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런의 배트맨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비긴스입니다.
  거기서도 특히나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두개입니다.

  하나는 여명의 동굴속에서 웨인이 박쥐떼와 조우하는 장면입니다. 마치 박쥐의 신에게 신내림을 받는 듯한 이 주술적인 장면은, 비긴스 자체가 매우 사실적인 배경을 강조하는 터라 특히나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몽환적이고 마법적인 순간은 웨인이 인간의 탈을 벗어던지고 어떻게 도시괴담적인 존재인 '박쥐인간'으로 재탄생하였는지, 일언반구의 설명없이도 확연히 이해하게 해 줍니다.
  생각해보세요. 예측할 수 없는 무자비한 폭력으로 부모를 잃은 남자가 그 폭력을 이겨낼 힘을 찾으며 세계를 방황하고, 벽에 부딫혀 절망하고, 희망을 찾았으나 오히려 거기에 실망하였고, 그나마 얻은 것만으로 만족하고 고민끝에 고향에 왔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거기서 부모의 추억과 현제의 상황에 기막힌 영감을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부족장을 지키지 못한 주술사가 더 강한 신을 찾기위해 방랑하다 고향에 도착하여 자신을 들여다보다 비로소 완성된 주술사가 되는 스토리도 바꿔도 손색이 없을 지경입니다.

  또 하나는 배트맨으로 모든 준비를 마친 웨인이 출격하면서 거대한 박쥐떼를 소환하여 적을 혼란시키고, 모두가 그 박쥐떼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배트맨 자신은 보무도 당당하게 박쥐떼 가운데를 걸어가는 장면입니다. 동굴에서 신내림이 배트맨의 시작이라면 박쥐와 함께하는 배트맨은 배트맨으로서 완성된 존재입니다. 박쥐를 다루는 마법을 자유자재로 쓰는 그 모습엔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였으니까요(정확히 말하자면 마법이 아니라 과학의 힘을 쓴 거지만... 사소한건 넘어갑시다(음?)). 이것은 어둠속에서 범죄자를 사냥하는 배트맨의 모습과 함께 제겐 배트맨의 정체성으로 자리잡았죠.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주던 '주술적인 배트맨' 곧 '박쥐와 함께하는 배트맨'은 점차 사라져갔습니다. 물론 다크나이트는 명작입니다. 특히 죠커가 제시한 잔인한 게임에 두 배의 인원들이 갈등하는 장면은 너무나 인상적이라 다크나이트는 놀런의 배트맨에서 최고의 작품임을 부인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러나 최고라해서 마음에 드는건 아닙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죠커와 배트맨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들이 부정할 여지가 없는 '도시괴담'형 인물이란 점입니다. 사람을 웃게 하면서 죽게 만드는 신출귀몰한 범죄자. 그리고 박쥐를 자유자재로 부리는 마법을 쓰고 자신은 티끌조차 보이지 않으면서 범죄자를 사냥하는 정체 불며의 박쥐 괴물(일반인, 특히 범죄 관련자의 시각에서). 둘 모두 인간의 상식과 인지를 초월한 괴물입니다.
  영화는 광기에 물들어 인간의 도덕적 한계선을 넘은 괴물인 죠커를 잘 보여줬습니다. 배트맨에서 박쥐가 나오지 않은건 아쉽습니다. 쓰디쓴 마음이지만 이해는 합니다. 인간의 도덕을 넘은 괴수에게 인간의 선을 넘은 존재가 격돌한다면 그건 그냥 고질라대 모스라의 대결에 불과하죠. 주술적인 배트맨에 나온다면 영화의 매력이 반감되겠죠. 예. 이해해요. 그래도 박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다크나이트는 최고의 배트맨임에도 정이 안갑니다.

  이제 다크나이트 라이즈 상영장에 왔습니다. 전 잔뜩 기대했습니다. 전 베인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죠커와 달리 인간 내면에 숨은 악이 아니라 인간을 외면적으로 파괴하려는 존재죠. 박쥐를 부리는 마법이 등장할 때가 왔습니다. 이제야... 기나긴 기다림끝에 제가 사랑해 마지않던 '주술적인 배트맨'이 등장할 순간이 온 겁니다!

