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 과학 포럼
SF 작품의 가능성은 어떻게 펼쳐질 수 있을까요? 그리고 어떤 상상의 이야기가 가능할까요?
SF에 대한 가벼운 흥미거리에서부터 새로운 창작을 위한 아이디어에 이르기까지...
여기는 과학 소식이나 정보를 소개하고, SF 속의 아이디어나 이론에 대한 의견을 나누며, 상상의 꿈을 키워나가는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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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에이지 과학과 관련하여 이러한 의견이 있습니다.
"뉴에이지 과학이 잘못되었다고 해도, 과학이라는 것은 항상 열린 사고를 갖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앞으로도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맞습니다. 과학은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과학적인 진실은 모든 경우에서 항상 참이라곤 볼 수 없으며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뉴에이지 과학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과 결합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은 모든 가능성에 대해 열려 있어야 하지만, 동시에 모든 가설에 대해 비판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과학적인 이론은 직접 증명해야만 한다."라는 점에서 뉴에이지 과학은 과학이 아닙니다. 실제로 이제껏 어떤 뉴에이지 과학도 직접 사실을 증명해 보이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초능력이나 심령술 등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뉴에이지 과학을 주장하는 이들도 그것을 직접 사실이라고 증명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이래서 이렇다. 이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알아서 확인해봐."라고 합니다. 우스운 일이지요. 처음부터 제대로 된 무언가를 제시하지도 않고,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도 않고서 "거짓이라고 증명할 수 없으면 진리"라고 말하니까요.
뉴에이지 과학의 이론이 과학 분야에서 천대받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과학 이론으로써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과학 이론의 등장은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1. 가설을 세운다.
2. 실험 등을 통해서 가설이 맞는지를 확인한다.
3. 논문 등으로 정리하여 발표한다.
4. 발표된 내용을 다른 사람들이 검증해서 사실인지 확인한다.
5. 과학 이론으로 일단 받아들여진다.
(이후 4~5 과정이 계속(거의 영원히) 반복된다.)
과학이라는 것은 세상의 이치를 밝혀내는 학문입니다.
가령,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 그것이 왜 내리는지를 생각하고 밝혀내는 것입니다.
비를 보고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웁니다.
가령, 어떤 사람은 “비의 신이 물을 퍼붓는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어떤 사람은 “비의 정령이 있어서 나이가 들어 죽으면 비로 변해서 떨어진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비구름이 물로 되어 있어서 그 물이 무거워 떨어진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 ‘가설’입니다. 가설은 어디까지나 ‘이렇지 않을까?’라는 생각입니다. 가설을 세우는 것은 꼭 과학에서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례로 종교에서도 세상의 이치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웁니다.
[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천지창조. 이러한 가설은 세상의 모든 분야에 존재한다. ]
하지만, 가설 자체는 과학적인 이론이 아니며, 하물며 사실이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이렇지 않을까?”라는 추측일 뿐이니까요.
이것을 어떻게 하는가... 여기서 과학과 철학, 종교, 그리고 뉴에이지 과학이 나뉘게 됩니다.
우선 종교는 가설을 그대로 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은 신이 만들었다.”, “착한 일을 하면 극락에 간다.” 같은 것은 모두 종교에서 진리라고 말하는 가설입니다.
철학에서는 이러한 가설을 다양한 사고와 기존의 문헌, 그리고 관찰 결과 등을 통해서 보충합니다.
한편, 과학은 여러가지 방법을 통해서 이 가설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합니다. 단순히 사고나 관찰 결과만이 아니라 누구나 납득할만한 측정 결과, 즉 명확한 증거를 바탕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비의 신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비의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그 증거를 찾을 것이며, 비의 정령이 시체가 되어 떨어지는 것이라면 비의 정령의 시체 흔적이 있는지 찾아볼 것이고, 구름이 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그게 맞는지 찾아볼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설이 맞는다고 생각되면, 그것을 정리해서 남들에게 말합니다.
