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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쯤에서 헤어지기로 하죠."

반나절째 같은 길을 가던 일행에게 작별의 시간이 다가왔다. 갈림길의 시작에서 두 여자와 한 남자, 그리고 그동안 그들의 일행이었던 한 여자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우리와 같이 갈순 없겠나? 자네가 있으면 공주님께 여러가지로 도움이 될텐데. 아쉽군."

리셀은 씁쓸한 표정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에리엘이라는 이 여성은 극심한 감기몸살로 고생하던 에이브릴의 병세를 반나절만에 호전시킬 정도로 의술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천성적으로 온화하고 자애로운, 이상적인 어머니 상이었기에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을 뿐더러 겨우 반나절 남짓 같은 길을 간 것에도 불구하고 에이브릴이 그녀의 모습에서 자신의 어머니였던, 이베리스 여왕의 흔적을 느끼고는 많이 의지하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았던 그로써는 이 여인과 헤어진다는것 자체가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가게 될 길은 매우 위험합니다 레이번 경. 죄없는 에리엘 마저 위험에 빠뜨릴순 없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지금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도 아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에이브릴은 자신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머리로는 확신하지만 속 마음으로는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불쑥불쑥 머리를 들었다. 서로의 손을 맞잡고 마지막 인사를 하는 에이브릴과 에리엘을 바라보던 레미아가 볼멘소리를 내뱉았다.

"에리엘은 죄가 없어서 빠지고, 난 죄가 있어서 같이 가는거야? 그런거야?"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들에게서 약간 떨어져 팔짱을 끼고 있던 리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다가와 망치 자루 끝으로 그런 레미아의 정수리를 툭툭 건드렸다.

"가자고 사람 등 떠밀땐 언제고. 들어갈때 틀리고 나올때 틀린거냐 꼬맹이."

"사람 머리 때리는 버릇은 어디서 배운거야 망할 늙은이!"

리셀에게 맞은 머리를 감싸쥐고 도끼눈을 뜨며 돌아보는 레미아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리셀이 능글맞게 응수했다.

"응? 이거말이냐? 기사단에서 배웠지."

".....말을 말지 내가. 어휴, 짬내."

뒤이은 레미아의 일격. 리셀은 뭔가 말하려다가 이내 뒷머리를 긁적였다.

"방금 그 말. 뭔가 화 나는데 부정할수가 없구나."

두 사람이 만담을 벌리는 사이, 에이브릴과 포옹을 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던 에리엘이 에이브릴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레미아에게 다가왔다. 여느때처럼 리셀과 툭탁거리던 레미아는 그녀가 다가오자 리셀과 하던 장난을 멈추었다.

"레미아, 두분 잘 부탁드려요."

"걱정 붙들어 매셔. 깔끔하게 처리할테니."

뒤에서 그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리셀이 다시 망치 자루 끝으로 레미아의 뒤통수를 쿡 쥐어 박으며 빈정거렸다.

"자네 무슨 소릴 하는건가. 누가 누구를 책임져. 이녀석이 우릴 책임 졌다간 우리 둘 다 노이로제로 쓰러지고 말걸세. 생각만 해도 끔찍하구만 그래."

"이 노인네가!"

다시금 투닥거리기 시작하는 리셀과 레미아를 보며 난감한 미소를 짓던 에리엘은 다시 에이브릴에게 돌아왔다. 그녀의 얼굴에서 서운한 감정을 읽은 에리엘이 부드럽게 웃었다.

"아쉬우세요?"

"조금... 아니 많이 아쉽네요. 제가 가는 곳이 위험하지만 않았어도 같이 가고 싶었어요. 하지만 제 고집때문에 에리엘에게까지 피해를 줄순 없잖아요."

때때론 철없고 세상물정 모르게도 보였다가, 어떨땐 고집스러운 일면을 보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에이브릴은 일국의 공주였다. 해서는 되는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은 확실히 구분할줄 알았다. 이미 그녀는 일이 잘못 될 경우 리셀과 레미아가 무사히 빠져나갈수 있을만한 방법까지 생각해 두고 있었다.

"혼자서 너무 많은걸 짋어지려 하시네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소녀에게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비장한 눈빛을 본 에리엘은 씁슬하게 웃으며 자신의 목 뒤로 양손을 가져가 무엇을 풀더니 에이브릴의 오른손에 무엇인가를 쥐어주었다.

"잠시 빌려드릴게요. 제 행운의 부적이에요."

