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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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생확학도이면서 종교인이란 사실을 알려드립니다.
그러나 이 글에 종교적인 주장이나 과학적인 현상같은 것은 다룰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종교의 기원에 대한 생각을 적는 것 뿐이니 의견일 뿐입니다.
종교의 기원에 대한 표도기님의 글은 읽은 바가 있고
핵심 내용을 추리자면 종교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인해 생겼고 결국은 종교와 과학은 그 기원과 의도가 같다는 말이었습니다.
다만 그 방식이 믿음이냐?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방식이냐?에 따라 갈린다고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설명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종교의 기원: 과연 눈에 보이는 세상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게 말할 때에 인류의 초기 종교들에 대해서는 설명이 가능하지만
어느정도 이후 생겨난 어느 정도의 체계가 잡혀있는 종교에는 미비한 설명이 좀 있고
요즘들어 과학의 탈을 쓰고 나타난 신생 종교들은
차라리 현재 존재하는 과학지식만 배워도 알수 있을 것을 엉터리로 설명하는 감이 있기 때문이죠.
(이런 신념의 뿌리가 과학이란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그렇다고 이 종교들이 기존 종교에 뿌리를 둔 것은 아니죠.)
이러니 조금은 다르게 볼까 합니다
어느 다큐인지 모르지만 현재의 인간이란 존재의 특성은 어떻게 보면 매장의식으로 나타난다고 하더군요.
원시 인류의 흔적은 석기같은 기술적인 발전을 남깁니다.
그렇게 보면 현생 인류는 기술적인 발달의 연장선에 있을 수 있죠.
하지만 이 다큐에는 그런 말을 하더군요.
뇌의 용적은 비슷해도 특별한 매장의식의 흔적이 없다. 네안데르탈인에게 죽은 자에 대한 관념은 없었다고...
사실 여태까지 모든 생물이 태어났다 죽어왔고 그것에는 의혹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인지 모르나 현생 인류는 그런 추상적인 관념이 생겼다는 것이죠.
(이 의문이 먼저였는지 신이란 존재의 접촉이 먼저였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죽으면 어떻게 될까? 과연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아니면 죽지 않을 수가 있나?
2. 눈에 보이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없었다.
이 의문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면 살아있는 것들은 어떤 짓을 해도 죽는다는 것뿐이나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아무도 알려준 바가 없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의 결론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추리로 이어지게 되죠.
이것은 근거가 없으니 믿음이란 것이 필요하게 됩니다.
(여기서 그 보이지 않는 것을 영계라고 하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꿈이란 것이 종교적으로 중요해지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이성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데
볼 수 없는 세계을 보는 창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무의식 중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지식이 쌓여 갑니다.
때로는 스스로 무의식에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것이 샤먼이란 형태로 나타나죠.)
또한 영계가 이미 어떤 형태로든 이 세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죠.
(예언이란 것이 지금도 이어지는 게 그 때문이 아닐까 하네요.)
그 결과 의문에 대한 답은 죽음이 끝이 아니고 이후의 삶이 있다.
그것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알아야할 필요가 있다. 였습니다.
(현실에서 부, 명예, 권력을 가진 왕들도 죽을 때는 신관을 찾아가야 할 수 밖에 없었죠. 이건 이후의 삶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3. 어느 순간의 와전
그렇게 보면 이 세상의 법칙으로는 영계를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죠.
잘보니 영계의 법칙이 따로 있고 진리라 하겠는데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게 심리적인 공통점인지 진짜 영계의 법칙인지 제가 판단할 건 아닙니다.)
다만 표현할 길이 없어 차용한 것이 이 세상의 사물입니다.
(예로 신화에 나오는 건널 수 없는 강같은 건 실제로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와 또 다른세계의 벽을 의미하는 사물을 이용한 표현일 뿐이죠.
설총의 이두문처럼 한자를 쓰기는 썼는데 음을 차용해서 쓴 것처럼요. 이걸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게 어불성설이죠.)
