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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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시아스 왕국 37기사단. 흔히 '망치 부대'라는, 다소 웃기는 별칭으로 불리는 부대이긴 하나 이들은 이런 별명까지도 자랑스럽게 여기는 부대. 병칭에서도 알아볼 수 있듯 37기사단의 제식 무장은 1미터를 약간 넘는 자루에 육 킬로그램이 넘는 머리를 가진 파괴적인 위력의 전투망치로 37기사단의 상징. 붉은 방패를 휘감은 청룡기가 오르게 되면 적 기사단의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으로 유명했다.

실제로 이들은 경장을 갖춘 일반 사병 보다는 전신 판금 갑옷을 걸치고 양손검이나 돌격창으로 무장한 적 기사단을 주적으로 삼는데 상대를 입고 있는 판금 갑옷 째로 짜부러뜨리는것은 예사고 개개인 모두가 창술과 검술에 조예가 깊어 돌격창을 든 일제 돌격과 양손검의 길이를 이용한 공격 등 이들의 상징인 전투망치를 이용한 공격이 딱히 아니더라도 상대편에게 공포를 심어주기 충분할 정도로 뛰어난 기량을 가진 이들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레미아가 눈앞의 사십대 남자를 경계하는 이유는 현재 왕국 제 37 기사단은 리델리온공의 친형, 에이브릴의 큰아버지. 그리고 현재 반란군의 수장이기도 한 카이사르 공작의 직속부대로 소속되어있었다.

"카이사르의 개가 여기까진 무슨 일이지? 공주를 쫒아왔나?"

상대가 가벼운 겉옷 안에 사슬갑옷을 받쳐 입은 것을 확인한 레미아가 양손에 들고 있던 톱날장검중 왼손의 것을 역수로 고쳐 잡으면서 차갑게 말했다. 그 즉시 중년 사내는 발끈했다.

"누구 앞이라고 카이사르 공작님의 존함을 함부로 부르는 것이냐 네 이년! 당장 에이브릴 공주님을 내놓지 못할까!"

에이브릴은 순간적으로는 자신을 알아본 기사(로 보이는)사내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으나 그 직후 레미아가 자신을 끌어당기면서 나지막하게 내뱉은 남자의 소속 부대에 장승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있었다. 그녀는 물론이거니와 방금 전 까지 델컨들과 사투를 벌이고 녹초가 되었던 다른 여행자들도 뻣뻣하게 굳은 채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어찌할 줄 모르고 있었다.

시체 타는 역한 냄새와 함께 그녀의 검에 묻어있던, 델컨들의 기습에서 미처 털어내지 못한 델컨의 초록색 피가 델컨들의 시체를 살라먹고 있는 거대한 모닥불의 불빛에 비춰져 번들거렸다. 레미아는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카이사르 공작'님'? 웃기고 자빠졌어. 권력에 눈이 멀어 자기 제수랑 두 조카들을 잔인하게 죽인 놈이 인간이긴 하냐? 응? 왜 널더러 마지막 남은 조카도 죽이래? 그렇겐 안 되지."

그 직후 상대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렸다. 그는 화등잔만 하진 눈으로 주변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여행자들을 돌아보며 무언의 물음을 던졌고 팔을 다친 아내를 돌보고 있던 삼십대 사내가 아내와 같이 나란히 무릎을 꿇은 채로 눈만 살짝 맞추고는 무언의 긍정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이미 주변에는 자신과 레미아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에이브릴을 향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손에서 힘이 빠졌는지 들고 있던 전투망치까지 떨어뜨리며 중년 사내는 한참동안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간신히 입을 떼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레미아의 표정도 그와 동시에 뒤틀렸다. 입가에서 냉소를 지운 그녀의 얼굴은 이제 완전히 일그러져 있었다.

"같잖은 연기는 집어치워.  당장 그 망치를 들지 않으면 5초 내로 다진 고깃덩어리가 되는 영광을 누리게 해주지."

그러나 그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멍한 표정으로 비척거리면서 그녀들을 향해 걸어왔고 레미아가 양 팔을 놀려 그의 목을 베어버리려 하기 직전 그녀들의 앞에 큰 소리가 나도록 무릎을 꿇고는 통곡하면서 소리 질렀다.

"37 기사단 소속 평기사 리셀 레이번! 국가 비상사태에 여왕폐하의 곁에 있어드리지 못한 점 백배 사죄드립니다! 3년간 외부 파견 때문에 미처 수도의 비보를 접하지 못하였습니다. 소신을 죽여주십시오!"

레 미아는 코웃음을 치며 사내의 목을 베어버리려다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두 자루의 검을 치켜든 그대로 한참동안 통곡하는 중년 사내를 노려보던 레미아는 말없이 들고 있던 검을 등 뒤로 돌려 검집에 꽃아넣고 돌아섰다. 에이브릴의 곁을 스치듯이 지나친 레미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37 기사단 전부가 니 삼촌의 개는 아닌 것 같네. 난 잘 테니 부하랑 회포나 풀어보라고."

델 컨의 사체를 태우는 장소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다시 자리를 잡은 레미아는 난장판이 된 야영지 구석에서 자신들의 모포를 찾아오더니 등에 지고 있던 배낭과 허리에 찬 두개의 검을 풀어 바닥에 아무렇게나 집어던지고는 그대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자리에 누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상대를 죽일 듯이 달려들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행동을 하자 레미아와 에이브릴. 리셀이라 불린 기사를 제외한 여섯 명의 여행자 모두가 멍청한 표정으로 레미아와 그녀가 뒤집어 쓴 모포를 바라보았다. 불룩하던 모포가 확 젖혀지며 짜증 섞인 표정의 소녀의 얼굴이 다시 튀어나왔다.

