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rvalley.jpg

[홈즈가 표지를 장식한 장편 중 하나인 <공포의 계곡>. 그런데 정작 홈즈는 얼마나 나올까요?]


셜록 홈즈 시리즈는 4개의 장편과 56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단편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그만큼 홈즈라는 캐릭터를 드러내기 편해서 그럴 겁니다. 홈즈는 짧은 시간 동안 반짝이는 추리 쇼로 독자에게 강한 인상을 주는 인물입니다. 끈질긴 인내심도 있고 지구력도 충만합니다만, 아무래도 홈즈가 가장 빛날 때는 즉석에서 번뜩이는 추리 결과를 내놓을 때죠. 그래서 그럴까요. 사실 4개의 장편이 있다고 했지만, 막상 읽어보면 이 책들도 그리 장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분량 자체는 장편소설이 맞지만, 핵심이 되어야 할 홈즈의 비중을 따져보면 단편 혹은 중편에 더 가깝다는 뜻입니다. 사건의 규모가 커지거나 범죄 관계자의 설정이 더 늘어났을 뿐, 결국 홈즈가 하는 일은 단편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죠. 4개 장편을 각각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주홍색 연구

코난 도일이 제일 처음에 쓴 홈즈 소설입니다. 지금이야 단편으로 더 유명한 탐정이지만, 그 출발은 장편이었던 거죠.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존 왓슨 박사의 회상이 1부이고 범죄 관계자인 스탠거슨의 회상이 2부입니다. 그리고 홈즈는 주로 1부에서만 등장하고, 2부에서는 마지막에 사건을 설명하러 잠깐 나올 뿐입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1부는 홈즈와 왓슨이 처음 만나는 시기라서 홈즈가 어떤 인간인지를 설명하는 데 많은 장을 할애하죠.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거기로 달려가 수사하는 내용은 장편치고 그리 풍부하지는 않습니다. 범인이 이미 1부에 잡히니 말 다했죠. 그리고 2부는 홈즈와는 전혀 관계없는 머나먼 미국 과거사로 흘러갑니다. 아마 그간 셜록 홈즈의 명성을 들어왔던 독자라면 이 부분에서 좀 어리둥절할 수도 있습니다. 모르몬교의 과거사 이야기는 익히 기대했던 홈즈의 추리 쇼와는 거리가 몇 억 광년만큼 멀거든요.

 

물론 스탠거슨의 회상은 어떻게 해서 사건이 그렇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하는 데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사실 2부는 그 내용은 압축해도 상관이 없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독자는 범인의 동기나 범행과정을 탐정의 입으로 듣고 싶어하지 다른 사람 입으로 듣는 걸 원치 않거든요. 게다가 그렇게 하면 탐정의 역할이 줄어들기도 하고요. 스탠거슨의 이야기는 페이지 두세 장으로 줄여도 하등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러나 코난 도일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정작 수사하는 시간보다 앉아서 이야기 듣는 시간이 더 긴 셈입니다. 그래서 독자는 이게 추리소설인지 미국 역사소설인지 헛갈릴 지경입니다. 만약 이걸 영화로 만들었다면, 홈즈 역에 비싼 배우를 고용해놓고 상영시간의 절반만 나오는 사태가 벌어졌겠죠. 뭐, 첫 소설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런 사태는 또 벌어집니다.

 

- 네 사람의 서명

4개 장편 중에서 그나마 장편에 맞는 호흡을 보여줍니다. 처음부터 홈즈가 등장하고, 이후 꾸준히 범인을 수색하는 과정을 그립니다. 이번에도 범죄 관계자가 구구절절 떠들기는 하는데, 다행히도 한 장을 할애하는 데 그치죠. 왓슨이 아직도 홈즈를 이해 못해서 능력을 파악하는 내용이 초반에 나옵니다만, 이거야 시리즈 대대로 이어지는 특징이니까 별 상관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보다 이 작품의 특징은 홈즈보다 왓슨과 마리 모스턴의 관계가 더 부각된다는 겁니다. 홈즈는 여느 때처럼 재치 있는 수사를 하지만, 화자가 왓슨인 고로 본인 이야기에 더 치중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왓슨과 마리의 로맨스가 살인사건만큼이나 비중이 크죠. 작중에서 범인을 잡은 것보다 왓슨이 마리와 결혼하는 게 더 극적으로 묘사될 정도니까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왓슨이니 생판 남이 죽는 것보다 아내 자랑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홈즈가 완전한 주연인가 하는 부분이 좀 애매합니다.

 

그래도 <네 사람의 서명>은 홈즈가 처음부터 끝까지 골고루 나오는 유일한 장편이기도 합니다. 다른 소설도 이런 식으로 갔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게도 그렇지 않네요. 장편에서 왓슨과 주변인물이 홈즈보다 더 두드러지는 성향은 계속 이어집니다.