에리엘이 쥐어준 오른손을 펴 보니 은청색의 작은 목걸이가 손바닥에 자리잡고 있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물방울 모양의 금속과 그것을 관통하는 사슬로 된 목줄. 에이브릴은 고개를 들어 에리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행운의 부적이라면서 이런걸 막 줘도 되나요?"

"어디까지나 빌려 드리는거에요. 무사히 원하시는 바를 이루게 되면 제게 돌려주시면 된답니다. 이리 주세요. 제가 목에 걸어드릴게요."

에이브릴에게 다시 목걸이를 넘겨받은 에리엘은 에이브릴의의 뒤로 돌아가 목걸이를 채워주었다. 상의 안쪽으로 목걸이를 집어 넣어 완전히 숨긴 그녀는 드디어 일행에게서 떨어져 다른 갈림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럼, 그만 가볼게요. 다들 무사하셔야 해요."

리셀과 에이브릴은 아쉬운 표정으로 점점 멀어져 가는 에리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오직 레미아만이 기세 좋게 멀어져가는 에리엘을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치고 있었다.

"잘가~ 다음에 보자고~"

에리엘의 모습이 언덕 너머로 완전히 사라질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들은 이내 가벼운 한숨과 함께 에리엘이 간곳과 정 반대방향의 갈림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그들의 최종 목적지인 광산도시 켈라드까지는 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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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인구가 일만 오천이 채 되지 못하는, 그다지 크지 않은 규모의 켈라드는 한때 왕국 최고의 금 주산지로도 유명했지만 광맥이 점점 마르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그 대신 도시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는 웅장한 크기의 요새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도시다. 건국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알려지는 이 거대 요새는 테시아스 왕국의 왕성보다도 컸으며 단순히 돌을 쌓아 만든것이 아닌, 현재로써는 그 방법을 알수 없는 미지의 기술로 만들어진 고대인의 요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역사 만큼이나 요새의 모습 자체는 온전치 못한것이 더 많았는데 도시 외곽 성벽의 군데군데가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부분은 여타 다른 성을 건축하듯 바윗돌을 쌓아  보수를 해 놓고 있었다.

평소엔 거대한 도시의 규모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인구가 작아 썰렁하다시피 한 지역이었지만 지금 이곳의 성벽에는 형형색색의 깃발들이 꽃혀 나부끼고 있었고 성벽 구석구석마다 거대한 불이 피워져 주변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덴스톤 후작, 케이스 백작, 트리시안 백작... 맙소사. 반란군에 합류한 영주들의 숫자가 백작 이상급만 삼십명이 넘습니다... 이런 황망할데가.."

켈라드의 성벽이 가까이 보이는 수풀속에 몸을 숨긴 채 성벽에 꽃혀 나부끼는 각 영주들의 깃발을 확인한 리셀이 영주기의 숫자를 세어보다 기어이 이를 갈았다. 그도 그럴것이 테시아스 왕국에서 백작 이상의 직위를 가진 귀족의 수는 총 50여명 정도였는데 지금 저 숫자를 보면 나라의 중추를 손에 쥔 귀족의 절반이상이 반란군이 되어 국가의 전복을 꿈꿔왔다는 이야기였다.

"공주님 괜찮으십니까..?"

문득 에이브릴이 걱정된 리셀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얼마나 꽉 쥐었는지 미처 정리하지 못해 손가락 끝에서 삐져나온 그녀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한이 잔뜩 서린 무시무시한 눈초리로 켈라드의 성벽에 나부끼는 영주기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으와... 이동네 귀족놈들이 썩을대로 썩었다는건 알았지만 이건 너무 하잖아. 저놈들이 전부 다 반란군 소속이라 이거지?"

레미아의 물음에 에이브릴은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로 들어가는 정문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이 잔뜩 늘어선 정문은 아예 요새 문이 닫혀있는 상태라 반란군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한다는 상태라는 것을 짐작케 했다.

"어떻게든 들어가야하는데...."

리셀은 잡입 할 만한 장소를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도시 전체가 높은 성벽으로 보호되고 있어 들어가기 쉽지 않아보였다. 결국 분에 차 입술을 깨물고 있는 에이브릴의 얼굴을 흘끗 본 레미아가 행동을 시작했다. 창용하고 있던 망토를 뒤집어, 검은색의 망토 안감이 외부로 노출되도록 뒤집어 쓴 그녀는 숨어있던 풀숲에서 빠져나와 잽싼 움직임으로 성벽 위를 순찰중인 경비병의 눈을 피해 성벽 바로 아래까지 달음박칠 치더니 그대로 성벽이 만들어 낸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공주님, 준비 되셨습니까?"