"이봐요! 거기 아줌마 아저씨들 안자요? 아직 한밤중이잖아. 그래서 어디 내일 길이나 가겠수? 그러고도 여행자들이야? 빨리 자!"

그리고 다시 원 상태로 돌아가는 모포를 바라보던 여행자들은 잠시 동안 멍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 정적을 깬 것은 뜬금없는 여자의 중얼거림이었다.

"나 아줌마 아닌데... 아직 스물다섯 살 미혼녀인데..흑."

델 컨의 기습 이후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폭소가 터져 나왔다. 한참동안 웃던 그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야영지 이곳저곳에 널브러진 자신들의 짐을 챙겨서는 레미아가 잡은 자리 근처에 모여 새로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새로 잠자리를 만드느라 부산한 가운데 황망한 표정의 에이브릴과 여전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소리 없이 흐느끼고 있는 중년의 기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이 귀머거리 기사양반. 댁도 그만 멍때리고 네 주인 데리고 잠이나 자둬. 내일부터 바쁘게 움직이려면 일분일초라도 더 쉬어두는게 좋을걸. 어떻게 기사씩이나 되는 양반이 저렇게 소식에 어두운지 쯧."

어느새 다시금 상체를 일으킨 레미아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신의 앞에 꿇어앉아 하염없이 눈물 흘리는 중년 사내의 모습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에이브릴이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상체를 숙여 그의 양 어깨를 짚었다.

"레이번 경.. 그녀의 말이 옳습니다. 우리는 날이 밝자마자 힘든 길을 가야합니다. 그만 일어나서 쉬도록 하세요."

그러나 레이번은 움직이지 않았다. 에이브릴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레미아를 돌아다보았지만 그녀는 원망스럽게도 어깨를 한번 으쓱 하더니 혀를 낼름 내밀고는 다시 모포를 뒤집어쓰고 자리에 누워버렸다. 짧지만 깊게 한숨을 내쉰 에이브릴이 자세를 낮추어 기사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레이번 경. 그대는 나를 따르겠는가?"

어조가 변했다. 조금 전까지 머뭇거렸지만 확실히 상대를 존중하는 표형을 쓰던 그녀가 다시금 왕족의 위압적인 어투로 변해 중년의 기사에게 물음을 던지고 있었다. 왕족의 어투에 흠칫하며 놀란 기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눈물을 그치고는 고개를 들어 대답했다. 그의 눈은 단호한 의지로 번뜩이고 있었다.

"예. 공주님을 위해 기꺼이 제 한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

다행히 이번 수는 먹혀들었다. 에이브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당장 그대는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내일부터 우리는 먼 길을 가야할 터. 그대 역시 쉬어야 할 의무가 있다."

기사는 오른손을 가슴께에 대고 고개를 조아렸다.

"명령이라면 기꺼이."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기세로 벌떡 일어난 리셀이 자신이 쓰던 자리에서 짐을 수거하기 위해 걸어갔다. 꺼질듯이 한숨을 쉰 에이브릴은 비척대며 모포를 덮어쓴 레미아의 옆으로 와 그녀가 눕기 전에 챙겨둔 자신의 모포를 다시 무릎위에 얹으며 자리에 앉았다.

"쑈를 해라 쑈를."

아직도 자지 않았던가. 모포 속에서 나지막하게 들리는 레미아의 이죽거림에 에이브릴은 피식 웃으며 모포를 펼쳐 몸에 덮으며 자리에 누웠다.

"잘 자 레미아."

상대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다시 한 번 죽은 어머니와 언니들의 얼굴이 떠올라 누운 채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에이브릴은 그렇게 그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1

맛있는 냄새. 따뜻한 감촉. 언젠가 한번 느껴본 적 있는 기묘함을 느끼며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밤새 모조리 태워버린 야영지 공용땔감을 다시 채워넣고 있는 사람들의 분주한 움직임이었다. 냄새의 근원지로 고개를 돌리자 어제 먹었던 것과 비슷한 봉투를 한손에 든 채 자신을 보며 씨익 웃는 밝은 녹색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있었다.

"일어났어? 막 깨우려던 참인데."

자신에게 내밀어지는, 여전히 그 재질을 알 수 없는 따뜻한 봉투와 수저를 받아든 에이브릴은 주위를 둘러보다 자신이 아는 얼굴 하나가 보이지 않자 레미아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레이번 경은?"

레미아는 대답하는 대신 입에 든 것을 우물거리며 어깨를 으쓱 하고는 말았고 그에 대한 대답은 에이브릴의 등 뒤에서 나왔다.

"저희가 간밤에 사용한 땔감을 다시 채우고 있었습니다."

뒤를 돌아보자 품에 마른 장작을 가득 안고 나타난 중년 사내가 있었다. 갈색의 짧게 자른 머리칼 군데군데 하얀 서리가 내려앉아있는 그는 전날 밤에 봤을 때 보다 훨씬 나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레이번 경."

