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하이퍼 FPS 게임은 부대 지휘를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밀리터리 게임들이 휘하에 3명 이상의 부하를 두고 지휘하며 싸우는 것과 달리 하이퍼 게임들은 오직 주인공 혼자 싸운다는 거죠. 간혹 부하를 지휘하는 <기어즈 오브 워>, <리퍼블릭 코만도> 같은 작품도 있습니다만, 이쪽은 말 그대로 ‘간혹’입니다. 아니면 부대가 나와서 같이 싸우긴 하는데, 정해진 시나리오대로만 움직일 뿐 지휘할 수 없는 경우이거나. 저는 이러한 경향이 하이퍼 FPS 특유의 생존 방식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주선에 갇혀서 괴물을 무찌르며 홀로 탈출하는 고전적인 SF 이야기가 녹아 들어서 그런 거라고요. 밀리터리 게임은 SF 이야기를 따라가지 않으므로 부하들이 많은 거고요. 하지만 이 외에도 부대 지휘에 따르는 고충이 몇 개 더 있을 거라고 봅니다.

 

만일 하이퍼 FPS에서 부대 지휘를 하고 싶다면, 병사 개인에게 과도한 장비를 주지 말아야 합니다. 밀리터리 게임과 달리 하이퍼 게임에서는 (미래 세계니까) 별별 희한한 장비를 지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늘을 나는 제트팩, 투명해지는 클로킹 필드, 엄청난 거리를 뛰는 점프제트, 우주 공간을 활동하는 우주복까지…. 주인공 하나만을 조종할 때 이것들은 게임의 볼륨을 높여주는 좋은 수단이죠. 문제는 부하들에게까지 이런 걸 쥐어주면 유저가 제대로 조종할 수 없다는 겁니다. 장비가 늘어나면 당연히 액션도 격렬해지기 마련인데, 주인공 하나만 조종해도 바쁜 마당에 서너 명이 넘는 부하까지 다룰 여유가 없어집니다. 그러니 이런 장비는 주인공 혼자만 착용하든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주지 않든가 해야 합니다. 부하들은 죽어 나가는데, 주인공 혼자 좋은 장비 착용하고 날아다니는 것도 이상하니 아예 처음부터 안 주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와 더불어 각 병사들의 액션은 상당히 제한적이어야 합니다. 움직이는 반경에 제한을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유저에겐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며, 사정없이 들고 뛰는 게임일 경우 다수의 병사를 조종하느라 허둥지둥하다 게임 오버될 가능성이 높아지죠. 대개의 게임은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기 위해 주변을 방방 뛰어다니거나 장애물을 들락거리기 마련인데, 유저 한 명이 몇 명이나 되는 병사를 이렇게 조종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부하들이 한 자리에 오래 붙어있는 시스템을 선호하게 되며, 결국 엄폐를 가장 좋은 시스템으로 차용합니다. 적이 아무리 공세를 퍼부어도 장애물 뒤에 숨은 이상 아군은 다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엄폐 명령을 시키고 나면 어느 정도 작전을 짤 여유가 생기죠. 게임은 주인공 부대가 적군의 공격을 피해 숨고 쏘고를 반복하게 되겠지요.

 

만약 이런 시스템으로 간다면, 맵을 디자인할 때 장애물을 꼭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졸개 몇 명이 나오는 거라면 없어도 될 겁니다. 혹은 특정 방식으로 공격하는 적을 위해 평지를 만들어야 할 때도 있을 거고요. 하지만 이건 특별한 경우고, 대개는 유저가 어디에 아군을 배치시켜야 적절할지 고민하게끔 지형을 꾸며야 합니다. 적과 아군의 교전도 고려해야 하고, 사각과 사격 각도도 생각해야 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맵보다는 디자인하기 까다로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위든, 나무든, 바리케이드든, 뭐든 간에 아군과 때로는 적군까지도 숨을만한 구석을 마련해야 합니다. 유저는 각 병사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누굴 어디에 보낼지, 자신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머리를 굴려야 하고요.

 

하지만 이렇게 엄폐 사격만 계속하다 보면 하이퍼 FPS의 개성을 잃을 염려도 생깁니다.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래가 배경이라 강화복이니 첨단 장비니 하는 것들이 수두룩할 텐데, 벽이나 나무 뒤에 숨어서 총만 쏘면 재미없겠죠. 적들이 강화복을 뚫을 정도로 막강한 공격을 한다거나 특수 장비는 말 그대로 특수부대만 쓴다거나 하는 설정으로 둘러댈 수도 있습니다만. 사람들이 SF에 바라는 것과 역행하는 짓이기도 하죠. 어차피 바리케이드나 찾아서 숨을 거라면, 밀리터리 게임을 하면 되지 굳이 SF를 할 필요가 있나요. 그래서 중간중간 서비스하는 식으로 강화복을 입고 싸운다든가, 특수 차량을 타고 이동하는 등의 ‘양념’을 넣는 것도 필수적일 겁니다. 이게 주력이 되면 안 되고, 어디까지나 미션 중간에 맛보기로만 넣어줘야 하겠죠.