 

- 바스커빌 가문의 사냥개

장편 중에서도, 단편을 합친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서도 그 명성이 높은 장편소설입니다. 한창 단편이 연재 중이던 시기(정확히는 홈즈가 폭포에서 떨어져 죽은 시기)에 썼기 때문에 코난 도일의 글 솜씨가 물이 오른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주홍색 연구>처럼 1부와 2부를 나누어 2부를 역사소설로 편집하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홈즈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나오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소설의 배경은 안개 낀 런던 대도심이 아니라 데번의 드넓은 황야인데, 사건의 중심인물인 바스커빌의 영지가 이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홈즈가 시간이 바빠서 도저히 런던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 그런 고로 사건 해결을 위해 데번에 파견되는 인물은 괴팍한 명탐정이 아니라 충실한 전기작가인 왓슨입니다. 당연히 런던이 무대인 초반부를 제외하고, 소설 대부분은 홈즈가 아니라 왓슨의 모험을 다루게 됩니다. 왓슨이 홈즈에게 보고하는 식으로 편지를 쓰죠.

 

명색이 주인공인지라 홈즈가 그 이후 아예 안 나오는 건 아닙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사건을 해결하러 데번으로 오긴 해요. 하지만 정작 단서를 모으고, 용의자를 수색하고, 트릭을 간파하는 소설 중반부에는 탐정이 코빼기도 안 비치게 됩니다. 내용 전개상 홈즈가 등장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나누어도 될 정도입니다. 물론 이런 전개방식 때문에 <바스커빌 가문의 사냥개>가 커다란 반전을 이끌어낸 것도 사실입니다. 중반 이후에 홈즈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소설 분위기가 그렇게 긴박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홈즈가 상당 부분 나오지 않는 것 자체는 사실이고, 완전한 홈즈의 모험을 기대하는 독자라면 실망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스커빌 가문의 사냥개>를 영화화한 일부 작품은 그래서 홈즈를 (변장을 시켜서) 중반에 등장시키기도 합니다. 탐정을 연기하라고 피터 쿠싱 같은 배우를 고용했는데, 중간에 안 나오면 안 되잖아요.

 

- 공포의 계곡

마지막 장편인 <공포의 계곡>은 여러 모로 <주홍색 연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우선 구성이 똑같습니다. 책이 1부와 2부로 나뉩니다. 1부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홈즈가 나와서 왓슨을 놀래주고 살인사건을 조사하러 떠납니다. 그리고 중요한 추리는 1부에 다 나오고, 심지어 범인도 잡힙니다. 그러면 2부는 뭘 할까요? <주홍색 연구>와 마찬가지로 범죄 관계자 중 한 명이 나와 옛일을 증언합니다. 저 먼 미국땅에서 무슨 일이 생겼길래 영국의 한 지방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는지 시시콜콜 설명하는 거죠.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2부에서는 홈즈가 나오지 않습니다. 보충설명을 하려고 막판에 잠시 나오는 게 전부죠. 이 소설은 홈즈의 저 유명한 암호 분석과 모리어티 교수가 등장하는 장편임에도 2부는 사실상 홈즈와 크게 상관이 없는 부분입니다. 1부에서 모든 걸 해먹죠.

 

그나마 다행이라면 <공포의 계곡>은 범죄소설의 분위기를 잃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홍색 연구>은 추리소설에서 난데없이 역사소설로 넘어가 좀 황당하기도 합니다. 반면, <공포의 계곡> 2부는 비록 홈즈가 나오지 않아도 범죄자와 탐정의 대결이라는 구도만큼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당연히 책 전부가 홈즈의 활약일 거라고 기대했던 독자라면 기대가 산산이 부서지겠죠. <공포의 계곡> 2부를 읽다 보면, 확실히 코난 도일은 추리소설보다 역사소설에 관심이 많다는 게 느껴집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코난 도일은 홈즈에게 별 애정이 없었고, 그래서 도일의 냉담함에 놀란 영국인도 많다고 하죠. 도일 본인도 자신을 역사소설가라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추리소설에 미국의 과거사를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덕분에 이 작품에서 가장 극적인 인물은 홈즈가 아니라 더글라스입니다.

 

 

, 이렇게 해서 4개 장편을 각각 살펴봤습니다. 4개 중 <주홍색 연구>, <바스커빌 가문의 사냥개>, <공포의 계곡>에서는 상당 부분 홈즈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네 사람의 서명>에서는 홈즈가 나오긴 하는데, 왓슨과 마리의 로맨스가 더 두드러지고요. 결국 4개 장편 중에서 홈즈가 제대로 주연을 맡는 장편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코난 도일에게 글 솜씨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닐 겁니다. 그보다는 홈즈라는 캐릭터가 워낙 단편에서 요긴하게 쓰이는지라 소설 구성을 그런 식으로 꾸몄겠죠. 한마디로 장편이 아니라 단편의 연장선에 있는 소설이라 하겠습니다. 어쩌면 그게 셜록 홈즈란 캐릭터의 한계일지도 모르죠.

 

요즘 국내에선 <셜록> DVD가 한창 인기를 끄는 중입니다. 드라마를 본 사람들은 이게 다른 것들처럼 에피소드가 많지 않아 아쉽다고도 하는군요. 하지만 원작 자체가 장편이 없었으니 호흡이 길게 가는 시즌 드라마를 만들기는 어려웠을 것도 같습니다. 저는 BBC가 한 시즌을 달랑 에피소드 3개로만 만드는 이유가 여기 있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