원래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공용 야영지의 경우 길 가에 터를 닦고 바닥에 낮게 자라며 생명력이 강한 풀을 심어 대지를 조성하는 것 까지는 국가, 혹은 해당 지역의 영주의 책임이었지만 이를 관리하고 자체 보수하는 것은 그때그때 이곳을 머무르는 여행자들의 몫이었다. 이들은 날이 밝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자신들이 사용했던 땔감만큼의 나무를 다시 채워 넣었고 혹여나 야영하던 과정에서 파헤쳐진 땅이 있다면 이를 돋우고 바닥에 깔린 잔디를 바로잡았다. 이것은 여행자들 사이에 암묵적으로 반드시 지켜야 할 그들만의 규칙이었다.

"이런 장소에서 공주님이 쉬셨다는 자체가 죄송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다음부터는 결코 이런 일이 없도록 신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저런 날건달 같은 꼬마 계집애대신 말이죠."

리셀은 잠시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천연덕스럽게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 레미아를 노려다 보았지만 레미아는 되려 숟가락을 문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양 손을 들어 올려 어쩌라는 듯한 몸짓을 보내고는 에이브릴을 바라보았다.

"넌 밥을 받았으면 먹어야지 뭐하니? 고사지내?"

레미아의 말에 리셀이 즉각적이고도 단순한 반응을 보였다

"무례하다! 공주님께 예의를 지켜라! 건방진 꼬마!"

"아, 시끄러 노땅. 지금 상황에서 공주마마 공주마마 했다간 오히려 위험한건 우리라고."

숟가락을 물고 있으면서도 발음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리셀과 입씨름을 하는 레미아의 모습을 보고 있던 에이브릴은 힘없이 웃으며 자리에 주저앉아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리셀과 입씨름을 하다 말고 그런 그녀의 표정을 유심히 쳐다보던 레미아가 물고 있던 숟가락을 빼내며 중얼거렸다.

"이제 안 우네? 어제는 종일 웃다 울다 그랬잖아."

레미아의 말에 에이브릴은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푹 숙인채로 가만히 있던 그녀는 이내 다시 고개를 들고 힘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누가 봐도 억지로 짓는 것이 확실해 보이는 웃음.

"이제 울지 않기로 했어. 적어도 어마마마와 언니들의 복수를 끝내기 전 까진."

비 록 힘없는 미소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그렇지 않았다. 뭔가 결심을 단단히 한 듯 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레미아는 피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손으로 에이브릴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었다. 거의 엉덩이께 까지 내려오는 에이브릴의 탐스럽고 부드러운 금발이 한 말괄량이의 손에 의해 사방으로 마구 휘날렸다.

"꼬맹이가 그런 눈빛을 함부로 하는 게 아냐. 그런 눈빛은 우리 같은 것들이나 하는 거라고."

"그만, 아파!"

자 신이 섬기기로 한 주군의 머리칼을 아무렇지 않게 흩어 버리는 레미아의 모습을 본 리셀은 발끈하며 레미아의 어깨를 잡아채 그녀를 바닥에 팽개치기 위해 손을 뻗었으나 에이브릴이 그것을 손짓으로 만류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에이브릴을 바라본 리셀은 에이브릴이 레미아의 괴롭힘에 아까와 같은 억지웃음 말고 정말로 순수하게 웃고 있음을 확인하고는 슬그머니 레미아에게 뻗으려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악! 그만! 항복이야 항복! 가, 간지럽다고!"

이제는 아예 에이브릴을 뒤에서 끌어안고 그녀의 겨드랑이를 간지르는 레미아였다. 완전히 바보 같은 표정을 짓고 바닥을 뒹굴며 장난을 치는 두 소녀를 바라보고 있던 리셀은 말없이 방금 팽개쳤던 장작들을 수습하고는 그것을 야영지 중앙의 적치장으로 들고 갔다. 사십대 중반의 베테랑 기사는 눈으로는 보았지만 머릿속으론 도저히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듯 연신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었다.

'그런데 저 꼬맹이.. 방금 전의 그 눈빛은.. 뭐지?'

리 셀은 조금 전 에이브릴과 대화를 나눌 때 언뜻 스쳐지나갔던 레미아의 표정에서 뭔가 모를 위화감을 잔뜩 느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적어도 에이브릴과 비슷한 나이대의 여자아이가 흔히 지을 수 있는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흡사 어머니가 자식을 보는듯한... 아니, 아닐 것이다 잘못 본 것이겠지. 리셀은 애써 그것을 부정하면서 자리로 되돌아 왔다.

"오셨수 노땅? 이것 좀 들어보지?"

자 리로 돌아온 리셀에게 레미아가 무엇을 내밀었다. 방금 전 에이브릴이 받았던 것과 같은 모양을 한 봉투와 숟가락이었다. 처음 보는 물건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던 리셀은 맞은편에 앉은 에이브릴이 봉투의 주둥이를 열고 숟가락을 그 안으로 집어넣어 무엇인가 떠먹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녀를 따라 자신도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그 안에 들은 것은 그로써도 너무 의외의 물건, 그러니까 따뜻한 김을 품고 있는 '제대로 된' 음식이었다.

"어?"

리셀은 레미아를 흘끗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상대의 무언의 질문을 알아챈 레미아가 정말로 별것 아니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재미삼아서 만들어 다니는 여행식이야. 적어도 지금은 나한테서 말고는 어디서 얻어먹을 수 있는데 는 없을걸. 식기 전에 빨리 먹으라고 아저씨."

도중에 마을을 한 번도 들르지 않고 오로지 가지고 있던 말린 과일과 육포 따위로 오랜 시간 여행해 왔던 리셀에게 레미아가 건네준 음식은 너무나도 평범한 음식이었지만 무엇보다 맛있는 음식이기도 했다. 순식간에 봉투 안의 밥을 비워버리는 리셀을 본 레미아가 질렸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다.

