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에 의하면, 인류가 마족에게 지배당해 고통스럽게 살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압제와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던 어느날, 신의 계시가 예언자들을 통해 전달된다.

 

곧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인데, 그 아기는 나중에 커서 마족의 지배를 끝장내고 인류를 구원할 영웅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이 방방곡곡에 퍼지면서 이미 임신했거나 출산한지 얼마 안 된 부모들은,

 

아직 마족에게 희생당하지 않은 사제들을 비밀리에 방문하여

 

자기 자식이 예언된 바로 그 영웅인지를 확인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처음에 사제들은 이러한 요구에 난색을 표했으나, 곧 인류의 미래가 달린 문제라는데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고

 

과연 어느 아기가 계시에 부합하는 자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밤낮으로 신을 향하여 기도했다.

 

성직자가 아닌 자들도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새로운 구원자의 도래를 절실하게 기원했다.

 

그렇게 약 5년이 지났을 무렵, 드디어 인간들의 뜨거운 바램이 결실을 맺었다.

 

어느 이름모를 왕국의 서쪽 구석에 있던 한 촌동네(인구가 50명도 채 안되는)에서 태어난,

 

한상기라는 이름의 아기가 바로 그 영웅으로 밝혀진 것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왕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미칠 듯이 환호했고,

 

(비록 대다수의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영웅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어느 정도 실망을 했겠지만서도)

 

그렇게 사람들의 기쁨과 열광이 최고조에 다다를 무렵, 예언자들은 영웅에 대한 또 하나의 신탁을 받았다.

 

이 신탁의 내용이 알려지자마자 희망으로 한껏 부풀어오르던 분위기는 순간 싹 가라앉았는데,

 

지금까지 보존된 몇몇 고대 문헌의 내용에 비춰볼 때, 그 계시는 다음과 같이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 부분 :

 

 

친애하는 한상기 씨께

 

귀하가 영웅으로 선발되었음을 알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귀하께서는 지금 이 순간 인류의 구원에 필요한 특성을 갖고 있다고 판단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귀하께 인류를 구원하도록 허가함으로써,

 

귀하께 자신의 능력을 인류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도록 제안하는 바입니다.

 

물론 귀하는 축하받아 마땅합니다만,

 

그것은 귀하께서 영웅이 될 만한 '당연한' 자격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실 귀하께 그런 '당연한' 자격은 없습니다),

 

복권 당첨을 축하하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귀하는 인류 역사의 적절한 순간에 적절한 특성을 갖게 된 행운아입니다.

 

귀하께서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신다면,

 

귀하께는 이로부터 파생될 여러 가지 능력과 이익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부여될 것입니다.

 

이 점에서 귀하는 축하를 받으셔도 좋습니다.

 

귀하께서는, 이번 허가가 자신의 타고난 재능을 높이 평가한 결과가 아니라면,

 

적어도 구원을 향한 인류의 의식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한 것이라고 여겨 그 점을 축하하고픈 유혹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에서 인류가 보여준 숭고한 모습이,

 

그들이 어떤 '우월한' 본성을 지녔기 때문이라는 생각에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다양하고 훌륭한 주변 환경(산소, 햇빛, 식물 기타 등등)과 조건(예를 들자면 마족의 지배로 인한 괴로움)으로 인한 것이며,

 

따라서 인류의 공으로 돌릴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자격 또는 당연한 몫이라는 개념이 해당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인류가 구원될 그날까지 안녕히 계십시오.

 

 

...

 

 

두 번째 부분 :

 

 

친애하는 그 나머지 자녀분들께

 

귀하의 영웅 선발이 거절되었음을 알려드리게 되어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번 결정에 귀하를 모욕할 의도는 전혀 없었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귀하를 경멸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귀하가, 영웅이 된 인간보다 자격이 미달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귀하가 인류 역사에서 별로 비중이 없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은 귀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귀하 대신 영웅이 된 자도 그 몫을 마땅히 받을 자격은 없으며,

 

어쩌다 영웅이 되기에 적합한 요소를 갖추었다고 해서 칭찬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단지 그를, 그리고 귀하를, 더욱 광범위한 역사적 목적을 수행할  도구로 이용할 뿐입니다.

 

귀하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실망하시겠지요.

 

그러나 영웅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귀하의 타고난 도덕적 가치를 의심하며 더 깊은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귀하는 어쩌다 보니 역사가 원하는 특성을 갖고 있지 않게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도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앞으로는 귀하께 행운이 항상 함께하길 바랍니다.

 

 

 

깊은 존경과 진심을 담아,

 

영혼관리처 지구사업부 인간지원과에서 보냄

 

 

 

 

 

※ 본 글의 일부분은 마이클 샌델 저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발췌되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