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leve.jpg 



<월-E>는 디즈니 애니메이션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스케일이 큽니다. 그냥 머나먼 왕국이나 판타지 세계가 아니라 광대한 우주를 무대로 잡기 때문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하이퍼 스페이스 항해까지 하는 거 보면, 태양계는 분명히 벗어났을 테죠. 하지만 그냥 무대만 큰 게 아니라 주제 역시 대범한데, 인류의 멸망과 회복, 행성의 미래를 그렸다는 점에서 어지간한 하드 SF 못지않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가족용 영화라서 엄밀한 과학 고증은 따르지 않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단점과 환경오염, 기술 문명을 바라보는 시각, 지구를 사랑하는 인류애까지 이야기만큼은 수작으로 분류해도 좋을 겁니다. 맥크리 선장이 새싹을 보고 지구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는 부분이나 항해로봇 오토를 물리치는 대목, 이브가 인간을 보호하는 장면은 눈물없이 볼 수 없는 명장면입니다.

 

특히, 최종 악당이 항법 인종지능인데도 결국 로봇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내는 게 퍽 인상적입니다. 보통 이런 작품에서 로봇은 그냥 때려잡아야 할 적 아니면 무조건적인 노예나 친구로만 나오잖아요. 하지만 <월-E>는 어느 한쪽 선에 치우치지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내다봅니다. 경우에 따라서 적이 될 수도 있고,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도구는 사용하기 나름이라는 소리이긴 합니다만. 사실 따지고 보면 항법 인공지능인 오토도 지구로 귀환하는 장애물이었지, 악당까지는 아니었죠. 로봇이 명령한 대로 수행하는 게 무슨 죄겠습니까. 이 점은 HAL 9000이 악당이 아는 것과 비슷한 위상이죠. (오토가 할의 오마쥬이므로 비슷한 게 당연하겠습니다.) 그리고 오토보다는 월-E와 이브의 비중이 크니, 아시모프 같은 사람이 보면 참 재미있었을 것 같습니다. 아서 클라크와 아시모프의 분위기를 절충했다고 해야 할까요. 최종적으로는 아시모프 분위기로 끝났고요.

 

주제만 대단한 게 아니라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도 참 독특한데, 영화 전반부는 대사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주인공인 월-E와 이브 자체가 말이 별로 없습니다. 월-E는 할 줄 아는 말이라곤 이브밖에 없고, 이브는 그나마 대사가 좀 있긴 한데, 성격이 과묵하죠. 더빙판을 보니 월-E는 더빙을 아예 안 하고, 이브도 임무, 지구, 식물 외에는 딱히 번역이 없습니다. 조연들의 대사라면 맥크리 선장과 오토가 논쟁하는 것 정도? 그것도 액티엄 우주선에 가야 대사가 좀 나오지, 월-E가 이브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냥 판토마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사건을 전개하는 걸 보면, 컴퓨터 그래픽만 좋은 게 아니라 시나리오 능력도 엄청납니다.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쿵푸 팬더>나 다른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한 번 보세요. 인물들이 수시로 미국식 유머를 구사하고, 개그를 하느라 떠벌리기 바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첫 장면부터 이후 몇 십 분간을 서로 이름만 부르고 맙니다.

 

이브는 디자인을 볼 때마다 감탄하는 로봇인데, 눈만 그리는 것으로 온갖 희로애락을 다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평상시 무표정한 얼굴부터 기쁨, 놀람, 두려움, 슬픔, 황당함 등 눈만 가지고 못 짓는 표정이 없네요. (그러니까 이브는 눈웃음이 예쁜 여자.) 하긴 모, 번-E, 서플라이-R 등 액시옴 우주선에 있는 로봇들이 전부 다 눈으로 말하긴 하지만. 월-E도 눈만 가지고 여러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긴 하는데, 아무래도 디지털이 아니라 시대에 뒤떨어진 아날로그 방식이라. 대신 효과음은 월-E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비명소리와 휘파람이 기억에 남네요. 즉, 이브는 눈으로, 월-E는 소리로 자기 감정을 표현하는 거죠. 매끄러운 곡선과 순수한 흰색으로 여성스러움을 표현한 것도 좋은 선택이었고요. 여성형 로봇이랍시고 분홍색으로 칠하거나 억지로 곡선을 집어넣지 않아서 참 좋았습니다.

 

이건 과장된 해석일지도 모르겠지만, 월-E가 새싹을 찾아서 이브에게 주고, 이브가 그걸 배에 넣고, 배에 넣은 새싹을 지구에 심어 결국 생명이 번창하는 과정은 생명 탄생의 신비를 비유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남성이 여성에게 생명의 씨앗을 주고, 여성이 아이를 가져 배에 품고, 자식을 낳아 번창하는 방식이 꽤 비슷하지 않나요. 설마 가족용 영화에 이런 비유까지 넣었을까 의문도 생깁니다만. 이 작품의 주제가 거대하고 진지한 걸 생각해보면, 제작진이 아무런 생각 없이 저런 설정을 넣진 않았을 것 같아요. 이 두 로봇 커플이 그냥 연애만 하는 커플이 아니라 실제로도 부부 같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게 다 저런 장면 때문입니다. 생명을 주는 남자 로봇, 그걸 지키고 가꾸는 여성 로봇. 그리고 결과적으로 행성에서 생명이 번창. 의미심장하지 않아요. 로봇 부부라고 하면 어감이 좀 이상하지만.

 

-E와 이브 의인화 팬 아트도 꽤 많은데, 원작 디자인이 간단해서 그런지 패턴도 다 비슷합니다. 월-E는 고글을 걸치고, 누런 작업복에다가 위험 표시 줄무늬가 패션입니다. 청소로봇이라서 가끔씩 빗자루도 들고 다닙니다. 표정은 언제나 어수룩하고, 구식 로봇이라는 걸 반영해서 옷차림은 낡고 찌들었어요. 이에 비해 이브는 그야말로 미래에서 온 여성. 몸에 딱 붙는 하얀 우주복에다가 호수처럼 파란 눈이 돋보입니다. 대개는 식물을 찾았다는 나뭇잎 표시를 가슴에 달고 다닙니다. 원작에서도 플라즈마를 펑펑 쏘고 다녀서인지 허벅지에 플라즈마 권총도 차고요. 무심한 듯 시크한 표정이 일품. 로봇일 때도 구식 로봇 대 최첨단 로봇이었는데, 의인화한 팬 아트를 보면 그런 이미지가 더 두드러집니다. 아무래도 사람 눈에는 사람이 더 익숙해 보여서 그런가 봅니다.

 

의인화한 팬 아트도 우주에서 서로 껴안는 그림이 많더군요. 원작에서도 로맨스가 제일 비중이 높았던 부분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브는 이때 불량 로봇임을 나타내는 빨간 장치를 붙였는데, 의인화에서도 그걸 반영하는 그림은 거의 없는 듯? 대부분은 소년과 소녀, 청년과 아가씨의 만남으로 그리는데, 가끔 중년끼리의 연애로 그리는 그림도 있더군요. 이브야 어떨지 모르지만, 월-E의 나이가 많은 걸 감안하면 중년으로 의인화하는 게 맞을지도.

 

저는 주제부터 이야기까지 그 거대함 때문에 <월-E>가 디즈니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만한 작품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싶네요. 몇 번이고 다시 봐도 그저 감동만 벅차 오를 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