"돼지 같으니라고."

리셀도 레미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얼굴을 마주 찡그렸다.

"그게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할 소리냐? 버릇없는 꼬맹이 같으니라고"

"누가 당신 아버지라는 거야. 흥."

내가 말을 말지. 리셀은 조금도 지려 하지 않는 소녀의 뻔뻔한 태도에 질려버린 듯 들고 있던 빈 봉투를 한손으로 구기며 쓰던 숟가락을 내밀었다. 그리고 레미아의 대답은 가관이었다.

"자기가 쓴건 자기가 씻어야지 어디서 남한테 미뤄."

기어이 리셀은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알았다. 알았어. 예의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꼬맹이."

    2

"여기서 공주를 봤다는 건 모두 비밀로 해주는 거예요. 약속?"

해 가 완전히 떠오르고 날이 어느 정도 따뜻해지자 에이브릴 일행을 포함한 여행자들은 다시금 길을 떠나기 위해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레미아는 그녀의 상징과도 같은 일곱 자루의 검을 온 몸에 매달고는 여행자들을 모두 불러 모아서 이들에게 신신당부하고 있었다.

"두말할거 있나. 우리도 지금 반란군이 세운 신정부는 영 탐탁치가 않다고."

어젯밤 델컨들을 향해 귀신같은 솜씨로 기름주머니를 던지던 남자(놀랍게도 그는 직업이 목동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태연자약하게 말을 받았다. 그의 뒤에 있던 부부도 말을 이었다.

"우리 여왕님 정말로 좋으신 분이었는데 그렇게 허무하게 가시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자신의 일처럼 한탄하며 슬퍼하는 아내의 어깨를 다독이던 그녀의 남편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레미아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어딜 가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히 도착하길 빌어줄게. 아, 그리고 나 아줌마 아냐. 녀석아."

피식 웃으며 레미아의 이마를 살짝 쥐어박은 여자는 어젯밤 단검을 쓰던 여자다. 그녀는 그렇게 레미아에게 말을 던지고는 에이브릴 앞으로 다가와 다소 과장된 몸짓으로 크게 인사했다.

"가시는 길 건강하셔야 합니다. 공주님?"

에이브릴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여자의 인사를 받았다.

"예.. 예에..."

그 사이에 마지막 여행자에게서 까지 절대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들은 레미아가 활기찬 걸음걸이로 에이브릴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 직후 에이브릴에게 인사를 하던 여자가 레미아를 돌아보았다.

" 어제 우리 전부의 목숨을 살려준 대가로 재미있는 걸 하나 알려줄게 꼬맹이. 어제 지나면서 확인한 건데 지금 켈라드 쪽에 반란군으로 보이는 군대가 집결하고 있어.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아 보이더라고. 혹시나 근처에 갈일이 있거든 켈라드는 피하는 게 좋을 거야."

그녀의 말에 에이브릴과 레미아는 내심 놀랐으나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표정만은 어쩔 수 없었는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 된 레미아가 말을 받았다.

"쳇. 머리 아프게 돼 가는구만. 여튼 정보 고마워요 아.줌.마."

레미아의 짖궂은 말에 발끈한 여자가 대번에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아니라곳! 몇 번을 말해! 나 아직 미혼이라고!!"

그러나 레미아는 그런 외침이 통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예이 예이. 그럼 잘가요 다들. 무사히 목적지까지 도착들 하시라고요."

여자의 외침을 무시라도 하듯 레미아는 에이브릴의 등을 떠밀면서 여자를 스쳐 지나갔다. 여자는 에이브릴들의 행선지가 자신이 지나왔던 길로 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해. 빨리 가자고. 안 그래도 땔감 채워 넣느라 출발이 늦었잖아!"

"지금 갈게!"

이미 앞서 나간 채 자신을 재촉하는 동료의 외침을 들은 여자는 대답하며 자신의 일행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녀는 달려가던 도중에 살짝 고개를 돌려 이제는 멀찍이 떨어진 셋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한숨을 쉬었다.

"무사해야 할 텐데..."

그녀가 에이브릴들을 돌아보던 그 시간, 그녀와 거의 동시에 자신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사라지는 여섯 명의 여행자들을 돌아보던 레미아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일행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저 언니가 말한 게 사실이라면 켈라드에 괜히 갔다가 개죽음 당할 수도 있어."

그러나 그녀의 그런 경고도 에이브릴의 결심을 꺾지 못했다.

"그래도 가야지. 켈라드에 가지 못하면 내 복수도 그대로 끝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리셀이 크게 놀라며 그녀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반군이 득실거린다는 그곳에 대체 무슨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가야 한다는 것인가. 그는 허둥거리며 자신이 모시기로 한 주군에게 물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공주님. 켈라드라뇨? 아까 그 사람 말대로라면 지금 거기는..!"

그의 질문을 받은 것은 에이브릴이 아닌 레미아였다.

"몰라, 거기 가면 뭔가 복수할 수단이 있다나 봐. 반란군이 그런 도시에 모인걸 보면 전혀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닌 것 같네. 왕가에서 내려져 오던 비밀무기라도 있나보지 뭐."

