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작품 게시판 - 영화/애니/만화/소설/드라마/다큐멘터리
슈퍼 로봇 이야기, 괴수/괴인/초인 이야기 외에... 다양한 작품과 장르를 다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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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대략적인 내용누설 있습니다. 결말까지 누설하진 않으나, 사전정보를 피하고 싶으신 분께선 주의하세요.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배트맨을 좋아합니다. 음지에서 활약하는 다크 히어로, 평범한 인간이지만 첨단장비를 활용, 머리를 굴려 지능적으로 적과 싸우는 탐정의 면모 등등 다양한 특징이 있죠. 저 같은 경우는 슈퍼 히어로이면서 크리쳐에 가까운 모습 때문에 끌렸습니다. 배트맨은 일종의 도시전설로서 범죄자들에게는 거대한 박쥐 괴물입니다. 브루스 웨인은 괴물처럼 보이기 위해 박쥐 형상의 가면을 쓰고, 어둠 속을 배회하며, 조직 폭력배들을 낚아챕니다. 밤중에 뒷골목을 돌아다니면 야수가 잡아간다는 공포가 떠돌고, 브루스가 노리는 바도 이거죠. 동물을 모티브로 삼은 유명한 초인으로는 스파이더맨이나 울버린 등도 있지만, 이들은 배트맨처럼 도시전설을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동물 능력을 흉내내는 초인에 지나지 않죠.
하지만 배트맨이 박쥐를 이용한다 해도, 그것이 상징성에 그칠 때가 많습니다. 늑대인간이 실제 늑대와 별 접점이 없듯이 브루스 웨인도 (작품마다 차이는 있으나) 실제 박쥐와 소통하는 일은 별로 없어요. 배트맨의 시작과 끝을 다룬 걸작 그래픽 노블 <이어 원>과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예로 들어 볼까요. 두 작품에는 모두 브루스가 박쥐를 만나는 특별한 장면이 나옵니다. <이어 원>에서는 창문으로 날아든 박쥐를 보고 영감을 얻어 가면을 씁니다. <다크 나이트 리턴즈>에서는 억눌렀던 잠재의식이 각성할 때 박쥐가 날아오는 환상을 보고요. 그 외에는 다크 히어로다운 모습만 부각할 뿐, 박쥐와의 관계를 묘사하지 않습니다. 수많은 박쥐 떼를 불러들여 경찰의 포위망을 돌파하는 장면이 장관이지만, 배트맨이 박쥐와 교감한다고 보긴 어렵죠.
팀 버튼이 감독한 실사영화 시리즈도 그렇습니다. 여기선 브루스가 왜 박쥐 모습을 선택했는지 구체적인 이유가 안 나옵니다. 다만, 추측할만한 단서는 있습니다. 1편 인트로 장면은 배트맨이 범죄자들에게 도시전설로 떠올랐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강도 두 명이 괴물이 나타났다, 동료가 피를 빨리고 잡혀먹었다는 식으로 수군거리죠. 언론에는 (밥 케인이 직접 그린!) 괴물인간 그림이 떠돕니다. 이런 효과를 바라고 검은 가면을 쓴 것일 테죠. 그러나 브루스가 박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거의 안 나옵니다. 생존력이 강한 동물이라고 지나가는 말로 툭 던지는 게 전부입니다. <배트맨 리턴즈>에서는 박쥐 떼에 휩싸여 활공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펭귄의 계략이었죠. 배트맨 본인이 원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었고, 그 와중에 박쥐와 소통하고 그런 거 없습니다.
조엘 슈마허가 감독한 영화 시리즈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그나마 <배트맨 포에버>에서 브루스의 심리가 어느 정도 드러납니다. 어렸을 적에 동굴에서 박쥐를 봤는데, 그 모습이 하도 인상적이라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심리 테스트에서도 박쥐를 연상할 정도이니, 무의식에 말뚝 박았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이후 배트맨에게 호되게 당한 리들러도 커다란 박쥐가 날아오는 걸 목도하는데, 배트맨의 공포가 어떻게 전염되는지 알려주는 기막힌 장면이었습니다. (<포에버>는 배트맨을 고찰하기엔 좋은 작품입니다. 다른 부분이 문제라서 그렇지.) 여기서 브루스와 박쥐 괴물의 관계를 좀 더 깊이 살펴봤으면 좋았겠지만, 속편 <배트맨과 로빈>은 기대를 저버린 영화였습니다. 브루스는 그냥 차림새만 박쥐일 뿐, 실제 박쥐나 박쥐 이미지에 관한 생각은 전혀 안 합니다. 로빈이나 배트걸이라고 해서 동물과 교감하는 것도 아니고요.