자신들을 향해 손짓하는 레미아의 손짓을 확인한 리셀은 에이브릴에게 동의를 구했고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민첩하게 움직일 수 없는 에이브릴을 안아든 후 다시금 레미아의 손짓을 기다렸는데 레미아는 정확하게 성벽 위 경비병이 움직이면서 생긴 사각을 향해 이들을 유도해 주었다. 리셀은 겉옷 안쪽에 사슬갑옷을 입고 있음에도 소리한번 내지 않고 조용하지만 민첩하게 성벽 아애로 내달렸고 곧 이들의 모습 역시 에이브릴이 걸치고 있던, 레미아의 것과 같은 구조의 망토의 힘을 빌어 성벽 그림자에 모습을 숨겼다.

"무슨 계획이라도 있는거냐."

살금살금 움직여 서로 합류한 뒤 리셀이 레미아에게 질문했다. 레미아는 대답 대신 그들의 옆에 있는 성벽을 손짓했는데 마침 이들이 만난 지점 옆의 성벽은 돌출부 없이 매끈하고 일체형으로 만들어진, 고대의 성벽이 아닌 여러개의 바윗돌로 쌓아올린, 일반적인 형태의 성벽이었다.

두 사람을 향해 기어가는듯한 몸짓을 하고 성벽을 손짓한 레미아는 이내 성벽의 돌출된 부분을 찾아 잡으면서 능숙하게 성벽을 기어올랐다. 성벽의 최 상단부까지 도달한 그녀는 경비병이 지나갈때까지 매달린 채 기다리고 있다가 순식간에 튀어올라 번개같은 손놀림으로 경비의 목을 치고 그의 투구를 벗기더니 그녀 자신이 그것을 썼다.

"원한은 없지만, 미안."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머리 잃은 몸뚱이와 몸뚱이를 잃은 머리를 모두 다 성벽 밖으로 차 내면서 경비가 들고 있던 미늘창 마저 빼앗아 들더니 마치 그녀 자신이 경비병인양 행세를 하며 능청스럽게 성벽 위를 어슬렁 거렸다. 성벽 아래에서는 상대의 전신이 보이지 않고 오직 머리 부분과 창의 끝부분만이 보이기에 가능한 속임수였다. 주변이 안전한것을 확인한 그녀는 성벽에 걸쇠를 걸고 그 끝에 밧줄을 매어 아래로 내려주었다. 밑에서 대기중이던 리셀은 그 끝을 잡아 즉석에서 암벽 등반용 매듭을 지어 에이브릴의 허리에 매어주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제가 올라가서 끌어올려 드리겠습니다."

레미아가 성벽 위에서 망을 봐 주고 있는 탓에 리셀은 수월하게 그녀가 내려준 줄을 잡고 성벽을 오른 뒤 그 줄을 위로 잡아 당겨 이 줄을 허리에 감고 기다리던 에이브릴을 조심스럽게 끌어올렸다. 에이브릴까지 성벽 위에 오르자 레미아는 두 사람에게 자세를 낮춰 몸을 숨기라는 몸짓을 한 뒤 태연한 걸음걸이로 성벽에 난 계단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저씨가 먼저 내려가서 주변 좀 둘러봐. 나도 위에서 보겠지만 골목길 쪽은 잘 안보여."

"그러마."

리셀은 계단 양쪽에 난 난간이 만들어 낸 좁은 공간에 대응하기 위해 애용하는 전투망치 대신 허리춤의 단검만을 빼 들고는 살금 살금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중간에 마주친 병사 하나를 소리없이 제거한 그는 주변을 둘러본 후 주먹을 쥐어 머리 위로 들어 안전함을 확인시켜 주었고 그 즉시 레미아가 들고있던 미늘창과 머리에 쓴 투구를 벗어 성벽 너머로 던져버린 후 에이브릴의 손을 잡고 계단 아래로 내달렸다.

"이제 어디로 가지?"

레미아는 도시 주민들이 거주하는 지역과 정 반대편을 지적했다.반쯤 무너진 폐가들이 즐비한, 버려진 구역이었다.