"잠시, 비밀무기라니! 거기에 정확하게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데 막연히 그런 이야기만 믿고 가기엔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리셀의 외침에 레미아가 인상을 구기며 그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아따 그 아저씨 참 말 많네. 생긴건 조용하게 생겨갖고 무슨 남자가 그렇게 입이 싸요? 댁이 모시는 공주님이 가면 가겠다는 거지 무슨 말이 그렇게 많수? 자, 갑시다~"

"잠시! 밀지 마. 밀지 마! 뭔 꼬맹이 계집애가 힘이 이렇게 좋아! 공주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공주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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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나! 잠들면 안돼! 정신좀 차려보라고!"

시간상으로는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한밤중을 연상하게 할 정도로 빛을 막아버린 짙은 먹구름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를 뚫고 두개의 그림자가 달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셋. 옆에서 달리는 그림자보다 다소 덩치 큰 그림자는 등에 무엇인가를 들쳐 업고 있었다. 축 늘어진 두 팔이 그림자가 크게 걸음을 내달을 때 마다 앞뒤로 힘없이 출렁거렸다.

"아저씨 일단 저 나무 아래서 잠시 멈춰봐!"

빗물에 젖어 밝은 녹색 머리칼이 짙은 녹색으로 변해버린 레미아가 얼굴에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얼굴 양쪽으로 쓸어내며 옆에서 나란히 달리고 있는 리셀에게 소리질렀다. 그녀가 지시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족히 이삼백년은 됨직한 트롤리 나무 한 그루가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잎이 크고 질기며 가지가 무성하게 나는 트롤리 나무는 대륙 서쪽에서는 보기 힘든 수종이었는데 그들이 보고 있는 수령의 나무라면 아무리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 해도 완전치는 않지만 어느 정도 비를 막아 내 줄수 있으리라.

"공주님! 이렇게 쓰러지시면 아니됩니다! 부디 정신을 차리시옵소서!"

리셀은 자신이 들쳐 업고있는 에이브릴의 팔이 조금 전부터 완전히 힘을 잃고 출렁거리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에 이를 악 물었다. 레미아가 그녀의 망토마저 벗어 리셀이 업은 에이브릴을 보호하기 위해 뒤집어 씌워놓았지만 엄청난 비바람이 몰아치자 그것도 무색하게 에이브릴의 온몸은 비에 흠뻑 젖어있었다.

"여기. 이쪽으로!"

근 삼십분을 쉬지도 않고 전력 질주로 돌파한 이들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레미아가 지목했던 트롤리 나무 아래로 구르듯이 뛰어들었다. 사람 서넛이 서로 손을 맞잡아야 할 만큼의 굵은 줄기의 아랫부분에는 마치 이런 상황을 바라기라도 했다는듯 구멍이 뚫려 있었는데 리셀은 완전히 정신을 잃은 에이브릴을 조심스럽게 안아들어 밑둥에 난 구멍 안쪽으로 기대어 뉘였다.

"이런.. 이래서는.."

구멍은 그다지 크지는 않아 사람이 완전히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고 단지 위나 좌우에서 몰아치는 빗방울로부터 몸이 젖지 않을정도밖에는 되지 않았기에 레미아는 즉석에서 이를 보완하기로 했다. 에이브릴의 몸을 덮었던 그녀들의 망토 두장을 챙긴 뒤 배낭에 매달린 검집 아랫쪽에서 쇼트 소드를 꺼낸 레미아는 그것을 망토의 끝자락과 함께 나무에 깊숙히 박아넣었다. 이윽고 칼을 박아넣은 반대편 끝자락을 두쪽 다 모아쥔 그녀는 어찌할줄 모르고 쩔쩔 매는 리셀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서 그것 역시 나무 줄기에 박아넣었다.

"일단 된것 같은데..."

순식간에 에이브릴의 상체가 기대어지듯 뉘여진 나무 구멍을 중심으로 조악하지만 어느정도 비바람을 막아줄수 있는 임시 천막이 만들어졌다. 나무가 뿌리를 내린 대지 역시 야트막한 언덕의 꼭대기였던 탓에 빗물은 바닥에 고이지 않고 아래로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레미아는 그렇게 만들어진 천막 안쪽으로 상체를 집어넣고 에이브릴의 이마에 손바닥을 갖다 대었다. 차디찬 가을비를 한참 맞았음에도 이마는 펄펄 끓다시피 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몸살감기..이긴 한데.. 증상이 너무 심하잖아.. 힘들면 이야기를 하든지.. 쯔.."

목적지 까지 가는데 시간을 지연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 자기 자신임을 잘 알고있던 에이브릴은 거의 삼일동안 리셀과 레미아의 빠른 걸음을 억지로 따라 강행군을 자처했고 혹여나 자신이 둘의 발목을 잡을까 우려하여 힘든 내색을 별로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때와는 완전히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에 레미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배낭을 열었다. 약간 비가 새어들어가긴 했지만 그 안에 있던 옷가지는 그다지 젖지 않았기에 레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 쉬며 완전히 젖어버린 에이브릴의 옷을 상의부터 벗겨내었다.

"공주님의 상태는 어떠한... 우악!"

안에서 레미아가 무엇을 하는지 몰랐던 리셀이 멋모르고 그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고 그 즉시 레미아의 응징이 가해졌다. 천막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리셀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것은 에이브릴의 상반 나신이 아닌 레미아의 가죽 부츠였다.

"이 꼬맹이가 보자보자 하니 어른을 보자기로 아는것이냐!"

레미아의 발에 얼굴을 걷어채여 천막 밖으로 나동그라진 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 리셀의 일갈에 레미아는 천막 안에서 맞고함을 질렀다.

