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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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원피스>에서의 한 대목이, 제가 생각하는 과학 지식 축적의 의의와 가깝다고 생각해서 약간 옮겨봅니다.
저작권 문제 될 까봐 한페이지만 올렸는데 그래도 문제면 통째로 지우겠습니다. ;
하늘섬 편인데(31권의 한 장면입니다), 여기서 '그렇게도 신이 무섭나'하고 소리치고 있는 남자는 탐험대장이고 얼굴에 무늬를 칠하고 있는 남자는 그 땅에 사는 부족의 전사입니다. 탐험대가 섬에 도착했을 때 만화상 비교적 최근에 치료법이 발견된 역병이 섬에 퍼져서, 그 땅에 사는 부족들은 절멸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떤 수를 써도 병이 기세가 줄지 않았기 때문에 절망한 부족 사람들은 신으로 믿는 뱀에게 인간 제물을 바치고 신의 분노를 풀려고 합니다. 탐험대장은 이 의식의 와중에 난입해서 그 뱀을 죽이고, 자신이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으니 하루만 말미를 달라고 외칩니다. 가까스로 하루 기한을 얻은 대신 치료법을 가져오지 못하면 탐험대 전체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상황에서, 탐험대장은 혼자 밀림 속으로 들어가서 치료 성분이 있는 나무를 찾습니다(만화에서 '코니네'라고 한 것을 보면 키니네를 염두에 둔 설정인 듯 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지진이 일어나서 치료제는 찾았지만 암반에 몸이 깔려서 빠져나갈 수가 없는 상황에 처하고, 탐험대장의 뒤를 쫓아왔던 전사는 신의 심판이라고 그를 비웃습니다. 그러자 탐험대장은 실체가 없는 공포에 떨며 사람의 목숨을 산 제물로 바쳐 일시적 위안을 얻고 있다고 반박하죠. 그 때 그 뱀의 새끼가(새끼인데도 첫 화면에 나온 만큼 큽니다-_-) 나타나자 전사는 신의 자손이 심판을 내리러 왔다고 하지만, 탐험대장은 자신의 나라도 10만여명이 이 병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이제는 치료법이 발견되었으며 자기가 손에 쥐고 있는 나무껍질로 만들 수 있고, 마을 사람들이 저주로 죽는 것인지 병으로 죽는 것인지 선택하라고 소리칩니다. 그 다음 장면이 제가 올린 이 부분. 그 뒤에 전사는 마침내 결심하고 신의 자손인 뱀을 죽인 뒤 깔린 탐험대장을 끌어내서 마을로 데려와 치료약을 만들게 합니다.
과학의 전당에 몸을 바친 과학자들은 매우 많지만, 그 발견과 지식의 축적은 단순히 과학자들에 의한 것 만은 아닐 것입니다. 발로 뛰는 탐험가들이나 임상의들, 발명가들, 수집가들부터 그 발견이 있기까지의 수많은 환자들을 비롯해 일상생활에서 현상들과 부대끼는 보통 사람들까지, 그 모든 사람들이 쌓아올린 경험과 시행착오와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중국 신화에 따르면 신농씨는 투명한 몸을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세상의 먹을 수 있는 모든 식물, 동물, 광물성의 약재들을 먹어보고 자기 몸 안에서 어떤 효과를 나타내는지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의술을 처음으로 인간 세상에 널리 가르친 의술의 신으로 추앙받습니다. 결국에는 완전히 독을 해독하지 못해서 죽게 되지만요. 이 신화는 처음에 어떻게 인류가 지식을 축적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먹고 죽으면 안 먹고, 먹고 나으면 그 다음부터는 아플 때 그걸 먹는 식입니다. 무수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검증을 거치고서야 그런 경험적 지식들이 쌓일 수 있었고, 이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세상을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것이 바로 과학인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저는 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의 무게가 얹어져 있고, 그들이 지식을 얻어낸 과정에서 흘린 피가 점점히 얼룩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이 때로는 지나치게 오만한 모습을 보이거나 헛다리 짚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그 아래에 있는 지식들은 그런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죠. 심지어 잘못된 것으로 반증되고 사라져버린 이론들이 있다고 해도, 그 이론들이 맞닥뜨린 시행착오 역시 결국에는 그 현상을 더 잘 설명하고 있는 이론의 초석이 되었을 것입니다. 진정 탐구하는 사람의 자세는 자신이 다루고 있는 지식들이 어떤 기반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의 힘을 보태는 태도가 아닐까 합니다. 물론 이런 입장은 거대한 것에 자기 미약한 힘을 약간이나마 보태려 하고 있는 사람이 느끼는 굉장히 단순한 입장이고, 과학철학에서는 더 많은 논의들이 이루어지고 있긴 하지만요. 저 수많은 주술사들, 약초꾼들, 접골사들, 무당들, 연금술사들, 마법사들, 마녀의사들, 신비주의자들, 자연철학자들, 그 모든 지식을 탐구하던 이들과 그 지식에 공헌한 이들이 마치 신출내기 샤먼을 지켜보는 선조의 영혼들처럼 뒤에 늘어서 있다는 느낌입니다. 거대한 경관 앞에서 겸허함을 느끼는 것처럼, 그 과정 전체에 새삼스럽게 경의를 표하게 됩니다.