그러니 종교의 모든 기록들을 보게 되면 허무맹랑한 소리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기록들은 현실적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영계에 대한 기록들이니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이 기록들의 의미를 알아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깨달음이고 신학이었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영계를 다스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보류해둬도 그 영계에 사는 존재를 찾을 필요가 있어지죠.)
religion은 다시 이어지다, 宗敎(종교)는 꼭대기의 가르침, 하늘의 가르침을 말하니 그 영계의 가르침을 말하죠.
신에게 배우든, 돌아가긴 조상에게 배우든, 정령에게 배우든 그건 따질 바가 아닙니다.
만약 종교가 이렇게 생겨난 것이면 이 세상에 대한 것을 설명할 필요도 없고
종교란 학문도 이 세상의 삶을 누리려고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하지만 이것을 따르는 자가 많아지고 권력이 되면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 권력자들은 자기가 사는 세상을 차지하고 싶어하거든요.
인간은 누구나 삶과 죽음에 관심이 있으니 종교를 먹으면 그게 쉽죠.
변질의 시작이 이 때부터입니다.
그동안 선지자들이라던가 예언가들의 기록을 현 세상에 대한 기록으로 돌리면 그게 더 쉽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면 아주 훌륭한 통제수단이 되겠죠.
그건 종교의 목적이 변질되는 순간입니다.
순수히 영계를 탐구하는 선각자가 나오기 전까지 더이상 종교의 발전은 없어집니다.
4. 다른 형태의 종교
다른 노선의 종교에 관해서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 저는 종교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의문으로 생겼다고 했습니다.
1. 죽음 이후의 삶? => 영계에 대한 탐구
그러나 사람들은 어차피 죽음을 두려워 합니다. 생물의 본능이라해도 되겠죠.
그렇다면 한가지 노선이 더 있다는 것이죠. 많은 신생종교가 이런 케이스를 따르기도 합니다.
2. 죽지 않을 수가 있을까? =>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 탐구
이전에 진시황이 이런 노선을 따르기도 했습니다. 불로초가 있다고 믿었죠.
약초에 의해 동양 의학이 발달하면서 생긴 신념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런 비슷한 경우로 종교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이 영원히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다는 말이죠.
이론상 가능성은 있는데 실현은 불가능합니다. 그 부족한 부분을 종교로 때운 것이죠.
결국 과학을 기반으로 과학의 탈을 쓴 종교가 생기는 케이스입니다.
(한 예로 라엘리안같은 경우는 외계인이란 다른 세계의 존재 + 인간복제기술로 영원한 삶을 설명합니다.)
5. 종교가 추구하는 것
영계가 진짜있고 그에 대해 설명한 것이 진실인지는 제가 판단해서 말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이건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죠.
믿으면 영계에 대해 배울 것이고 믿지 않으면 시작도 안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영원히 사는 법을 배우려 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이 역시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루는 영역이 다른 만큼
종교에 대해 과학적 방법으로 접근한다는 것이 사실상 말이 안되고
종교의 역설과 비유가 과학적이란 것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종교는 죽음과 삶에 대한 탐구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영계를 인정하고 그 곳의 삶을 준비하거나
영계가 필요치 않게 이승의 삶을 영위하고 싶거나...
과학으로 신을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듯이
그런게 실제로 있다고 증명할\수 없고, 없다고 해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이죠.
이렇기에 두 영역은 곂치지않고 종교의 시작은 과학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종교에 대해 이야기할 때 흔히, 아니 언제나 빠지는 함정이 바로 서양인이 연구한 기독교의 관점 만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가까운 중국의 경우만 해도 전통적인 종교에서는 사후세계나 영계에 대한 강한 흔적이 없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중국 종교 체계에서 그런 관점이 등장하는 것은 외래 종교의 유입 때문인데, 강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실에 대한 집착이 강합니다. 한국이나 일본도 그런 영향권 안에 있는 거 같고요. 반대로 인도 같은 경우는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강합니다. 우리나라는 사후 세계를 믿는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실재를 믿냐는 질문에 신자들이 반신반의하는 경우가 많죠.