"당신이야 말로 방금 왕족 능멸죄로 사형 당할뻔한거 알아? 방금 얘 옷 갈아입히고 있었다고!"

"....."

리셀이 침묵하자 레미아는 하던 일을 마무리 짓고 천막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어딘가 짓궂어보이는 미소를 머금고 말이다.

"설마 댁도 사내랍시고 감히 공주님께 욕정하는건 아니겠지?"

리셀의 얼굴이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일그러지더니 곧이어 그 일그러짐은 분노로 변하였다. 힘줄이 드러날 정도로 주먹을 꽉 쥔 그는 레미아를 향해 삿대질을 시작했다.

"에잇! 예의라고는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박은 계집애 같으니라고! 어디서 그런 망언을!"

지난 며칠간 보아온 바 리셀이 절대 그럴만한 인물이 아님을 알고 있는 레미아였기에 일종의 분위기 환기용으로 가볍게 던진 농담이었지만 리셀이 그녀의 생각보다 과격한 반응을 보이자 머쓱했던 나머지 혀만 쑥 내밀고는 다시 천막 안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여튼 지금 들어오진 마셔 아저씨. 아까도 말했지만 공주님 옷 갈아입혀야 해. 이렇게 젖은채로 두면 더 악화될거라고. 거기 가방에서 수건좀 꺼내다 줄수 있어?"

천막 밖으로 불쑥 튀어나오는 레미아의 손. 리셀은 투덜대며 밖에 놓인 레미아의 가방 안에서 약간 젖어있는 수건을 꺼내어 그 손에 쥐어주었다. 수건을 쥔 손이 천막 안으로 사라지자 리셀은 한숨을 푹 내 쉬며 그나마 빗물이 덜 들어오는 쪽으로 몸을 옮겨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 앉았다.

"에이. 무슨놈의 비가..."

비는 끔찍할 정도로 내렸지만 구름이 몰려오고 비가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이 한시간이 채 안되었음을 생각해 보면 단순한 소나기일 뿐이라 그다지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것 같았다.

"문제는... 공주님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물주머니의 마개를 열고 입가에 가져가 목을 축이던 리셀의 눈에 그들이 있는 나무로 다가오는 사람의 그림자가 들어온것은 그때였다. 사람의 윤곽선으로 보건대 여자였는데 특이한 것은 구하기도 힘든, 말 그대로 눈처럼 하얀 순백색의 옷감으로 만들어 진 망토를 걸치고 같은 색깔의 후드를 깊게 눌러써 거리가 점점 가까워짐에도 리셀은 상대의 얼굴 윤곽조차 확인할 수 없었다.

"뭐지... 사람...이긴 한건가..?"

리셀이 그런 의문을 가질만도 할 것이 그 하얀 그림자는 우레같이 쏟아지는 비를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천천히 나무 아래로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거리가 어느정도 가까워지자 리셀은 오싹해지며 전신의 털이 곤두서는것을 느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사방이 진창길임에도 하얀 그림자의 망토 끝자락에는 흙은 커녕 풀잎 하나 붙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

리셀은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찬 전투망치의 손잡이를 붙잡고 이제는 적을 바라보는 기사의 눈으로 접근하는 하얀 그림자를 노려보았다. 리셀의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그림자는 태연한 걸음걸이로 트롤리 나무 아래로 걸어오더니 이내 가벼운 한숨과 함께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뒤로 넘겼다.

"갑자기 무슨 비가.. 음..? 안녕하세요."

리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가 전투 자세로 들어서 있음을 두 눈으로 뻔히 보고 있음에도 태연자약하게 인사를 하는 상대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나 윤곽선으로 보아 여자인것은 확실했지만 상대는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휴.. 요새 들어 날씨가 왜 이런지 모르겠네요."

그녀가 한숨을 쉬며 걸치고 있던 망토를 벗어들자 리셀은 그녀의 머리카락 길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정리되지 않은 검고 풍성한 머리카락이 여자의 종아리께까지 내려오고 있었던것이다. 망토 안쪽에 입고 입는 옷 역시 여행자들이 입고다니는 옷이라고 보기 어려운 것이 상하의가 나뉘어지지 않은 부드럽고 얇은 재질의 흰옷을 입고 있었는데 통이 넓지 않은 치마는 복사뼈 부근까지 내려오고 있었다.

'차림새가 흡사... 귀신 같지 않은가.. 왜 저런식으로 차려입고 다니는거지..?'

겉옷에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았다는게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녀의 행동에서 적대 의사는 커녕 간단한 무기조차 보이지 않았다. 단지 망토 아래쪽에 작고 가벼워보이는 갈색 배낭 하나만을 걸치고 있었기에 리셀은 일단 그녀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지만 옛날 이야기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하얀 소복을 입은 귀신의 이미지를 하고 있는 모습에 리셀은 눈가를 찌푸리며 여자를 위아래로 연신 바라보았다.

"아저씨 뭐해요? 혹시 약 가진거 있...."

어느새 천막 밖으로 나온 레미아가 그런 리셀의 등을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다가왔다. 그리고 산발에 가까운 머리카락을 정리조차 하지 않고 비가 오는 하늘을 바라보던 여자도 고개를 돌렸다. 리셀이 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던 레미아와 뒤에서 들린 사람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두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얼래?"

"...레미아?"

서로를 아는듯한 반응, 더구나 흑발 여인은 레미아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그녀들의 대화가 이어지자 리셀은 두 여자를 두어번 번갈아 보더니 레미아를 보며 물었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

리셀의 물음이 나오기 무섭게 레미아가 흑발여인에게 달려가더니 그녀의 손목을 덥썩 잡았다. 그런 레미아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여자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왜그래요. 으앗?"

