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족합니다. 사람들은 식량, 옷, 잠자리, 기기, 전기, 기름, 가스 등 온갖 유형/무형 자원을 별 어려움 없이 금방 구할 수 있죠. 기술의 발전으로 생산량이 늘어나고, 교통시설 증가로 세계 곳곳으로 물자가 이동합니다. 하루에도 수만 번씩 자동차, 배, 비행기가 물건을 실어나르고, 곳곳의 소매점이 이를 받아 판매합니다. 거리에 나가면 편의점, 슈퍼마켓, 대형 할인점, 백화점 등으로 가득하고, 각종 매체에서 소비를 부추키죠. 현대인은 이런 생활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물자가 끊기면 금방 공황에 빠집니다. 다행히 오늘날 도시는 인프라 구축이 잘 되어있어 자원 부족에 대처할 수 있지만, 만약 공급이 완전히 끊긴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순간 지상 위에 지옥문이 열리는 것과 다름이 없겠죠. 이런 비상 상황은 SF/판타지 창작물의 좋은 소재이고, 여러 작품들이 물자난의 아비규환을 그립니다.

 

물자 부족을 묘사한 창작물은 크게 두 가지를 읽을거리로 삼습니다. 우선 자원이 없는 상황을 가정하여 현대인이 얼마나 취약한가를 역설합니다. 인간 사회는 별다른 문제 없이 튼튼하게 굴러갈 것 같지만, 그건 눈에 보이지 않는 물류 시스템이 바쁘게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허나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지내죠. 그러다 사고가 한 번 크게 터지면 어쩔 줄 모르고 무너져 내리며, 이 과정에서 막강하게만 보이던 현대인의 약점이 드러납니다. 또한 이런 작품들은 별다른 도구도 없이 열악한 환경을 극복해내는 인간 승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주변에 이용할 물품이 없으므로 구식 장비를 사용하는 건 물론이요, 기계가 없어 동물의 힘을 빌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도구를 만들어내든가 그도 안 되면 자신의 육체적 능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요. 원시적인 인간이나 문명의 시작을 설명하기에도 좋습니다. 여타 SF물이 가제트를 부각한다면, 이런 유형의 작품은 가제트를 사용하는 인간을 부각한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자원/물자 부족이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고 봅니다. 일단 유형 자원으로 먹거리, 옷가지, 은신처 등 기본적인 의식주가 있습니다. 이 중에서 먹거리가 가장 비중이 크고, 그 중에서도 식량보다 식수가 더 중요하죠. 한데서도 잘 수 있고, 옷이야 좀 덜 입을 수도 있지만, 먹지 못하면 목숨이 위험하니까요. 그나마 식량은 상대적으로 구하기 쉽습니다만, 식량을 둘러싼 싸움은 인간을 짐승처럼 변모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처절해요. 또 이와 반대로 무형 자원도 있습니다. 인간 그 자체보다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원입니다. 전기, 석유, 천연가스, 태양열 등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사회가 마비되며, 마비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도 부지기수입니다. 당장 기름이 없어서 필요한 약품을 전달 못 하거나 전기가 끊겨 의료기기가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해보세요. 태양풍 때문에 전기가 끊긴다고 걱정하는 것도 결코 기우가 아닙니다.

 

도구, 장비의 부재도 큰 문제입니다. 자원이 있어도 막상 장비가 없다면 운용이고 뭐고 할 수가 없죠. 석유가 있어봤자 차가 없으면 어디로 갈까요. 화약이 있어도 총기가 없으면 적과 싸울 수 없고요. 그나마 유형, 무형 자원은 자연계에서 어떻게든 뽑거나 가공하면 됩니다. 허나 자동차나 총기는 개인이 쉽게 만들 수 없고, 여러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제조 시설이 있어야 합니다. 제조 시설을 짓는 데엔 막대한 비용이 들어가고요. 이 지경에 처하면 성능이 좋든 나쁘든 일단 손에 들어오는 물건을 울며 겨자먹기로 써야 합니다. 간혹 성능 좋은 장비를 발견할 때도 있으나, 수량이 너무 부족해서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곤 아껴 써야 하고요. 그나마 그거라도 있으면 다행이고, 아무것도 없으면 맨손으로 새로 시작할 수밖에요. 총이 없으면 원시적인 장궁을 만들고, 차가 없으면 우마라도 길들여야죠.

 

이렇게 ‘제한된 생존’이 잘 나타나는 장르가 포스트 아포칼립습입니다. 전쟁 같은 인적 사고든, 지진 같은 자연 재해든 간에 모든 세상이 쑥대밭으로 변하죠. 인류가 그 동안 구축했던 시스템과 기반 시설이 홀딱 날아가고, 당연히 물자를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 비상 물품을 비축하거나 대피소를 따로 만들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돌아갈 만큼 양이 넉넉하지 않아서 큰일입니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몇몇 조직이 갈라져 서로 싸움이 터지고, 그래서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깡패 조직들의 전투가 드물지 않게 나옵니다. 자원이 부족해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나, 그보다 사람 때문에 더 고생하는 경우죠. 그래도 사정이 좀 나은 게 주위 자연계는 아직 남아 있으니까요. 자연 환경에서 식량이나 동력원을 얻을 수 있고, 그렇게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 것으로 결말 나는 작품이 많습니다. 무법자들이 자원을 차지하겠다고 법석 떠는 걸 지나가는 게 제일 큰 고비입니다. 이것만 지나면 새 세상이 열립니다.