이후 남들은 이 사람이 혹시 실수한 것은 아닌지. 아니면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닌지 검증하는 작업을 진행합니다. 과학 학술지에 소개되는 논문은 우선 그 학술지에서 검증 위원 등을 두어 1차 적으로 거르게 마련이며, 대중에 공개되면 이제 그와 관련된 연구를 하는 학자들이 다시 검증 작업을 진행합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네이처나 사이언스 등의 학술지에 소개된 것만으로 진실이라고 소개하기도 하는데, 1차 검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가령,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황우석 박사의 논문처럼처럼 1차적으로는 통과되어 학술지에 수록되었지만, 결국 다른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서 잘못된 실험이고 잘못된 가설이라는 것이 입증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 황우석 교수의 글이 소개된 사이언스지. 이처럼 전문 학술지에 소개되면 어느 정도 검증된게 사실이지만, 항상 진실이라는 법은 없다. ]
과학적인 입증은 당대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옳다고 여겨진 내용이 후대에 가서 잘못되었다고 드러나기도 합니다.
실례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구중심설(속칭 천동설)이 오랜 기간 유지된 것은 당시 사람들이 관찰할 수 있었던 우주의 모습이 지구 중심설을 통해서 설명하는 모습과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망원경 등이 등장하고 우주를 좀 더 정확하게 보게 되면서 지구 중심설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지구 중심설이 물러나고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 케플러의 가설이 과학적인 이론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과거에는 모든 사람이 생물은 자연에서 생겨난다고 여겼습니다. 이를테면, 밀폐된 곳에서도 세균이 번식하고 음식이 썩었으니까요. 하지만, 파스퇴르가 진행했던 적절한 실험 방법을 통해서 세균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자연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들어간 것이라는 점이 밝혀집니다. 그리하여 세균학의 연구가 다채롭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 파스퇴르가 실험에 사용한 백조의 목. 이를 통해 파스퇴르는 자연발생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했다. ]
오랜 기간 과학적인 진실이라고 인정되었던 것이 잘못되었다고 드러나는 사례는 그 밖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것은 과학적인 진실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항상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뉴에이지 과학은 바로 이러한 점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이러한 사례를 볼 때, 지금의 과학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확신은 없지 않은가?”
그러나 이들의 주장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바로 과학적인 이론은 어디까지나 가설을 ‘스스로’ 증명하고, 다른 연구자들의 비판을 거쳐서야 받아들여진다는 점입니다.
“비행접시가 반중력을 만들어낸다.”라거나 “피라미드가 신비한 에너지를 이끌어낸다.” 같은 뉴에이지 과학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가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가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비행접시는 초 전자의 힘으로 떠 있는 거야.” 같은 말은 아무나 할 수 있습니다.
뉴에이지 과학에서는 이러한 가설에 덧칠합니다. 가령 비행접시의 사진을 여러 개 늘어놓고, “이걸 봐라. 이처럼 접시 모양을 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들이 떠 있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반중력밖에는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가설의 확인’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가설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을 뿐이지요.
“비행접시가 반중력을 만든다.”라는 가설을 검증하고 확인하려면, 실제로 비행접시 모양을 만들고 이를 회전시키면서 반중력이 발생하는지를 확인하면 됩니다. 그래서 실제로 중량이 줄어들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하지만, 뉴에이지 과학 연구자들은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거나, 잘못 거치면서 “이래서 내 말은 맞아.”라고 말합니다.
과학적인 가설의 검증 및 확인 방법에는 ‘비판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내 말이 틀릴 수도 있다.”라는 자세를 갖고서 접근하지 않으면 자칫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역사상 수많은 학자가 이런 실수로 실패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가령, 비행접시 모양을 만들어서 회전시켰을 때 무게가 줄어들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기서 과학자라면 이것이 정말로 반중력 때문인지 아니면 우연히 바람이 불었거나 저울이 고장난 것은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람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려면 진공 상태에서 작동시켜 보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울이 고장 났는지는 그 저울로 다른 것을 측정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겠지요. 이처럼 자신의 가설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로 다양한 실험을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라 무수히 반복하고 난 이후에야 비로써 자신의 가설이 맞았다고 생각하고 대중에 발표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뉴에이지 과학 연구자들은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가설이 사실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그들은 자신의 가설에 전혀 비판적이지 않으며, 그래서 조금이라도 좋은 결과가 나오면(가령 10,000번 중에서 1번 무게가 줄어들었다면) 그것이 증명되었다고 여기며 발표합니다.