두번째로는, 결국 같은 얘기일텐데 사회진화론이나 과학처럼 모든 종교의 발생과 발전을 하나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겁니다. 즉 종교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는, 어떤 종교, 어느 지역의 이야기인지를 확실하게 정하고 나갈 필요가 있습니다. 즉 종교들의 특성은 거의 탄소 생물과 규소 생물의 차이만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동양의 종교를 말할 때 그래서 다룬 것이 두번째 의문입니다.
죽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사실 도교의 최고 이상은 신선이란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것, 그리고 불교의 최고 이상은 부처란 깨달음을 얻은 존재로 삶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굳이 과학에서 출발하지 않아도 죽음을 피할 방법을 찾는 것이란 이야기죠. 반대로 말하면 그것이 현실에 대한 집착이죠.
사후세계를 인식하고 있다면 오히려 과학에서만 방법을 찾지 않을 겁니다..
2. 영계에 대한 기록은 천기누설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비밀에 부쳐왔고 모순된 표현과 역설의 표현으로 기록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경전들은 그 종교에 속한 종교인들이라도 제대로 해석할 줄 모릅니다.
종교창시자의 저술들은 매우 모호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똑같은 것을 보았어도 지식정도나 감성에 따라 표현의 차이가 큽니다. 그러니 그것을 해석하는데는 천양지차이죠.
그리고 종교인들은 과학자같은 지식의 교류가 없습니다.
본 사람은 같은 것을 보았다고 하더라도 나중에 보지도 않은 인간들이 다르다고 말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느 순간의 종교의 와전은 굉장히 쉽게 일어납니다.
1. 종교를 믿는 목적이 무엇인가?에 따라 말한 것이지 종교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가?로 분류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볼 때 그렇다는 것이죠.
불교를 믿는 목적이라면 명확히 해탈하는 것이고 해탈한 자가 얻는 죽음의 순환을 끊는 것이죠.
마찬가지 도교를 믿을 때의 신선이란 자신의 삶을 바쳐 달성할 목적이 없다면 "아 그렇구나"로 끝나고 믿을 동기가 없습니다.
이런 목적이 없는 종교는 맹목적이고 그냥 많은 사람이 믿으니까 딸려가는 것뿐입니다.
2. 물론 현세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잘 된다고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배우는 목적으로 보면 철학과 과학과 다르지 않죠.
일상에서의 복락은 부가적인 것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종교의 시작으로 말할 수 있는 죽음에 대한 의문은 제쳐두거나 죽음을 인정하고
현세에의 복락추구는 철학과 과학으로도 충분합니다.
영적인 것에 대한 믿음은 기본적인 것일뿐 정작 종교적인 것은 아무것도 해결한 것이 없습니다.
과연 그것을 종교로 볼 수 있는가?의 문제라면 제 의견에는 종교가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3. 종교라는 행동의 기원이면서 목적이랄 수 있는 건 대략 이 두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생과 사에 대한 탐구'가 종교를 만들게한 것이 아니라 사실 종교에서 나왔을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한국 위키에서는 "탐구영역이 다르다."라는 주장은 '분리론'이라고 하더군요.
죽음에 대한 의문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의문이 종교의 기원이 된다는 내용은 매우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역시 인간이 가진 호기심에 기원한다는 점에서 과학과 그 기원을 같이 하는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실 저는 인류 문명 자체가 -우리 주변의 것 만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포함한- 모든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바탕으로 시작되었고, 이를 통해 발전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종교 역시 호기심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발전하면서 세상에 영향을 주었고 도움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기원이 같다고 하여 종교와 과학이 서로 같은 존재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종교는 믿음의 체제이며 과학은 경험과 증명의 체제입니다. 양자는 그 기원은 같을지 몰라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발전하였습니다. 이제는 서로 간에 공통된 부분이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그럼에도 과학과 종교가 부딪치는 것은 일부 종교 관련자들이 과학으로 밝혀야할 세상의 이치에 종교의 믿음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지동설과 천동설의 논쟁이 있었으며, 현재는 진화론과 창조설의 논쟁이 대표적입니다.
