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이족보행병기는 탱크 등 차륜 병기에 비해 비효율적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고, 저 또한 같은 입장입니다만, 이것이 판타지 세계가 되면 약간 달라집니다. 즉, 냉병기 위주가 되면 차량보다 로보트가 더 유리할 수가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로보트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작품의 내적 정합성, 즉 흔히 말하는 '현실감'이라는 면에서 볼 때, 성전사 단바인의 설정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일단 배경 설명을 좀 하자면, '바이스톤 웰'이라는 중세 정도의 기술력과 풍부한 자원을 갖추고 있는 이세계에, 현대의 로보트 공학자 쇼트 웨폰이 우연히 넘어가게 됩니다. 이른바 차원이동물이죠.


그곳에서 전기 등의 현대적 기술을 보여주어 지방 영주의 신임을 얻고 높은 지위에 올라간 소트 웨폰은, 세계를 정복하려는 영주의 야망에 부응하기 위해 대포나 화염방사기 등의 화기를 개발하는 한편으로 자신이 평소 꿈꾸던 것 - 로보트 - 의 개발에 착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물들이 오라력이라는 생체 에너지 (쉽게 말해 마나)로 하늘을 날고 거대 괴수들이 활보하는 세상에서, 그 괴수의 생체를 부품으로 한 거대 로보트 (라고 해 봐야 10미터 미만이지만)을 만들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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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 배틀러 단바인의 신경계와 순환계. 로보트라고 하지만, 생물에 가까운 구조입니다.]


하지만 현대적인 기술력이 없기 때문에, 동력이야 오라력이라는 정체 불명의 힘으로 어떻게 한다 쳐도, 동력 전달과 제어가 문제죠. 쇼트 웨폰은 이걸 모두 생체 부품으로 해결합니다. 괴수의 살아 있는 근육과 신경을 그대로 활용해서, 그 위에 조작/제어계를 덧붙이듯이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괴수의 몸 조직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인간형으로 재배치한 후, 자의식 대신 사람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는 일종의 대형 프랑켄슈타인 괴물을 만들어낸 것이죠. 게다가 오라력을 제트 기류처럼 이용해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까지 갖추게 됩니다. 바이스톤 웰의 비행 생물들은 대부분 '오라 기관'을 통해서 오라력을 추진력으로 전환하는데, 이것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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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바인과 그 재료가 된 강수 키마이 라그의 비교. 특히 머리 부분은 그냥 통째로 가져다 쓴 수준입니다.]


화포조차도 이제 막 개발되어 유도탄 따위는 꿈도 꾸지 못하는 시대에, 7~9미터에 달하는 인간형 거대 로보트는 그야말로 위협적입니다. 화력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해도, 총은 약하고 대포는 잘 맞지가 않지요. 게다가 날아다니기까지 해서 성곽조차 거의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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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차에 장착된 4연장 대포. 이런 것을 로보트의 팔에 달고 갈고리로 방아쇠를 당겨 발사하는 것이, '성전사 단바인'에서의 화기입니다.]


물론 하늘을 나는 로보트라고 해서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우선 개발/제작비가 엄청난데다가, 아무리 괴수의 신경계를 그대로 갖다 쓴다 해도 실전에서 쓸만한 조작계를 만드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기본적으로 팔다리 움직임 + 비행 제어까지 해야 하니, 십여 개의 조종간과 페달을 정신없이 조작해야 겨우 움직일 수 있습니다. 덕분에 화려한 몸놀림은 커녕, 비실비실 날아 오르다가 대포는 고사하고 무려 투석기의 바위에 맞아 터지는 굴욕적인 장면까지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현실적인 제한을 또 한번 뒤엎는 것이, '오라력'이라는 설정입니다. 보통 사람은 조종간에 의한 기계적이고 기초적인 조작 밖에 할 수 없지만, 오라력이 높은 사람, 쉽게 말해 '기가 센' 사람은 자신의 의지를 생체 기계 ( = 오라 머신)에 직접 투영해서 생각만으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물론 조종간을 같이 움직여서 조작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만, 이론적으로는 극단적으로 오라력이 높은 사람이라면 수동 조작 전혀 없이 생각만으로 자기 몸을 움직이듯이 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중세 수준의 기술적 수준에 의지력에 의한 직접 조종, 그리고 기사라는 전 근대적 전사 계급의 자부심까지 겹쳐지게 되면, 칼 든 거대 로보트가 전장의 주역이 되는 것은 충분한 설득력을 가집니다. 다만 이런 세계관에서조차, 전쟁이 격화되면서 점차 사격전/화력전 양상이 되고, 전투의 주역은 점점 인간형을 포기하고 사람이라기보다 비행기에 가까운 형태로 진화하게 됩니다. 로보트 애니메이션의 특성 상 반드시 인간형이어야 할 필요가 있는 주인공 기체마져도 후반에는 비행기 형태로 변신할 수 있는 기체로 바뀌게 되죠.


결국 '성전사 단바인'의 세계관에서조차, 거대 로보트, 즉 오라 배틀러는 급격한 기술 혁신의 와중에 중세 격투전에서 현대 화력전으로 옮겨가기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만 활약하고 사라지는 운명을 가진 무기 체계이지만, 적어도 그 기간 동안에 한해서는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잡아 끄는 매력을 발휘한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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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사회는 이상 인간만이 만들 수 있어. 보통 사람은 보통 사회밖에 못 만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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