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론 요새는 아나폴리스 남서쪽 곶에 위치한 해안요새였다. 요새의 절반이 발디딜 곳 한군데 없는 절벽에 둘러쌓여있고, 다른 절반은 험준한 지형에 방어받고 있어 이곳을 공략하는 군대를 매번 힘들게 하였다. 지중해로 이어지는 항로를 지키고 있는 탓에, 이곳은 매번 지중해 밖으로 진출하려는 갈라디아 제국과 신흥 해양 강국인 아라곤 왕국 사이의 치열한 접전지가 되었고, 갈라디아 왕국은 매번 패배하였다.


엘렌 반 류벤의 해적선이 오랜 항해 끝에 잠시 육지 구경을 하고자 이곳을 지나갈 무렵에도 갈라디아 제국이 이곳을 공략하고 있었다.  갈라디아 제국은 5만명의 육군과 200척의 선단으로 요새를 완전 포위하였다.


"시론, 어떻게 생각해?"


엘렌이 우락부락한 북부 남성에게 물었다.


"글쎄, 이렇게 가다간 장기전으로 갈 수 밖에 없겠는걸? 요새 안의 보급품이 다 떨어지던지, 갈라디아군의 보급로가 먼저 끊기던지, 둘 중 하나겠지."


남자는 자신의 수염을 북적북적 긁었다.


" 지상에서 성벽에 접촉할 수 있는 것은 좁은 통로 세개 뿐이야. 한꺼번에 보낼 수 있는건 3천명 정도 되나? 지상으로 공격하려면 소규모의 병력을 꾸준히 보내는 것 밖엔 없는데, 요소요소마다 아라곤 군대가 방어하고 있으니 거의 불가능하네."


엘렌이 말했다.


"육전은 내 전문 아니었던가?"


시론이 되물었다.


"그건 잠시 접어두고, 그럼 결국엔 해안에 전함을 투입해 포격하는 수 밖에 없겠네."


엘렌이 말했다.


"때맞춰 진격하는군."


시론이 말을 마치자 마자, 갈라디아 깃발을 단 검은 선체의 갤리선 10척이 전진하기 시작했다. 2천명 가까이 되는 노꾼에 의해 움직이는 선단의 위용은 대단했다. 갤리 뱃머리에는 구포를 장비한 걸 보아, 공성용으로 상정하고 가져온 듯 싶었다. 갤리선단은 빠르게 성벽을 향해 다가갔고, 포수들도 포탄을 우겨넣어 포격준비를 끝냈다.


"누가 이길 것 같나?"


시론이 물었다.


"100년짜리 결과가 하루아침에 바뀔 것 같아?"


엘렌이 대답했다. 대포 사정거리까지 얼마 남기지 않은 상황이었으나, 성벽 수비대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요새에서 제일 높고, 바다에 가장 가까운 금탑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 곳을 청동판으로 덮은 탑은 강렬한 아나폴리스의 뜨거운 태양빛을 반사하여 금처럼 반짝거렸다. 탑 꼭대기에는 왕관 모양의 구조물이 설치되어있는데, 본래는 고대의 과학자가 불을 지펴 등대로 사용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라고 전해진다.


"아르키메데스의 빛."


엘렌은 중얼거렸다. 그녀는 망원경으로 금탑을 흥미롭게 관찰하였다. 그 순간, 금탑의 구조물이 돌아가더니, 갤리선단을 향해 백색의 광선을 발사하였다.  빛을 맞은 커다란 갤리선은 수초만에 불길에 휩쌓였다.


"장관인데?"


무 심한듯 시크하게, 시론이 말했다. 그가 말하는 사이, 금탑의 머리가 한번 더 돌아갔다. 광선은 바다를 가르며 다음 표적을 불태웠고, 광선의 궤적에는 수증기가 벽을 이루었다. 시론은 망원경을 통해, 온몸에 불이 붙은 채 바다로 뛰어내리는 갈라디아의 노꾼들을 구경하였다.


"아이작, 어떻게 생각해?"


엘렌이, 흑연 필기도구와 양피지를 잡은 채 열심히 계산식을 정리중인 소년에게 물었다.