종교는 세상의 이치를 밝혀내려는 과정에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옳고 그름, 삶과 죽음을 제외한 영역에서 종교의 역할은 이미 끝났습니다. 태양이 왜 빛을 내는지, 비는 왜 내리는지, 식물을 왜 자라는지. 이러한 자연의 섭리는 본래부터 종교가 맡아야 할 영역이 아니었고, 이러한 것을 과학이 밝혀낸 지금은 더더욱 아닙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종교 자체가 이러한 부분에서 점차 멀어진 것도 사실입니다. 일찌기 종교는 세상의 모습에 호기심을 갖고 시작되었지만, 체제를 갖추면서 도덕과 죽음의 세계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부분에서는 종교와 철학이 부딪치지 않는가 생각해 봅니다. 특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철학만큼 고민을 하는 학문은 없으니까요. 철학은 사색과 사고, 그리고 토론을 통해서 옳고 그름을 밝히고자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변화에 민감하며 매우 다양하게 발전해 나갑니다.
반면, 종교는 그런 점에서 변화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의문을 갖더라도 신의 존재, 그리고 신의 말씀 그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저는 현세의 옳고 그름에 대한 부분은 철학이 맡아야 할 영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를테면 올바른 삶의 자세 같은 것 말이지요.
그렇다면 종교는? 우선은 내세에 대한 궁금증을 맡는 부분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앞서 이야기하셨듯, 종교의 기원 중에는 우리가 죽은 뒤의 세계에 대한 궁금증도 함께 존재했고, 이것은 과학이나 철학으로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종교가 맡고 있는 것은 "기원"이라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좋은 방향은 아니라고 보지만, "절대자"로서의 신이라는 존재를 믿고 따르는 종교는 그 절대자로서의 신에게 의지하고 기원함으로서 사람들을 이끌어 나갑니다. 그것은 과학이나 철학이 제공할 수 없는 강력한 힘입니다.
저는 과학이 "왜"라는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어떻게" 그렇게 되느냐에 대해서 대답한다는 게 적절한 표현이지 않을까요.
비가 왜 내리는가 라는 예시는 표현이 적절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내리는가 하면, 그 질문에 대해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수분이 증발해서 공기 중으로 올라가 뭉쳐서 구름이 되고 이것이 다시 지상으로 내리는 형태가 비라고 설명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건 하나의 과정에 대한 설명일 뿐입니다. 원리이지요. 왜 이런 원리로 비가 내리는 지 과학이나 과학자들은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그렇다고 밖에 설명을 못하지요.
그럼 "왜 비가 내리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종교인이나 철학자입니다. 종교 철학이라는 것도 있기 때문에, 저에게는 이 두 가지가 확실히 구분이 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역할을 과학은 떠맡을 수 없습니다. 과학이 보이지 않는 절대자의 의지나 명령 따위를 이해할 턱이 없지요. 그런 건 아예 처음부터 논외의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과학자들이 이런 질문에 대해서 도전하기 시작했고, 종교 고유의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축소를 요구했다는 점입니다.
어쨌든 인간의 지식이나 학문은 아직도 유한합니다. 인간의 생각이 저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세계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논리적으로 "신은 없다"고 하기도 하고, "있다"고 하기도 하죠. 그 너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과학도 필요하고 종교도 필요합니다. 물론 철학도 필요합니다. 작금의 과학은 겸손함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종교도 인류 역사의 태동기부터 시작되었던 오랜 경륜과 지혜와 경험을 나눠줄 필요가 있습니다. 다투고 대립하는 것보다는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는 게 보다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라는 말도 맞습니다. 어떻게 해서 비가 내리는지에 대해 그 현상을 밝혀내는 것이 과학의 특성이겠지요.