가녀린 여인의 팔을 무자비하게 잡아당겨 억지로 일으켜 세운 레미아는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나무 뒤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여자가 무어라 말했지만 바로 그 뒤에 터져나온 레미아의 외침에 그대로 묻혀버렸다.

"딱 이럴때 널 만나네? 빨리 와! 할일이 있어!"

"소, 손좀 놓고 말을 해요 말을! 레미아. 좀!"

"시끄러! 넌 하루하루 병자나 고치는 약 셔틀일 뿐이지!"

"너무해요!"

폭풍처럼 일어난 사태 이후 두 여자가 나무 뒤쪽, 에이브릴을 눕혀둔 천막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던 리셀은 한참동안 멍한 표정을 유지하다가 한숨을 푹 내 쉬었다.

"하여튼 저 꼬맹이는 뭔가 사람을 바보 만드는데 재주가 있다니까."

    1

에이브릴은 목이 타는듯한 갈증을 느끼면서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두컴컴해 아무것도 보이 않자 그녀는 당황하여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가 무엇인가에 머리를 찧고는 이마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아야야야야..."

그렇게 구르던 그녀의 몸에 무엇인가 물컹한 것이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란 에이브릴은 이마에서 느껴지는 아픔도 잊은채 돌처럼 굳어있다가 그것을 천천히 더듬기 시작했다.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옷감의 감촉. 따뜻한 체온.

"사람?"

그와 동시에 에이브릴 옆에 누워있던 사람이 팔을 뻗어 그대로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에이브릴은 팔을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상대의 팔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상대는 곰인형을 끌어안듯이 에이브릴을 꼭 끌어안았다. 맞닿아 있는 상대방의 살결 느낌으로 봐선 여자였기에 에이브릴은 레미아의 장난이라 생각하고 발버둥을 치면서 간신히 빠져나왔다.

"레미아도 참.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어둠에 어느정도 익숙해지자 에이브릴은 발 아래쪽에서 빛이 들어옴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다리부터 빛을 향해 내밀었다. 빠져 나오고 보니 좁은 동굴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굵은 나무둥치에 난 구멍에 망토 두개를 이어붙인 임시 천막이었다. 따뜻한 아침햇살을 온몸으로 받고 있던 에이브릴은 갑자기 몰려오는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공주님? 정신이 드셨습니까!"

쓰러질려는 찰나 뒤에서 그녀의 양 어깨를 부드럽게 붙잡는 두터운 남자의 손. 뒤를 돌아보자 리셀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에이브릴을 내려다 보고 있었고 그녀는 고지식하고 잔걱정 많은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조금 어지러울 뿐이에요. 걱정시켜드려 죄송합니다. 레이번 경."

그리고 그런 리셀의 뒤에서 레미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 일어나셨네. 역시 녀석이 쓰는 약이 효과는 좋다니까?"

에이브릴은 뒤를 돌아보았다. 맑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반달모양으로 일그러지며 레미아 특유의 장난기 어린 미소를 만들어내었다. 그러나 지금 에이브릴에게 중요한것은 레미아의 미소가 이니었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이 나온, 나무둥치 천막을 보았다가 다시 레미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 안에는 누구..?"

레미아와 리셀의 시선이 에이브릴의 손가락을 따라갔다가 되돌아왔다가 귀신이라도 본듯 사색이 되어있는 그녀의 표정에 결국 웃음을 참지 못하고 제각각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의 웃음은 결국 공주가 볼을 부풀리고 노골적으로 불만이 섞인 콧소리를 내고 나서야 멈추었는데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레미아의 눈가에는 눈물자국까지 있었다.

"뭐가 그렇게 웃겨?"

레미아는 여전히 웃음을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답해주었다.

"아니, 아까 너 표정이 너무.... 아하하핫!"

다시 배를 잡고 웃는 레미아를 보며 살짝 화가 난 에이브릴이 다시 볼을 부풀렸다.

"그만 웃어! 이건 공주로써의 명령이야!"

소리내어 웃지는 않았지만 입꼬리를 씰룩거리고 있던 리셀은 그런 그녀의 외침에 주변정리를 한다는 핑계아닌 핑계를 대고 슬쩍 자리를 피했다. 여전히 웃고있는 레미아와 에이브릴이 서로 아웅다웅하는 가운데 그녀들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활기차서 좋네요. 몸은 어떠세요?"

여자 목소리였지만 레미아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자 종아리께까지 길게 기른 검은 머리칼을 가진, 흰옷의 여성이 서 있었는데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 정리가 힘든 듯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에이브릴은 직감적으로 그녀가 방금 자신과 같은 천막에서 자던 사람임을 깨달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에리엘이라고 해요."

여인은 다소곳한 자세로 에이브릴을 향해 고개숙여 인사했다. 길고 검은 머리칼이 그녀의 상체를 따라 아래로 쳐졌다가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왔고 그제서야 그녀는 얼굴을 가린 앞머리를 손으로 정리하여 귀 뒤쪽으로 넘겼다. 에이브릴은 물론이고 리셀 역시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을 확인 할수 있었는데 가느다란 턱선과 잡티 하나 없는 고운 피부, 머리칼 색을 닮은 검은 눈동자와 부드러운 미소가 인상적인 이십대 중반의 미인이었다.

"참고로 어제 밤새도록 네 병간호를 해준 녀석이기도 하고. 저녀석 의사거든."