" 태양빛을 집광시켜서 조준하는거에요. 특히 맑은날엔 더욱 강력하겠죠. 아마 저 왕관 모양의 장식품으로 태양빛을 모아, 그 아래의 반사경으로 내려보내 발사하는걸거에요. 문제는 저런 에너지를 견딜 수 있는 재질인데, 제가 알고 있는 한 저런 에너지를 반사시킬 수 있는 재질은 없어요. 빛이나 재질이나, 아직 제가 공부하지 않은 부분이라 잘 모르겠네요."


그는 남국에서 얻은 고무 조각으로 틀린 계산식을 지우며 대답했다.


"흥. 그렇다면 연금술이나 마법이겠군. 기분나빠."


망원경을 접으며, 엘렌이 말했다.


"어떻게 할까?"


시론이 물었다.


"갈라디아 선단에 접촉한다. 폴! 함수를 돌려 갈라디아 선단을 향해 전진하도록 하세요!"


"Aye, Aye, Captain!"


늙은 갑판장 폴은 선원들에게 명령하기 시작했다. 조범수는 돛을 당기고, 조타수는 조타 핸들로, 나머지는 무기고로 보내거나 포대로 보냈다. 돛을 반개한 배는 미풍을 받아 천천히 갈라디아 해군의 화려한 기함을 향해 다가갔다.


이 교도의 해적선이 갈라디아 해군 제독과의 면담을 요청하자, 해군들은 황당해했다. 그러나 엘렌은 사략 용병이라는 말로 대충 둘러댄 뒤, 겨우 기함에 다가갈 수 있는 권리를 얻었다. 그녀는 폴과 시론, 그리고 칼라를 데리고 갈라디아 해군 함대의 기함, 알 마크투스에 올랐다. 배에 오르자마자, 술탄의 정예부대인 예니체리들이 그녀를 포위했다.


"일개 이교도 해적 주제에…. 죽을 길을 찾아서 왔나?"


화려한 갑주를 차려입은 좋은 풍채의 길다란 콧수염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해군 제독 무함마드였다.


"고전하시는 것 같아서 말이지요. 배 열척과 2천명을 고작 20분 만에 잃다니, 벅찬 상대죠?"


엘렌이 물었다.


"비아냥은 듣지 않는다. 신의 자비다, 너희 배로 돌아가 어디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져라. 목숨만은 살려주마."


무함마드가 말했다.3만명이 넘는 적에게 둘러쌓여있으면서도 그녀는 전혀 기죽은 기색 없이, 오히려 쾌활하게 웃으면서, 적의 우두머리와 대면하였다.


"해적선 한척 고용하시죠. 저를 고용하시면, 저 괴물같은 탑을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지지않고, 엘렌이 말했다.


"흠, 고작 해적선 한척 가지고 상대하기엔 벅찬 상대일텐데? 비용부터 말해보시지."


그가 말했다.


"뤼벡 은화 한상자, 그리고 우리들을 위한 갈라디아 해군 제독의 사면 청원장."


그녀가 대답했다. 무함마드는 자신의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결정은 곧 내려졌다.


"죄수의 사면은 황제 폐하만의 권리이다. 그건 안된다."


"그럼 갈라디아 제국 항구에서의 교역 허가증."


"교역국에 의논해보마. 그 친구들이 허가내주려면 아마 200년은 필요할거다."


"할 수 없네요. 은화 한상자 더. 대신, 당신이 주둔하는 동안 저 요새 안을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권리."


"그건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겠군."


"그럼 거래 성립입니다."


그녀는 팽글 돌아섰다. 붉은색 망토가 반원을 그렸다.


"당신들 군인의 방법은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아. 우리 해적들의 더럽고 치사하고 야비한 방식을 보여드릴께요."


그녀는 자신이 데려온 갈라디아 출신의 소녀에게 다가갔다. 제법 더웠지만, 차도르를 쓴 채, 코 아래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독특한 소녀였다.


"칼라. 저 탑 까지, 가능하겠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엘렌이 물었다.


"아냐, 불가능. 필요해, 다만, 긴것."


칼라가 대답했다.