다만 '왜 비가 내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에 대해서 과학은 "바다에서 물을 많이 머금은 따뜻한 대기가 위로 올라가서 비구름을 형성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할 수 있으니, '왜'라는 것의 일부는 과학이 맡아야 할 역할이겠지요.
어떻게...라는 것은 현상을 말하고, 왜라는 것은 원인을 말합니다. 과학은 결과라는 현상을 바라보고 원인을 밝히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세상에는 직접적인 원인으로서의 '왜'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를테면, 왜 비가 내리는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라거나 "세상을 적시기 위해서"라고 대답해야 할 경우가 있으며, 그것은 바로 종교와 철학이 해야 할 역할이 될 것입니다.
과학이 과학의 범주를 벗어나고 과학의 방법을 따르지 않을때 그 것은 사이비 과학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종교나 철학이 그들의 범주를 벗어나고 그들의 방법을 따르지 않을때 사이비 종교나 사이비 철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는 그것을 '사기'라고 부를 수 있겠지요.
과학과 종교, 또는 철학이라는 것이 충돌하는 것은 각자가 제 역할을 하지 않고 다른 범주의 방법을 따르면서, 다른 분야가 해야 할 일을 침범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과학이 아니라 일부 종교인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과학은 현 시점에서도 충분히 겸손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스스로의 잘못을 고쳐나가는 힘이 있으며, 그 자신에 대해서도 항상 회고주의적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잘못된 부분은 종교인이나 철학자가 아니라 과학자들이 지적하고 고쳐나갑니다.
반면 일부 종교인들은 종교가 모든 것에 우선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종교만을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려 합니다. 그들은 과학의 이야기에 귀를 열지 않으며 항상 같은 이야기만을 반복합니다. 리처드 도킨스를 흔히 "다윈의 로트바일러"라고 부릅니다. 그만큼 '전투적인 무신론자이자 진화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와 일부 종교인의 대화를 보면 그가 '전투적'이라는 기분은 별로 들지 않습니다. 그 일부 종교인들의 독선적이고 아집적인 태도가 너무도 끔찍해서 말이지요.
그들은 신의 말을 100% 믿지 않는다면 종교의 존재 가치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들이 진화론이 아니라 창조설을 계속 고집하는 것은 그들이 "창조설"이야말로 신이 말한 진리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근거를 위해서 그들은 온갖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것이 진실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종교 자체가 문제가 아닐지는 몰라도, 이러한 일부 종교 신도들의 모습에서 '겸손'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배려'조차 느낄 수 없습니다. 그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여러분은 시대정신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셨는지요?
저는 다 본것은 아니고 지나가다가 채널을 돌리며 잠시 본적이 있습니다만,
모든 종교의 겹치는 설화나 신화의 특성, 내용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종교에 관심이 없던 저로서도 굉장히 쉽게 납득할만큼 논리적으로 종교의 기원에 대해 파헤치고 있었습니다.
모든 종교의 기원은 "태양숭배"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시의 인류에게는 태양이 굉장히 중요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이유는 설명안해도 아시겠지만..)
예수의 생일만이 12월 25일인 것이 아니라는 것도, 3일의 부활이 어쩌니, 십자가니,
노아의 방주니 등 이 모든 신화들이 극히 천체물리학적으로 설계된 태양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확실한 건 종교의 가장 강력한 기원 중 하나는 태양이며, 그 결과는 현대까지도 가장 강력한
모든 종파들로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의 원시 종교가 존재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일단 가장 강력한
종교 탄생의 동기인 것은 확실합니다.
예를 들면 12월 25일은 1년 중 태양이 뜨는 시간이 짧아지다가 다시 길어지는 전환점이라고 하더군요.