저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보는데요?
현대야 과학을 추구하는 방법의 합리화가 충분히 이루어져 있어 이런 희생을 막을 수 있었지만, 충분한 경험이나 지식이 축적되지 않았을 때는 잘못된 방법이 사람의 희생을 낳았고, 그 희생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혈액형이 알려지지 않았을 때도 동물의 피를 사람에게 수혈하거나, 사람의 피를 다른사람에게 수혈하는 시술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수혈의 결과로 어떤 사람은 살고 어떤 사람은 죽었습니다. 이런 경험이 축적되어 연구를 하게 되고 혈액형이 발견되었습니다.
다른 예로 니트로글리세린이 불안정하여 폭발 사고가 잦아 피해가 많았습니다, 여기서 우연히 니트로글리세린이 규조토에 섞이면 폭발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발견하고 여기서 다이너마이트가 탄생했습니다.
어떤 이론이나 사실이 발견되는 패턴을 하나도 정할 수는 없습니다만, 위험속에서 발견되는 사실도 있었습니다.
카발라/
자전거 타이어의 발명에 관해서도 굉장히 긴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여유 있는 사업가들이 발명하고 보급했다' 한 줄로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죠. 그러나 제가 얘기한 '피'는, 단순히 중산 계급이 상류 취미를 따라 잡기 위해 여가 시간을 활용하는 용도로 자전거 열풍이 불 때 시장 판도를 차지하기 위한 그 무수한 혈투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의 전부가 그것 뿐이라고 단언하신다면 서로 이야기하고 있는 대상이 범주적으로 좀 다릅니다.
고무 타이어라고 하면 처음 고무의 발견부터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제일 처음 고무나무 수액을 사용할 생각을 했던 원주민들은 그 희끄무레한 수액을 어떻게 이용하게 되었을까요? 발을 수액에 담그고 불에 그슬려서 벌레를 막는 용도로 쓰던 발명은 어떻습니까? 그 광경을 보기까지 바다를 건너오면서 죽은 탐험가들은 몇명이나 될까요(그 탐험가들은 진리를 위해서 바다를 건넜을까요)? 산업성이 밝혀질 때까지(우연히 유황과 함께 두면서 비로소 쓸모 있게 되었다고 하지요) 그것을 어떤 용도로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던 노력들은요? 이후 플랜테이션 농업을 위한 압제 아래에서 죽어간 원주민들의 수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 다음에는 합성고무의 역사로 넘어가면 어떻습니까(아마 석유부터 시작되어야겠지요.) 너무 재료에 천착한다 싶으면 처음의 바퀴부터 생각해 봅시다. 바퀴가 없을 때에 사람이 무엇을 이동력으로 썼는지, 피라미드를 지을 때 바퀴 대신에 사용된 굴림대는 어떤지 부터요. 카발라님의 범주로는 빗길에서 과속하다 미끄러져 일어난 사고를 굳이 과학의 지식의 축적에 집어넣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타이어 표면을 깎는 기술도 지식의 축적이긴 하지만 물건을 더 잘 팔려는 시도에 불과하니까요.
모든 과학자들이 엄청나게 진지하고 엄숙한 태도로 과학의 전당에서 자기 몸을 희생해 가면서 진리에 몸을 바친다는 의미로 피를 얘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이윤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나, 학계에서의 명예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굳이 진리에 몸바치는 것에 비해서 수준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거꾸로 진리에 자신을 바치는 경우들이 더 드문 일이죠), 단지 그 시행착오와 무수한 노력들(목적이 무엇이든 간에)을 가리키려고 한 것 뿐입니다.
과학에만 한정짓기에는 너무 광범위한 이야기입니다.