브루스 팀이 감독한 애니메이션 시리즈는 원작 코믹스를 바탕으로 팀 버튼의 정서를 혼합했습니다. 그래서 브루스 웨인과 박쥐의 관계가 그리 돈독하게 나오지는 않는 듯합니다. 장편 시리즈라서 에피소드도 많고, 배트맨이 박쥐 떼를 이용하는 광경도 여러 번 나오긴 해요. 허나 그 이상 나가지 않습니다. <마스크 오브 판타즘>에 배트맨이 된 정황이 나오며, 브루스가 박쥐를 보고 겁에 질리는 장면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의식까지 침범한 공포라기보다 갑자기 어두운 곳에서 날짐승들이 튀어나오니까 약간 당황했을 뿐입니다. 여기서 힌트를 얻어 박쥐 가면을 쓴 거라 동물과 교감하거나 소통할 겨를이 없었지요. 애니메이션의 주제가 동물의 공포도 아니었고요.
명작으로 칭송하는 <아캄 수용소>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브루스 웨인이 안 나오고 배트맨만 나옵니다. 수용소에 갇혀서 계속 전투를 치르러야 하는 게임인 이상, 배트맨의 활약이 커지는 건 어쩔 수 없죠. 그래도 허수아비가 나와 심리를 조절할 때, 뭔가 박쥐와의 관계를 드러내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허나 부모의 죽음만 트라우마로 남았는지 날짐승을 보고 경외하는 장면은 없었습니다. (허수아비와의 전투가 확실히 기억이 안 나지만, 거대한 박쥐 나오는 장면은 없었을 겁니다.) 외부에서 박쥐를 소환해 싸우는 연출도 나왔으면 싶었는데 없더라고요. 대중이 원하는 배트맨의 모습을 유저 취향대로 구현할 수 있습니다만. 초음파로 박쥐를 불러 범죄자들을 공포에 빠뜨리거나 하는 기술이 있었으면 꽤 재미있었을 텐데요. <아캄 시티>는 자세히 안 해봐서 저런 기술이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이런 전례에 비추어 보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비긴즈>는 의미심장합니다. 왜 박쥐를 선택했는지 묘사한 작품은 많았습니다만, ‘어떻게 박쥐를 받아들였는지’ 논하는 작품은 별로 없었으니까요. 이 영화에서 브루스 웨인은 박쥐에게 3번 휩싸입니다. 우선 어렸을 때 동굴에 떨어져 박쥐 무리의 습격을 받습니다. 여기서 공포를 느끼고, 이게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자리 잡습니다. 둘째는 성인이 된 후, 다시 동굴에 찾아왔을 때입니다. 여기선 박쥐 떼를 스스로 찾아가고, 공포를 극복하는 혹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경찰 특공대가 포위했을 때 초음파 발신기로 멀리 있는 박쥐 떼를 불러들이고, 그 속에 섞여 탈출합니다. 박쥐와 함께 걸어나가는 배트맨을 죄수들은 기이하게 쳐다봅니다. 공포를 이겨낸 후, 그걸 이용하고 퍼뜨릴 줄 알게 되었죠.
이 과정에 변증법을 대입하면 지나친 해석이겠습니다만. 어쨌든 브루스가 변모하는 과정이 변증법과 유사한 3단계이긴 합니다. 일단 공포를 느끼고, 나중에 그것을 이겨냈죠. 정반합의 원리처럼 두 가지를 종합해 자신의 공포를 남들에게 퍼뜨리게 되었고요. <배트맨 이어 원>이나 <배트맨 리턴즈>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지만, <비긴즈>만큼 전율적이지는 않습니다. 저런 정반합 과정이 없고, 브루스와 박쥐의 관계를 단순하게 그려냈기 때문이죠. 더군다나 <비긴즈>는 시종일관 현실적인 도심지 분위기를 추구합니다. <배트맨 리턴즈>야 몽환적인 판타지고, <이어 원>은 현대 도심이긴 하나 칙칙하고 퇴폐적이라 도시괴담이 잘 어울립니다. <비긴즈>의 고담은 이와 정반대죠. 그런데도 박쥐와의 교감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도시전설이나 주술에 가까운 이미지인데도 현대 도심지 분위기와 잘 맞아 떨어지죠.
