였다.


"그나저나 저 놈들은 누굽니까. 왜 소저를 잡아가려고 하는 거죠."


"소.. 소저가 뭐야 그 웃기는 말은. 여튼 나는 대마녀 소린이라고 해. 구해줘서 고마워. 저 놈들은 이 지역 영주의 졸개들인데..."


"멈추어라!"

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위엔 20명쯤 되어 보이는 무리가 포위해왔다.


"영주님의 공무를 방해하는 악적들은 듣거라! 네 놈들의 죄를 알렸다! 당장 무릎 꿇고 오라를 받도록 해라! 항거하는 자는 죽음 뿐이다!"

아까의 건달들과는 달리 이들은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왕자가 주먹을 꺾으며 가볍게 앞으로 나가려고 할때였다.


"늦었어."

소린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종이를 한장 들어 보였다. 새까만 먹물로 적혀 있는 문양은 매우 불길해 보였다. 그것은 이내

검은 그을음을 내며 타 버렸다.


"뭐?"

그 순간 하늘에서 씨웅~ 하는 소리를 내며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거대한 불덩어리였다. 그 모습을 보고 병사들은 모두 자리에

주저 앉았다. 그 거대한 불덩어리는 저 멀리 언덕 위에 있는 성에 충돌했고 성은 콩가루 날리듯 산산조각이 나서 부서져 버렸다.


"영주관이!! 성이!! 이 마녀!! 어찌 이런 참람한 짓을!"

병사를 인솔해 온 대장 같은 자가 눈물을 흘리며 외쳤다.


"너희도 저주해 줄까?"

소린이 씨익 웃으면서 쳐다보자 병사들은 겁에 질려 다들 도망쳐 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소린은 쓴 웃음을 지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왕자가 입을 딱 벌리고 물었다. 척 봐도 마법인데 저렇게 가볍고 간단하게 쓰는 대단위 파괴마법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성을 가볍게 한방에 날릴 수 있으면 전쟁은 왜 있고 싸움은 왜 하겠는가 그냥 서로 서로 저런 걸로 쓱쓱 날리면 전쟁 같은 건 없을테니까.


"나는 대마녀 소린이라고 해."


소린은 악당 영주에게 잡혀갈뻔 한 마녀였는데, 악당은 죽고 천벌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아까 그 불덩어리는 대체 뭐요? 저주라니. 세상에 그딴 저주가 어디 있소?"


"그건 영주가 지은 죄를 그대로 돌려받는 거지. 그런데 그렇게까지 죄를 많이 지었을 줄은 몰랐네. 보통은 벼락 정도로 끝나는데. 내가 하는 일이 그런 거야. 인과응보를 돌려주는 거지. 그가 선한 사람이면 복을 받고 나쁜 사람이면 벌을 받아. 내가 하는 저주라는 건 그가 한 행적에 따라 받게 될 결과를 조금 미리 당겨오는 것 뿐이야."

물론 그녀의 저주는 그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지근거리에 있는 왕자가 무심코 집어온-돈이 떨어지면 팔 생각인-운명의 목걸이가 개입한 탓에 영주의 운명은 매우 드라마틱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소린과 왕자는 이후 방랑시인 고햇과 난쟁이 구르타등의 동료를 만나 왕국을 뒤흔드는 모험을 계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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