진화의 경우만 봐도 유전자 변이가 환경에 부적합한 무수한 개체의 희생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잖아요? 한번에 샥샥하고 진화하는 경우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1억가지의 가능성이 적자생존의 세계에 뿌려지고 그중 1은 살아남고 99999999는 죽습니다.
말씀하신 말이 틀리다는게 아니라 사실 맞는 말이고 옳은 말인데 너무 광범위한 의미 부여를 '과학'에만 한정시켜서 하시는 것 같습니다.
간단히 생각해 보면 되겠지요. 우리가 쓰고 있는 컴퓨터 하나에 얼마나 많은 발명이 들어가 있는가?
사실 연금술만 해도 완전한 헛수고는 아니었습니다. 중국의 연단술을 통해서 화약이 발명되었고, 페르시아의 연금술을 통해서 무수한 화합물이 탄생합니다. 비록 금이나 영생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이가 희생되었지만, 그들은 우리네 문명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 있습니다.
다만, 경험에 의존하는 것은 큰 위험이 있습니다. 우선, 완전히 헛수고만 하고 끝날 수도 있습니다. 가령, 영구 동력을 만들려는 사람은 헛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혹자는 이야기합니다. '그래도 그 과정에서 효율을 높이는 결과 같은게 나올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효율 높은 시스템을 만든다는 방향성을 갖고 시작하는 것과 영구 동력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갖고 시작하는 것은 그 과정만이 아니라 결과도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20세기의 발명가로 에디슨과 테슬라를 비교할 수 있는데, 에디슨은 노력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엄밀히 말하면 다릅니다만...) 그야말로 무수한 실패를 거듭하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방식입니다. 테슬라는 다릅니다. 테슬라는 이론적인 바탕을 두고 무언가가 가능한지를 생각하고 접근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발명가로서는 테슬라보다 에디슨이 성공했습니다. 테슬라의 연구는 실용화되지 못하고 끝난 것이 많지요. 하지만, 훗날의 과학과 기술 발전에는 테슬라가 좀 더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류 전기의 가능성을 좀 더 실용적으로 이끌어냈다는 사실만으로 인류의 문명사에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테슬라의 연구는 훗날의 학자나 기술자가 참고할 수 있었지만, 에디슨의 발명품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에디슨의 발명품 중 상당 수는 에디슨이 고안한 것이 아니라 실용화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에디슨의 공적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의 방식은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여담) 사실 이러한 이야기에 앞서 과학과 공학의 차이를 이야기하는게 먼저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표도기]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과 공학, 철학과 종교의 관계
에서 이야기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로타에르님께서 말씀하신 핵심은 이른바 '패러다임의 변화'인 듯합니다.
패러다임이란 간단히 말하자면 동시대의 주도적인 인식 체계를 뜻합니다. 그런데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한계는 어디까지나 지식의 범위에 달렸습니다. 과거에는 과학이 발달하지 못한 고로 패러다임을 주름잡는 게 신앙이었습니다. 그런데 르네상스 그리고 그 이후의 산업 혁명을 거치며 과학 기술이 점점 부각되었고, 결국 패러다임을 바꾸는 건 과학 기술이 되었죠. 물론 선입견을 바꾸는 게 쉬운 일만은 아니기에 21세기 현대라고 해도 패러다임이 자주 뒤바뀌진 않습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선두에 과학이 앞장서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죠. 패러다임이 꼭 물리 법칙에 한정된 용어는 아니니까 여기에는 인문 과학이나 사회 과학 등도 해당합니다. 결론적으로 과학적 방법론이 인간의 인식 체계를 바꾼다고 하겠습니다.
로타에르님이 과학 지식을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단순히 과학 지식의 축적 여부를 떠나서 과학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는가를 살피는 안목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어제 심심해서 제가 쓰는 자전거 타이어를 누가 발명했는지 위키백과를 검색해봤는데요… 19세기 말에 생활에 여유있는 사업가들이 발명하고, 특허 출원하고 회사도 설립해서 보급한 것이더군요. 물론 그들은 돈도 벌었겠지요.
전 이 과정에서 위키백과 내용들만 봤을때 말씀하신 ‘피’ 같은걸 찾을수가 없겠더라고요. 즉 어떤 역사적 결과물이 희생과 관련없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언급하는 과학자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이 당시 일반적인 인간 이상의 희생을 했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도 없고요. 오히려 과학계에는 명성을 위해 연구를 경쟁적으로 발표한 경우도 많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