"폴, 그거 가져왔지?"


그녀가 폴을 돌아보았다.


"가져오긴 했지요. 길고 무거운게 흠이었지만…. 혼자서는 장전하기도 힘들겠어요, 선장."


폴이 자기 발 밑에 내려놓은, 족히 6피트는 될 법한 천에 쌓인 짐을 들어 엘렌에게 건네주었다. 여자와 남자의 완력이 다른 탓인지, 엘렌은 그걸 받자마자 휘청거렸다.


"이거 무거운걸?"


천을 고정하고있는 매듭을 풀러내며, 그녀가 말했다.


"무거운거, 좋아. 없어, 반동. 당연해, 무거운거."


칼라가 말했다. 배 위의 모든 이들이 엘렌이 들고있는 물건을 주욱 관찰했다. 6피트 길이의 거대한 머스킷이었다. 구경은 소형 대포급이었고, 받침대가 있어 땅에 받치고 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총신에는 넓은 구경의 스코프가 달려있엇는데, 그를 위해 보통은 방아쇠 위에 붙어있는 격발장치가 스코프 앞에 위치해 있었다.


"아부스……."


갈 라디아 군인들은 그 무기의 정체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부스 대포는 갈라디아 제국에서 대인용 소형 대포로서 운용되는 화기였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칼라의 아부스는 특별히 길다는 것이었다. 칼라는 엘렌의 도움으로 대포를 선수로 옮겨갔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포신을 금탑으로 향했다.


"장전."


엘렌은 와 머스킷 수십발은 쏠 분량의 화약, 그리고 주먹만한 포탄을 총구에 털어넣고, 총신 옆에 묶어놓은 꼬챙이를 꺼내들어 솜씨좋게 탄약을 다졌다. 칼라는 화승에 불을 붙이고 약실에 화약을 주입했다. 한발 쏠 준비가 완료되자, 칼라는 망원경으로 성벽 쪽의 깃발을 살펴 바람과 거리를 쟀다. 그리고 스코프로 눈을 돌렸다.


"목표는 반사경이다. 정확히 반사경을 깨트려랴."


엘렌은 망원경을 들어 금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곧 조준이 완료되었고, 칼라는 주저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머스킷의 그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웅장한 소리가 고막을 마비시켰다.


"착탄. 빗나갔어."


엘렌이 말했다. 총탄은 장식물을 받치고 있는 기둥 하나를 부러뜨렸을 뿐이었다. 엘렌은 주저없이 재장전에 들어갔다. 방금전의 작업을 반복해 또 한번의 기회를 만들었다. 칼라는 망원경으로 자신의 총탄이 어디를 때렸는지 확인하였다.


"오차율 5%. 수정완료."


칼라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은 투사체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리고 반사판의 정중앙을 때렸다. 반짝이는 유리판에 금이 가고, 총탄은 배를 불태웠던 강렬한 빛을 받아 금방 녹아버렸다.


"착탄! Bull's eye!"


엘렌이 말했다.


"한번 더."


칼라는 호흡을 가다듬고 총신을 꼬나쥐었다. 시론과 폴은 부채를 들고 포연을 없에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윽고 장전이 완료되고, 칼라는 세번째 총탄을 발사했다. 그리고 총알은 정확히 금이 간 그 중앙을 한번 더 명중했다. 반사판은 더욱 더 금이 가더니 이내 깨져버렸다. 깨져버린 반사판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반사판은 언제 그걸 버텼냐는 듯이, 집광기로 모인 태양빛을 이기지 못하고 녹아 없어졌다.


"해냈어!"


시론이 외쳤다. 탑이 불타기 시작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빛의 공격을 이기지 못한 탓이었다. 승리를 알리는 봉화로서는 충분했다.


"어때요?"


무함마드를 돌아보며, 엘렌이 물었다.


"전 함대 돌격! 적의 성벽을 포격하라!"


그러나 재미없는 해군 제독은 지휘봉을 휘두르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200여척 갤리선 함대가 무시무시한 대포를 앞세우고 전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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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아르키메데스가 로마 군선을 불태웠다는 그 무기의 판타스틱 미래 버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