"이 동네는 한때 인구가 5만을 육박했다가 광맥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인구가 줄었기 때문에 폐가가 제법 돼. 내가 여기 올때마다 자주 이용하는 장소가 하나 있어. 그리로 가자. 여기서 크게 멀지 않으니까."

"그거 좋군. 앞장서도록."

간단한 상의가 끝난 후 리셀은 계단 아래에서 해치운 병사의 시체를 끌고가 골목 뒤편의 후미진곳에 대충 놓아두었고 레미아가 여러가지 자질구레한 쓰레기들 모아 시체를 대충 가려두었다. 대충 이렇게만 해 둬도 경비들의 다음 근무교대까지는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을것이다. 레미아는 고갯짓만으로 다른 두사람에게 신호한 뒤 이들을 인솔해 골목길로 달렸고 리셀이 다시 에이브릴을 안아들고 그녀의 뒤를 따라 달렸다. 5분쯤 달렸을까, 레미아는 켈라드 요새 내성벽 바로 아래쪽에 자리잡은, 지붕이 무너져 내린 폐가의 쪽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은신처로 삼기엔 장소가 별로 좋지 못하군."

지붕이 완전히 무너져 내려 제대로 서있기도 힘들 정도의 좁은 공간을 바라본 리셀의 평이었다. 그러나 레미아는 그런 그의 말을 듣는둥 마는둥 하며 폐가의 바닥을 손으로 구석구석 짚어나갔다.

"이쯤 어디일텐데... 나도 참, 기억력이 점점 나빠져 간다니까."

 그녀의 행동을 바라보던 에이브릴이 지루함에 하품을 하던 그 순간 레미아의 손이 마룻바닥의 한 부분으로 쑥 들어갔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그녀는 집어넣은 손에 힘을 주었고 잠시 후 바닥에 박혀있던 마룻바닥의 판자가 가볍게 들어올려졌다.

"이쪽으로, 빨리."

"폐가 지하에 이런 공간이 있었나?"

마룻바닥 아래쪽에는 또 하나의 작은 문이 있었고 그 문마저 들어올려 열자 매우 넓은 공간이 나왔다. 레미아는 지하공간의 벽을 더듬어 횃대를 찾더니 이내 불을 붙였다. 불이 밝혀지자 리셀은 에이브릴은 먼저 내려보내고 자신은 지하로 내려가기 전 레미아가 들어올렸던 마룻바닥의 판자를 제 위치에 끼우고 안쪽으로 열려있던 문을 밀어 닫음으로 그들이 들어왔던 흔적 자체를 지워버렸다.

"여긴..."

레미아가 횃불을 들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불을 붙이기 시작하자 사방이 점점 밝아졌는데 그들이 내려 온 공간은 사방이 석재로 벽을 만든 제법 넓은 지하공간이었다. 레미아는 사방을 둘러보는 리셀과 에이브릴에게 말했다.

" 어쩌다가 우연히 발견한 지하실인데, 누군가 상당히 신경을 써서 만들었더라고. 저쪽을 보면 알겠지만 저기 문 있지? 저 문으로 나가면 요새 지하에 있는 비밀문하고 이어지게 되어있어. 아마도 옛날에 만들어진 요새 비밀탈출구 같은 곳인것 같아."

그들이 서 있는 맞은평에 나 있는 작은 문이 켈라드 요새의 지하로 통한다는 소리를 듣자 마자 에이브릴의 눈이 빛을 발하였다.

"요새 지하로 이어진다고?"

"응, 왜 그래?"

소리없이 환호하며 주먹을 불끈 쥐는 에이브릴과 그런 그녀의 모습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리셀과 레미아. 잠시 기버하던 에이브릴은 뒤쪽에 있는 리셀과 레미아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찾는건 켈라드 요새 지하에 있어. 지금 당장 움직이자."

갑작스러운 재촉에 레미아의 표정이 뚱하게 바뀌었다.

"언제는 켈라드에 뭐가 있는지도 모른담서?"

"뭐가 있는지는 정말로 모르지만 요새 지하에 있다는것과 그것이 우리 나라의 위기를 해결해 줄 비밀무기라는것은 알고 있었어. 여태까지 숨겨서 미안."

그런 그녀의 말에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돌아서며 뒤통수를 벅벅 긁어대던 레미아는 무어라 꿍얼거리면서 다시 돌아섰다. 그런 그녀와는 대조적으로 리셀은 이미 에이브릴의 뜻을 받들어 벽에 난 문을 열고 있었다. 문이 열리자, 레미아는 에이브릴은 한번 흘끗 본 다음에 횃불을 들고 앞장섰다.