 

게임 <폴아웃 3>은 아예 메인 퀘스트가 식수 해결이죠. 낙진 때문에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없자, 정화 작업으로 오염된 물을 마실 수 있게 되돌리는 겁니다. 단순히 식수만 구하자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방사능에 오염된 모든 것을 예전으로 회복하자는 취지지만, 어쨌든 기초적인 프로젝트는 물 구하기입니다. 허나 돌연변이들, 온갖 황무지 깡패,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 (정부를 표방하지만 실은 악의 축) 엔클레이브까지 끼어들어 물 하나 구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식수가 중요한 만큼 정화를 하는 세력이 황무지의 정치를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만요. 작중에는 물 말고도 식량이나 화폐, 탄약을 구하기 어렵다는 묘사가 종종 나옵니다. 먹을 걸 구하려면 황무지의 괴물을 사냥해 간신히 끼니를 때우며, 물류 교환 시스템이 사라져 병뚜껑이나 모아서 동전 대신 쓰고, 탄약 좀 구하려고 탐지견(도그밋)을 시켜 사방팔방 뒤지고 다닙니다.

 

생존물도 자원이 없기로는 마찬가지인 장르죠. 이쪽은 포스트 아포칼립스와 다르게 세상 자체가 무너지진 않았습니다. 그보다 개인이 사회로부터 뚝 떨어진 것에 가깝죠. 배나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어딘가에 조난되었다는 게 흔한 설정입니다. 자신이 탔던 비행기에 식량이나 옷가지, 약품, 무기 등이 남아있다면 희망이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별 수 있나요. 처음부터 하나하나 만들어 가야죠. 포스트 아포칼립스가 기존의 자원을 독차지하려고 싸우는 쪽이라면, 생존물은 무에서 유를 생성하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지식 유무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생존 지식이라 하면, 자연 환경에서 유익한 것을 얼마나 취할 수 있느냐를 뜻하기도 합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주인공은 아는 게 없어도 살아남을지 모르지만, 생존물 주인공에게 지식이 필수적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과학 학습 만화들이 생존물을 표방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생존물은 필연적으로 주인공이 자연 지식을 늘어놓기 마련이라 교육적 효과가 높거든요. 일명 <~에서 살아남기> 시리즈를 보면 딱 그렇습니다. 기실 생존물 주인공이 제일 빛날 때가 저런 생존 지식을 줄줄 늘어놓을 때입니다. 생존 다큐멘터리 <맨 대 와일드>를 보면, 진행자 베어 그릴스가 하는 일이 대부분 그런 겁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뭐는 어디에 쓸 수 있고, 이건 먹을 수 있고, 저걸로 어떻게 하면 되고 등등 자연물을 어떻게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는지 설명하죠. 말로만 떠들면 별로 재미없으니까 가끔씩 괜히 폭포에서 텀블링 좀 해주고, 비행기에서 고공 낙하도 하고, 지나가던 개미나 거미도 씹어주고 하지만, 이런 행위들은 이벤트에 가깝습니다. SF 생존물은 이게 더 심해지는데, <신비의 섬> 같은 책은 내용의 절반이 거진 지식 늘어놓기입니다.

 

재난물은 생존물과 비슷해 보이지만, 성격이 다릅니다. 생존물은 대개 오지에서 사건이 터지지만, 재난물은 도시 한 가운데서도 발생할 수 있습니다. 고층빌딩이 화재에 휩싸이는 플롯이라면 얼마든지 도심지에서도 가능하죠. 따라서 물자는 충분하고, 물류 공급이 끊겨서 고생하는 경우는 그리 없습니다. 진짜 문제는 물자가 풍족한데 거기까지 갈 여력이 안 된다는 거죠. 가령, 4층에 갇힌 주인공에게 6층에 있는 식량이 필요한데, 4층에서 도무지 나갈 방도가 없는 겁니다. 지진이 일어나서 건물 일부가 붕괴되었거든요. 주인공은 처음에 절망하고 낙담하고 분노하다가 끝내는 방법을 찾아내서 6층으로 올라가죠. 재난물은 대개 이런 식으로 갈등을 고조시키고 내용을 전개합니다. 그래도 물자 부족이 중심 소재인 경우는 별로 없고, 자원이나 장비가 눈 앞에 있다는 점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나 생존물보다야 사정이 나은 것 같아요. 재난물 주인공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개인적으로 <새벽의 저주>가 기억에 남습니다. 이 영화는 좀비 아포칼립스이지만, 재난물 성격도 있으므로 예시로 들어보겠습니다. 주인공 일행은 쇼핑몰로 피신하는데, 마침 맞은편 총포상에 앤디라는 생존자가 있었습니다. 앤디는 저격솜씨가 일품이고 마침 머무는 곳이 무기 상점이라 좀비 헤드샷을 보여주며 쇼핑몰 생존자들과 근근이 잘 지내는 중이었는데. 문제는 총포상에 식량이 떨어졌다는 것. 앤디 입장에서 보면 참 죽을 맛인 게 바로 코 앞에 엄청나게 큰 쇼핑몰이 있습니다. 도로 하나만 건너면 온갖 식품을 다 맛볼 수 있어요. 그 가운데 좀비들이 득실거려서 탈이었죠. 쇼핑몰 생존자들은 앤디를 위해 강아지에 식량을 매달아 총포상 개구멍으로 보내지만, 그 구멍으로 좀비도 따라 들어옵니다. 앤디는 안타깝게 사망하는데, 쇼핑몰 옆에서 굶주리는 상황이 아이러니하더군요.