 ...물론 제 기대는 빗나갔습니다. 안좋은 의미로요. 안보신 분들을 위해 스토리는 적지 않겠습니다.
  박쥐는 딱 한 순간만 나옵니다. 배트맨이 제기하는 순간에만요. 거기다 클라이막스 전투는 낮입니다. 신이시여...

  배트맨에게 있어서 박쥐는 재탄생을 상징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배트맨 자신이 곧 박쥐에요. 박쥐는 그의 전투 스승이며, 전투의 동반자이며, 어둠을 거니는 배트맨의 동포이자, 배트맨의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당연히 배트맨은 박쥐와 함께 싸워야 했습니다! 그런데, 클라이막스 전투는 어째서 낮인 겁니까? 낮은 인간의 시간입니다. 박쥐의 시간이 아니라구요! 태양이 밝아오면 배트맨에게 힘과 지혜와 생명을 불어넣는 마법은 사라져버립니다. 대낮의 배트맨은 마법을 잃어버려 '보통 사람보다 조금 강할 뿐인 인간'밖에 남지 않는다구요!
  이전에 봤던 어메이징 스파이더맨에서 다정한 이웃이 실제 거미의 전술을 그대로 본떠 사용한 것과 비교하면 그 위화감이 더더욱 커집니다. 스파이더맨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거미줄입니다. 스파이더맨이 하수구에서 거미줄로 집을 만들어 실제 거미의 방식으로 커트박사를 사냥하던 것이 좋은 예죠.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배트맨이 박쥐의 전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양념으로만 들어가서 문제입니다. 제가 원하던 것은 거대한 악을 박쥐인간이 (박쥐를 다루는 마법(?)을 쓰면서) 박쥐의 방식으로 물리치는 것이었습니다. 근데 영화는 오 하느님.... 특히나 결정타는 배트맨 동상... 아아 하느님... 이건 하비 덴트 대신 배트맨이 들어선 격이잖아요! 고담시의 사람들은 영웅이 무슨 유행상품인줄로 아는 겁니까? 게다가 배트맨은 어둠에 속한 크리쳐입니다. 죽어도 어둠 속에 죽어야 했어요. 동상이 생긴다면 당연히 배트맨의 동상이 아니라 웨인의 동상이 서야합니다. 박쥐의 영광은 밤에만 존재합니다. 낮의 영광따윈 인간에게나 줘버려야 한다구요!

  어찌보면 이 영화는 배트맨의 영화가 아니라 존 블레이크의 영화이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와 브루스 웨인의 교감은 매우 심오하고, 그의 활약은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의 전체 활약보다 더 큽니다. 아예 대놓고 떡밥까지 풀고요. 그렇다 해도 마지막 장면에서 퇴역 형사에게 박쥐가 환영인사를 하는 장면쯤은 넣어줬기를 마지막까지 바랬습니다. 박쥐의 신이 선택한 새로운 주술사로서 말이죠. 그랬다면 저도 나름대로 납득은 했을텐데... 이제 박쥐는 배트맨의 정체성이 아니라 악세서리로만 남은 것 같아 아쉽습니다.

  영화가 나쁘단 예긴 아닙니다. 액션영화로썬 제법 무게감있고 볼만하죠. 그러나 제가 보려던 영화는 배트맨입니다. 전 박쥐인간이 나오길 바랬어요. 박쥐가 없는 배트맨이라니... 단밭빵이길 바라며 깨물었는데 공갈빵을 삼킨 느낌입니다.

[물고기군] 밤이면 언제나 아름다운 인생을 꿈꾼다. 사랑하고픈 사람과 별을 바라다 보고 싶을때 비오는날 우산들이 공허하게 스쳐갈 때 노래부르는 물고기가 되고 싶고 날개달려 하늘을 날고싶다. 아침의 차가운 바닥에서 눈을돌려 회색의 도시라도 사람의 모습을 느껴본다 부디 꿈이여 날 떠나지 마소서... [까마귀양] 고통은 해과 함께 서려가고 한은 갑갑하메 풀 길이 없네 꿈은 해와 함께 즈려가고 삶과 함께 흩어지네 나의 꿈이여 나의 미래여 나의 길을 밝혀 밤의 끝을 보내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