"왠지 화난것 같습니다."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린 레미아의 모습을 보던 리셀이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이브릴에게 속삭였다. 에이브릴은 쓰게 웃었다.

"저라도 화가 났을거에요. 여태것 친구하고 생각한 사람이 비밀을 숨겨왔으니..."

"어쨋든, 가시죠. 지금 비밀 무기를 확보하실거라면 근무 교대가 진행 되기전에 그것을 손에 넣어야 우리에게 조금이나마 유리할 겁니다."

그들은 더이상의 대화를 하지 않았고 그렇게 약 20여분간 그들은 좁고 어두운 복도를 횃불 하나에 의지하여 지나왔고 어느 순간 그들은 거대한 지하 공동에 발을 내딛었다. 주변이 넓어진것을 확인한 리셀이 들고있던 횃불을 돌려 사방을 둘러보려 했으나 공간이 너무 넓어 벽조차 보이지 않았다.

"어둡습니다 공주님. 제 뒤를 잘 따라오십시오."

고개를 뒤로 돌려 에이브릴에게 한 리셀의 말. 에이브릴은 그런 그에게 무어라 대답을 하려했지만 그보다 빨리 누군가의 음성이 공동에 울려퍼졌다.

"그럴필요 없네."

위엄이 서린 굵은 남자의 목소리. 리셀의 목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에이브릴의 눈이 커지고 리셀과 레미아는 반사적으로 자신들의 무기를 빼 든 직후 사방에서 태양이 떠올랐다.

"윽,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세사람의 눈이 멀어버릴정도의 강한 빛이 공동의 지붕 여기저기에서 뿜어져 나와 공동 내부 전체를 하얀 빛으로 뒤덮어버렸다. 순식간에 사방이 대낮처럼 밝아졌고 에이브릴들은 그제서야 이 공동을 제대로 둘러볼수 있었다. 그리고 그 직후 그들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맙소사... 이들은 대체..!"

검은색과 노란색의 줄무니가 그어진, 수십명의 강철거인이 공동의 양쪽 벽에 도열해 있었는데 이들의 손에는 보통의 그것보다 배 이상은 크고 무거워 보이는 검과 도끼, 창이 들려있었다. 에이브릴과 리셀은 거의 삼미터에 육박하는 키와 그에 걸맞는 거대한 덩치를 가진 강철거인들의 위용에 압도되었지만 레미아 만큼은 강철거인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지구 연합에서 사용된 표준형 건설용 강화복.... 아직도 작동 가능한 물건이 있었군.."

"여기까지 제발로 찾아오다니,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주마 조카야."

과장된 동작으로 천천히 박수를 치면서 강철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오만한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장년의 남자. 에이브릴과 리셀은 그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리셀은 한때 자신이 모시던 주군으로, 그리고 에이브릴은...

"카이사르...! 당신도 여기 있었나?"

분노에 몸을 내맏긴 에이브릴의 날카로운 외침. 그녀의 말에 살짝 눈썹을 꿈틀거린 장년의 남자. 테블론 데 카이사르는 잠시 굳은 표정을 짓고 있다가 이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 큰아버지에게 예의가 너무 없구나 조카야."

에이브릴은 그런 그의 말에 발작적으로 소리질렀다. 다시금 그날의 참상이 떠오른 탓인지 지금 그녀는 눈앞의 남자가 하는 모든 말을 본능적으로 거부하려는듯한 과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당신은 내 큰아버지가 아냐! 이 악마! 짐승!"

그러나 카이사르는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는 에이브릴을 쳐다보지조차 않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두개의 검을 빼든 밝은 녹색 머리칼의 소녀에게 집중되어있었다. 그리고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소녀, 레미아도 말없이 카이사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서로를 마주보다 어느순간 카이사르가 씨익 웃었다.

"이런, 대단한 손님이 하나 더 있었잖나. 오랫만이군 레미아. 이십 육년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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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너무 늘어질까봐 이것저것 줄여버린게 많다보니 중간 이후부터 스토리가 급작스럽게 빨라지는 느낌이네요 ㅡㅡ;;
여지껏 앞에서 스리슬쩍 알게 모르게 던져둔 떡밥들이 풀리기 시작하는 편이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앞으로 두편, 에필로그로 쓸 외전까지 합하면 세편 남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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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츠 Ver. 2.0 작업중....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