당연히 그들의 발표 내용은 정말로 형편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비판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이라면 그 오류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의 글이 사이언스나 네이처처럼 저명한 과학 학술지에 게재되지 않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들 학술지에서는 매우 뛰어난 학자들이 1차 검증 작업에 참여하는데, 뉴에이지 과학 이론은 어지간한 과학계 대학생만 되어도 그 문제를 알아낼 만큼 엉성하니까요.
그보다 격이 떨어지는 학술지에서도 그들의 글은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글은 대개 비슷한 이들이 모인 수준 낮은 자칭 학술지나 과학과는 전혀 무관한 시사 잡지 같은데 실리는 것입니다.
자칭 학술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검증하는 사람들이 없거나 수준이 떨어지는 만큼, 그들은 제대로 된 검증 없이 논문을 싣게 마련이며 당연히 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자칭 학술지가 무수히 많고 거기에 실리는 논문도 무진장 많아서 이들에 대해 과학계의 검증이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저명한 학술지에 수록된 논문을 살피고 검증하는 것만도 바쁜데, 언제 자칭 학술지를 보고 논문을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저명한 문학 평론가가 대여점에 쏟아져 나오는 양산형 판타지 작품을 아예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까지 보기에는 워낙 시간이 부족하고, 게다가 거기에서 뭔가 좋은 것을 찾는 게 거의 불가능하니까요. (우리나라 판타지 시장은 ‘독자 수가 10만이지만, 작가도 10만이다.’라고 할 만큼 작품이 많습니다. 출판 경쟁률이 100단위를 넘어간다고 하는데, 그만큼 작품이 있는 만큼 출판사에서도 좋은 작품을 고르기 어려울 것입니다.)
물론, 양산형 판타지 속에서도 좋은 작품이 있듯이, 자칭 학술지에 소개된 논문 중에서도 뭔가 괜찮은 게 있을지도 모릅니다. 뉴에이지 과학을 옹호하는 이들은 대개는 이렇게 말하곤 하지요.
하지만, 이것은 굉장히 잘못된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과학은 문학과 다릅니다. 문학은 취향을 가리며 어떤 이에게는 좋은 작품이 다른 이에게는 나쁜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작품이 수많은 작품에 묻혀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대여점처럼 싼값에 가볍게 빌려보는 시장, 무수한 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에서는 좋은 작품이 빛을 보지 못하고 쓸려나가기 쉽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취향을 가리지 않습니다. 내가 지동설을 싫어한다고 해서 천동설이 진실이 되지는 않습니다.
과학계에서는 정말로 타당한 무언가가 있다면, 언젠가는 세상의 인정을 받게 마련입니다. 세상에는 자칭 학술지에도 관심을 두는 과학자가 있으며, 조금이라도 세상에 알려져서 유명해진다면, 자연스레 누군가 검증 작업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권위 있는 학술지에 다시 소개되고 인정을 받게 됩니다. 물론 이 과정이 빨리 진행되기는 어렵습니다. 세상이 커지고 네트워크가 발전하면서 정말로 무수한 내용이 오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정말로 타당한 내용이라면 언젠가는 세상의 인정을 받습니다. 하지만, 뉴에이지 과학은 그렇지 못합니다. 앞서도 말했듯, 그들의 연구 내용은 너무도 형편없어서 석사 논문 수준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뉴에이지 과학의 이론을 검증하는데 뛰어난 석학이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논문을 조금이라도 읽어본 이들이라면, 아니, 책을 많이 읽고 논술 고사를 따로 공부할 필요가 없을 만큼의 논리력을 지닌 이들이라면 그들의 주장이 단지 가설을 늘어놓기만 했을 뿐, 검증 과정이 하나도 없거나 잘못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한 페이지만 펼쳐봐도 쓰레기라는 것을 알 수 있는 5류 양산형 판타지입니다.