크리슈나? 부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이슬람? 동양? .. 뭐 전 지구적으로 모든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성인 또는 신들에 관한 요소는 결국 놀라울 정도로 정밀한 점성술과 천문학의
발달에 근거한 태양을 지칭하는 상징들이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 시대에 그렇게 태양과 천체의 운동에 대해 정밀하게 계산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만 대부분의 인간들에겐 여전히 그러한 것을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단순히
신격화하여 상징적으로 설명해주는 것이 편리했을지도 모릅니다.
뭐 아무튼 태양이 얼마나 뜨는가, 계절이 어떤가는 모든 지구상의 원시 민족들에게 생명이 걸린
일이었으니 종교가 되어도 아무런 이상한 점이 없는 것이겠죠.
저 역시 시대정신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그것과 다릅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했을 때 달을 주축으로 하는 음력을 따르는 편이었고 태양이란 코드가 일반적이라도 전부를 묶기는 힘들었습니다.
다신교의 신은 흔히 강, 바다, 땅, 태양과 달... 등의 다양한 코드가 존재합니다. 태양만이 아니죠.
이 자체가 본질이라 한다면 종교가 추구하는 죽음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겁니다.
태양 자체는 숭배의 본질이 아니란 것이죠.
반면 그 신화나 선지자의 기록들이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이런 코드로 나타낸 것이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예로 신들은 인간의 세계와 다른 세계에 있는 것으로 인류의 시작부터 인식하고 있습니다.
매장의식이란 눈에 보이는 것을 좇아 나타난 게 아니고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를 염두해 만든 겁니다.
그런데 하늘나라란 말이 과연 인류가 보고 관측할 수 있는 하늘을 보고 숭배하는 말일까?
그보다는 하늘나라란 코드로 그 다른 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것이 더 타당합니다.
글쎄요...아무래도 태양이 쇠하는 겨울이 죽음의 계절로 인식되다보니...태양숭배가 사후세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만 보기에는 힘들겠죠. 위에서 말씀하셨듯이 크리스마스만 해도 그렇지요;;;
사후세계를 고등 종교에 먼저 대입하여 다룬다는 것은 선후관계가 조금 뒤틀린 것 같습니다.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먹고 살만해질 때 비로소 죽음을 생각하지...죽음을 삶보다 먼저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그런 면에서 태양이 가진 권력과 힘은 무소불위라고 할 수 있겠죠. 초기 농경시대의 종교가 정립될 시기엔...말이죠.
그리고...태음력 자체는 천체숭배와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단지 달의 주기적 변화가 태양의 주기를 관찰하는 것보다 쉬웠고 눈에 띄었기 때문이죠. 참고로 태양숭배인 미트라교 신봉지역에서도 음력을 썼습니다.
사람이 죽음에서 생환했을 때 본다는 강이나 빛 등을 영계의 모습으로 볼 것인지, 단순한 뇌의 혼란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이 '탐구'의 방향은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저는 후자로 보고 있고, 이는 즉 영계의 부정입니다. 사실 탐구라는 단어를 영계에 붙이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긴 합니다. 관측도, 증명도, 반증도 불가능한 영역이거든요.
하지만 '부정할 수 없으므로 있다고 결론짓는' 행위는 과학이 아닙니다. 그리고 종교는 이걸 근간으로 하고 있기에 과학과 동격이 될 수 없죠. 과학은 영계나 신에 대해 '알 수 없다'로 끝납니다. 적어도 현재까지는 그렇습니다. 종교 측에서 종교와 과학의 불가침을 말하는 사람들의 착각 중 하나는 종교와 과학이 동등한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연역적으로 추론한 가설을 귀납적으로 관측해 증명하는 과학과, 증명 불가능한 명제를 전제로 둔 종교는 그 위상이 다릅니다.
진정한 종교와 과학의 불가침은 종교가 신의 존재를 긍정하지 않아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죠. 사실 저는 자연신이나 범신론에 가까운 걸 믿는 편입니다. '상수'와 '확률'이 바로 신인거죠. 하지만 인격신은 부정합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것이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의 '인격'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물론 종교의 사상 중에는 도덕적으로 훌륭한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굳이 종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말할 수 있는 것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