 

그리고 엄폐 시스템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아군만 아니라 적군도 행동에 제약이 있어야 합니다. 무작정 뛰어와서 칼을 휘두르는 적이 있다면 장애물 따위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에일리언처럼 어디든 기어 다니고, 무기라곤 이빨과 꼬리밖에 없는 괴물과 싸우기 위해 엄폐를 해 봤자 소용이 없겠죠. 그냥 뒤로 도망치면서 쏘는 게 낫죠. 그러므로 적군도 총을 쏘는, 그것도 인간처럼 움직이는 형태로 고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흉측한 외계인이건, 금속으로 만든 로봇이건 간에 사격하는 적군만 디자인할 수밖에 없다는 소리입니다. 물론 꾸준히 하는 이야기지만, 총 쏘는 놈들만 상대할 거라면, SF가 배경일 이유가 없습니다. 이왕 외계인과 싸우면 커다란 괴물도 나오고, 벌레 같은 놈들이 떼거리로 몰려올 때도 있어야죠. 하늘을 날아다니며 괴롭히는 크리쳐도 있으면 좋고요. 괴물 같은 것도 안 나오는 SF를 누가 재미있어 하겠습니까. 그러니 이런 괴물들도 ‘양념’으로 간간이 넣어주는 센스가 필요할 겁니다. 주력은 어디까지나 사격하는 졸개들이지만요.

 

, 참고로 말하자면, <에일리언 대 프레데터> 같은 게임은 부대 지휘 방식으로 만들기가 불가능합니다. 흔히 드론이라 불리는 병정 에일리언은 개떼 돌격이 해답이라 온 사방을 뛰어다니며 쏴야 이길 수 있거든요.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수 십 마리가 쳐들어오는데, 벽 뒤에 숨어서 펄스 라이플을 갈길 이유가 없습니다. 무엇을 피하기 위해 벽 뒤에 숨을 건가요? 그리고 프레데터와 싸우기 위해 엄폐하는 것도 바보 짓이죠. 아마 플라즈마 캐스터 몇 방은 피할 수 있을 겁니다. 허나 프레데터가 위장을 하고 등 뒤로 다가오면 그땐 목이 따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주 해병대로 지휘를 하기보다 에일리언이나 프레데터로 지휘하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아, <에일리언즈 : 콜로니얼 마린즈>가 있긴 하네요. 그런데 인기는 별로 없죠. AvP 시리즈를 재미있게 한 유저들 중에도 이런 게임이 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아마. 플레이 동영상 하나 찾기도 쉽지 않더군요.


멀티 플레이도 문제긴 문제일 겁니다. 어차피 멀티 플레이는 다 사람들이 하는 거니까 굳이 부대 지휘 시스템이 필요없어요. 시스템 만들어봤자 싱글 미션에만 사용할 수 있고, 멀티 플레이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싱글 미션에 양념처럼 넣은 강화복이나 특수 차량, 괴물들을 멀티 플레이에 어떻게 집어넣는가도 머리 아픈 고민이고요. 잘 만든 싱글 미션 하나로 승부를 거는 게임도 있긴 합니다만. 요즘의 대박 FPS는 멀티 플레이를 염두엔 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는 제작하기가 더 복잡하겠지요. 협동 모드도 마찬가지일 테고. 멀티 플레이를 더 지향하는 게임이라면 부대 지휘 같은 건 그냥 애물단지.
 

, 대략 이 정도로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그러니까 하이퍼 FPS라고 부대 지휘 게임 못 만들란 법이 없다 이겁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SF의 여러 특성을 포기해야 합니다. 최첨단 장비도 못 쓰고, 총알 피하려 구석에나 기어들어가고, 외계 괴물도 잘 안 나옵니다. 이쯤 되면 제작자든 유저든 ‘차라리 이럴 바에야 밀리터리 장르를 하겠다’는 생각을 할 테고, 부대 지휘 하이퍼 게임은 시장에서 설 자리를 잃겠지요. 그래서 지금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부대 지휘라는 요소가 전술적인 선택을 늘려주니까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봐요. 그래서 ‘부대원들과 함께 외계괴물과 싸우는’ 게임이 좀 나왔으면 싶은데, 앞으로도 그럴 것 같지는 않네요. 싱글 미션은 포기하고, 멀티 플레이나 뛰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