문학이라면 설사 앞에 부분이 최악이라도 뒤에서 뭔가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대개는 반대의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과학 이론이나 논문은 아닙니다. 거의 모든 논문은 가설을 세우고 검증 방법을 제시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방법으로 나온 결과를 제시하고 ‘이래서 내 가설이 맞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뉴에이지 과학의 이론이나 논문은...
과학이 모든 의견에 열린 자세를 가져야 하고, 한편으로 기존에 옳다고 생각한 이론조차 비판적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것은 맞습니다. 실제로 과학은 그렇게 발전해 왔습니다.
하지만, 뉴에이지 과학은 그런 범주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가설을 세운 사람 스스로 그 가설을 입증하고 남들을 설득해야 하는데, 뉴에이지 과학은 그런 과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과학은 틀리다.”라고 말은 하지만, 그들의 과학이 어떻게 맞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과학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을까요?
과거를 아는 이는 현재를 이끌어가고 미래를 알 수 있다고 합니다.
역사와 SF...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듯 하지만, 그럼 점에서 둘은 관련된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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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가설은 가설일 뿐, 이론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과학의 일부분이 아니라는 주장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표도기 님의 글 속에서 나온, 하나의 이론이 완전히 정립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항상 가설 수립 단계를 거칩니다.
창조 가설은 과학 이론으로서는 부적합합니다. 말씀하신대로 검증과 재현 단계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예 그 조그마한 가능성까지 밀어내고, 창조 가설은 과학이 아니라고 하는 건 지나치지 않을까요?
초끈 이론(검증이 안됐다고 하는 데, 이론이라는 말을 어떻게 붙을 수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은 과학계에서
석학들이 논의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아직 정설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최소한 진지하게 '과학의 일부분'으로
소개되고 있죠. 저는 창조 가설도 그런 대접만큼은 받을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주로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작금의 창조론 논쟁은 주로 개신교 쪽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고, 천주교 쪽으로 가면 진화론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줄로 압니다. 여튼 제 말의 요지는 앞으로 '창조'라는 단어만 나오면 알러지 반응을 일으키는 현상만큼은 없었으면 하는 겁니다. 과학의 한계가 명확한 점은 그 학문 스스로가 입증하고 있습니다. 확률적으로 제로가 아닌 이상은, 가능성은 항상 열어두고 생각해 봄이 바람직한 자세이겠지요. 기존의 이론을 뒤엎고 앞으로 나아가며 발전하는 게 과학이라는 학문이 가지는 정체성이라면요.
그리고 창조론은 애시당초 '론'으로 인정된 바 없으니, '창조설자'라고 불러야겠군요.
가설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기꾼도 있지만, 실험이랍시고 어설픈 조작을 해서 근거를 제시하는 양반들도 있죠.
저렇게 실험을 조작하는 사람들이 진짜 문제인 것 같습니다. 단순히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어느 정도 지식이 있지 않으면 속임수를 파헤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물에게도 감정이 있고, 부정적인 단어에 반응을 한다' 같은 주장은 지식이 좀 부족한 사람에겐 혹하는 주장입니다. 여기다 현미경으로 결정 사진까지 찍어서 보여주면 금상첨화. 사실 피라미드니 비행접시니 하는 것들은 규모가 너무 거창해서 믿기 힘들지만, 감정이 있는 물 같은 건 규모도 그리 크지 않잖아요. 그러니 조작을 하기도 더 쉬울 테고요.
여담) 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기존에 소개했던 글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과 공학, 종교와 철학의 관계" ( http://www.joysf.com/4121937 )를 보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