애석하게도 후속작 <다크 나이트>는 전작의 박쥐 해석을 지워버립니다. 전작이 도시전설과 현실주의 사이에서 줄타기했다면, <다크 나이트>는 보다 현실주의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실감나는 범죄물을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겠죠. 거기다 조커라는 혼돈의 사도까지 등장한 만큼, 배트맨은 한층 인간에 가까워져야 할 필요가 있었고요. 박쥐동굴이 망가져서 임시 거처로 옮긴 터라 실제 박쥐가 나올 여지도 없긴 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면서 박쥐 한 마리 안 날아 다니는 게 불만이었으나, 그렇다고 대안이 있다는 생각도 안 들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크 나이트 라이즈>가 개봉했습니다. 감독이 말하길 이 작품은 1편과 더 가까울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고편을 봐도 베인과 치고 받고 싸우는 등 액션이 들어갈 공간이 많았고, 그림자 군단이 돌아온다는 말도 나왔지요. 티저 에고편에서 라스 알 굴이 ‘무언가 전설적인 것’을 암시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래서 1편처럼 브루스와 박쥐의 관계를 재조명할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초음파 발신기로 박쥐 떼를 대동한 것 이상으로 장엄하고 신비로운 장면이 나오길 기다렸지요. 또한 정면으로 돌격하는 힘 위주의 베인과 기습으로 치고 빠지는 민첩 위주의 배트맨도 예상했고요. 정면 승부로는 상대가 안 될 테니 박쥐처럼 날아다니거나 뒷통수를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마지막 3편은 배트맨의 상징성에 관심 없습니다. 배트맨은 수면 위로 부상한 민중의 영웅이 되었고, 더 이상 도시전설이 아닙니다. 도시전설이 아닌 바에야 거대한 야수 이미지를 유지할 필요 없고, 굳이 브루스 웨인과 날짐승의 상관 관계를 말하지도 않죠. 후반부 전개는 아예 작정하고 양지바른 곳으로 이끌어냅니다. 개인적으로 이 점이 아쉽긴 하지만, 생각해보면 대미를 장식하는 만큼 언제까지고 배트맨을 뒷골목 괴물로만 남겨둘 수도 없는 노릇이긴 합니다. 고담의 도시전설로만 남았다간 금방 잊혀질 게 뻔하잖아요. 게다가 <다크 나이트>의 연관성도 드러내야죠. 2편에서는 인간으로서의 배트맨을 강조했는데, 3편에서 다시 박쥐 괴물로 돌아가는 것도 갑작스러울 겁니다. 새로운 캐릭터가 나오는 만큼, 너무 브루스 웨인에게만 치중해서도 안 되고요.
--- 현재 가장 유명한 배트맨 시리즈가 박쥐 이미지 없는 작품이라는 건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만일 놀란 감독이 3부작으로 만들 생각이 있다면, 그 때는 <배트맨 비긴즈>처럼 박쥐 떼를 화면 한 가득 내보내는 연출을 보여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박쥐 행세를 하지 않는다면, 배트맨이란 이름을 무엇 때문에 붙이고 다닌다는 말입니까. ---
윗글은 예전에 <다크 나이트>를 보고 아쉬워서 해본 소리입니다. 저 말을 한 게 2009년이니까 아직 <다크 나이트 라이즈> 계획이 없었을 때죠. 결국 3부작으로 나오긴 했는데, 박쥐 떼가 가득 나오는 연출은 없었네요. 뭐, 배트맨의 특징이 야수성만 있는 건 아니니까 배트맨을 크리쳐로만 보는 것은 좁은 시각이고,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지요. 서사시에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감독으로서는 3편을 저렇게 끝낸 것이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 베인 일당이 하수구에서 날뛰자 경찰 쪽에서 킬러 크록 떡밥을 흘리더군요. 하수구에 악어가 사는 것도 아닌데 왜 조사하냐면서요. 이 대사를 듣고 혹시나 킬러 크록이 조금이라도 나올까 기대했는데, 결국 그냥 개그에 불과했습니다. 음, 역시 개인적인 취향으로는 뭔가 괴물 비슷한 게 나오는 도시전설 영화가 들어맞나 봅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이 킬러 크록을 내보낸다면 어떻게 바꿨을지 궁금하네요. 베인을 평범한 용병으로 바꾼 것처럼 그냥 우락부락 못생긴 거인으로 바꿨을 것 같습니다.
브루스가 구덩이 감옥을 빠져나올 때 벽 틈새에서 박쥐떼가 후두두둑 날아와서 순간적으로 움찔하는 장면이 있는데 크게 장엄하거나 길게 이어지진 않지만 어떤 면에서는 브루스가 다시 배트맨으로 돌아가는 과정의 마침표를 찍는 느낌이 들었죠.
또한 결말에 (이름을 말할 수 없는 모 조연)가 배트케이브 발견했을 때 거의 브루스의 2단계(어른이 된 뒤 박쥐에 휩싸임)와 비슷한 장면을 연출합니다. 브루스의 박쥐 토템(두둥)이 그에게로 옮겨가서 새로운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기대를 주는 명장면이었지요.
이런 점에서 보면 비긴즈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닭나잇(...)보다는 박쥐의 상징성에 힘을 기울인 흔적은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