 

괴물 장르도 물자가 없어서 애로사항 꽃 피는 작품이 더러 있습니다. 괴물 장르는 특성상 주인공들을 어딘가 구석진 곳에 고립시킵니다. 고립된 주인공들은 처음에 괴물과 싸워보려 하지만, 금방 한계에 다다릅니다. 외곽 지역이라서 쓸만한 무기도 없거니와 설사 무기가 있다 해도 공급이 끊기거든요. 따라서 현재 보유한 무기를 아껴가며 목숨만 부지하기 급급합니다. 마침내 무기가 다 떨어지면 죽기살기로 큰 거 한 방 터뜨리고, 재수가 좋은 주인공만 살아나가는 사례가 많아요. 괴물 장르는 쌈박질이 많은지라 식량이나 기타 자원보다는 무기(탄약)가 부족하다는 묘사가 흔합니다. 인간이 괴물과 싸울 흔한 수단이 총기인데, 탄창 없는 총은 몽둥이나 다름없죠. 괴물이 인해전술로 달려들면 더욱 그렇고요. 사실 이는 괴물을 어느 정도 띄워주기 위한 의도도 있습니다. 무기가 충분하다면 몰려오는 괴물을 얼마든지 쏴 죽일 수 있고, 그러면 괴물이 별로 무서워 보이지 않거든요.

 

<에일리언 2>가 탄약 부족의 비애를 잘 보여주는 작품인 듯합니다. 해병대들은 식민지 행성에 고립된 후로 에일리언 개떼를 막기 위해 센트리 건을 설치합니다. 센트리 건은 초반에 나름대로 에일리언 웨이브를 잘 막아냅니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이 안 나는데, 센트리 건만으로도 몇 백 마리는 죽였을 걸요. 이후 에일리언들은 화망을 회피하고자 천장을 통해 침입하는데, 우연히도 이 시점에서 센트리건 탄약이 다 떨어졌죠. 탄약을 표시하는 숫자가 계속 떨어지는 장면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데, 탄약량이 0을 가리키는 순간 해병대 목숨은 끝장이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면 펄스 소총에 디지털 잔탄 표시가 있는 것도 관객에게 긴박감을 주기 위함인 듯합니다.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에서 이를 오마쥬했고, 저글링들이 미친 듯이 몰려오는 가운데 잔탄 표시로 해병의 최후를 알리죠.

 

던전 탐사도 물자 부족으로 허덕이는 경우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엔 하도 판타지 게임이 많아서 던전에 들어갔다가 포탈 열고 마을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만. 초기의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에서는 긴급 상황을 감안하고 들어가는 곳이 던전이었습니다. 한 번 들어가면 대략 하루이틀 지나야 다시 나올 수 있는데, 마을에서 준비한 물자가 떨어지면 그 때부터는 생존 싸움입니다. 통로가 막히거나, 배낭을 잃어버리거나, 몬스터가 예상 외로 많거나 등등 일정이 지체될 까닭은 많으니까요. 식량이 떨어지면 던전에서는 구할 길도 막막하고, 궁수나 사수는 화살/화약 보충도 어렵죠. 게임에서야 복도에 있는 상자 덜컥 열면 화살이 몇 십 개씩 튀어나오곤 합니다만. 일개 모험가가 지닐 수 있는 화살 숫자는 고작 해야 30개 안팎일 테고, 실제 던전에 보물상자가 널렸을 거란 보장도 없지요.

 

이거 말고도 제한적인 생존을 논하는 장르가 더 있을 것 같은데, 일단 제 머리로는 이 정도가 떠오릅니다. 소설 <세계대전 Z>를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연합군이 세계 2차 대전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 아무나 붙잡고 한번 물어보시오. 전쟁에 관해 기본적인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세 가지 진정한 이유를 댈 거요. 먼저 더 많은 물자를 제조할 수 있는 능력, 적군보다 더 많은 탄환, 콩, 붕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 말이지. 두 번째로 그런 물자를 제조할 수 있는 천연자원을 구할 수 있는가의 여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런 자원을 공장으로 수송할 뿐만 아니라 완제품을 최전방으로 수송할 수 있는 물류 시스템을 갖추는가가 관건인 거요. 극한 상황에서 자원/장비를 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일깨워주는 대사지요. 비단 전쟁만이 아니라 다양한 생존 환경에 적용되는 대사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