레미아의 보충 설명. 그제서야 상황파악이 된 에이브릴이 눈앞의 여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몸에 밴 왕가의 예절을 십분 발휘하여 자신을 에리엘이라 소개한 흑발 여성을 향해 우아하게 인사했다.

"테시아스 왕국 3왕녀 에이브릴 엘 테시아스입니다.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이브릴의 보답 인사에 에리엘이 쑥쓰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뇨, 별거 아니었어요. 원래 제 일인데요 뭘."

그녀들이 대화를 하는 사이 불을 피우고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리셀은 물이 끓기 시직하자 때때로 가볍게 투닫거리며 서로 대화를 하고 있는 세 여자를 향해 외쳤다.

"잡답은 거기까지! 아침 안먹을거냐! 레미아 넌 빨리 그 보존식인지 여행식인지부터 내놔!"

"어쭈, 이젠 아예 자기것처럼 말하네? 이건 내 밥이라고. 늙은이는 육포나 뜯으시지?"

레미아의 대답에 리셀은 대번에 발끈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삿대질과 함께 고함을 질러댔다.

"그 입 다물지 못할까! 버릇없는 꼬맹이!"

"잔소리 많은 늙은이!"

"시끄러운 꼬맹이!"

"쪼잔한 늙은이!"

"노인 공경도 모르느냐!"

"노인 공격은 알지! 밥은 먹고 다니슈?"

"이녀석이 보자 보자하니까 어른을 보자기로 아나!"

"댁이 보자기면 난 가위야!"

순식간에 서로 독설을 주고 받는 두 남녀를 바라보던 에이브릴이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지으며 둘을 바라보는 에리엘에게 물었다.

"....에리엘이라고 했죠? 레미아랑 잘 아는 사이에요?"

에이브릴의 질문에 오른손 집게손가락을 입가에 대고 잠시 골똘하게 생각하던 에리엘이 왼손으로 하나 하나 숫자를 세다가 그녀의 질문에 답을 해주었다.

"제법 오래 됐죠 아마...?"

".....원래 저래요?"

"뭘요?"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한테 버릇없이 대하는거. 당장 에리엘만 봐도 레미아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아무렇게나 막 대하고 있잖아요. 뭐 리셀도 별로 싫어하지는 않는거 같긴 한데 저는 좀 보기가 그렇네요."

재미있다는 눈으로 에이브릴과 투닥거리는 리셀과 레미아를 번갈아 보던 에리엘이 에이브릴을 바라보며 한쪽 눈을 찡긋 하면서 대답했다.

"글쎄요?"

에리엘의 입가에서 살풋 미소가 떠올랐다. 알쏭달쏭한 그녀의 대답에 에이브릴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이젠 아예 주변의 나뭇가지를 꺾어 서로를 향해 던지는 중년 남자와 소녀의 모습을 눈가를 찡그리며 바라보던 에이브릴로썬 그녀의 취향에 맞는 대답은 아니었다.

"재미없게 무슨 대답이 그래요. 레미아가 그러는거 별로 기분 나쁘지 않나봐요?"

그리고 상대의 대답은 뜬금없었다.

"즐겁지 않나요?"

"....?"

에이브릴은 되려 질문을 던지는 에리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까부터 짓고있던 부드러운 미소를 시종일관 유지하고 있던 그녀는 걸음을 옮겨 바닥에 놓인 레미아의 배낭을 뒤적거려 여행식 네 봉지를 꺼내어 레미아가 그랬듯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것의 주둥이를 뜯고 리셀이 끓여놓은 더운 물을 부어 흔든 뒤 바닥에 하나 둘씩 내려놓았다. 자기를 따라 옆에 앉은 에이브릴에서 물을 넣은 여행식 한봉지를 건넨 에리엘이 흐트러진 에이브릴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입을 열었다.

"레미아랑 같이 있으면 뭔가 모르게 즐겁거든요. 어디로 튈줄 모르는 공 같은느낌이랄까. 솔직히 보고 있으면 재미있지 않나요?"

"뭐.. 그거야.."

에이브릴은 고개를 돌려 은폐 엄폐를 반복하며 서로에게 무엇인가를 던지고 있는 부녀뻘의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이젠 아예 즐기는듯 처음의 험악한 인상은 간데 없고 둘 다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런 모습을 한참 보고 있던 결국 에이브릴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풀썩 웃고 말았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풋.."

"그렇죠?"


에리엘도 마주 웃었다. 서로를 마주보며 한참 작게 소리내어 웃던 둘은 여전히 전쟁아닌 전쟁을 벌이는 레미아와 리셀을 바라보았고 에이브릴이 무어라 말하기 전에 에리엘이 먼저 소리쳤다.

"레미아~ 그만 하고 아침부터 드세요. 레이번 기사님도 빨리 오시구요. 자꾸 놀아주면 레미아 버릇 나빠져요."

"우왓! 에리엘 니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이건 배신이야!"

"역시 니편은 없구나 꼬맹아. 끌끌..."

그녀의 말에 뭔가 잔뜩 충격을 받은듣한 표정을 짓는 레미아. 그리고 승리한 자의 미소를 머금은 리셀. 그들은 천천히 에리엘과 에이브릴이 앉아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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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말고 다른 사이트에도 올리고 있는데 어저다 보니 여기엔 3편 올리는걸 깜박 했네요.

그래서 3편 4편 같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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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츠 Ver. 2.0 작업중.... 언제 끝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